[스크랩] 탱고 레슨 (the tango lesson)
탱고레슨 (The Tango Lesson)
성(gender)에 대한 무겁지 않은 사색
(올란도)란 영화를 혹시 아시나요?
남자로서 200년, 여자로서 200년의 세월을 사는 영국의 젊고 아름다운 귀족 올란도의 삶과 육체의 변화를 기록하면서 죽음, 사랑, 시, 정치, 사회, 성 그리고 탄생을 초현실적으로 그려낸 대서사시였죠.
봉건제에서 자본주의에 이르는 4백년간을 훑으며 모든 것을 다 가졌던 남자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자가 더 행복하다는 역설적인 결론을 내리며 이제 미래는 누구의 것이냐고 전투적으로 선언한 영화 (올란도)는 아주 과격하면서도 진지하고, 실험적이지만 역사적인 비전을 갖고 있는 페미니즘에 관한 뛰어난 이론서지요.
(올란도)를 단번에 페미니즘의 최고봉이자 고전으로 등극시키며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던 샐리 포터는 (탱고레슨)에서 (올란도) 이후 헐리웃 진출에 난항을 겪었던 경험을 그대로 풀어내고 있지요. 극도로 다채롭고 탐미적인 색감과 양식화된 장면으로 잠깐씩 소개되는 영화 속 영화 (분노)에서 그는 영화 산업에서의 여성 감독의 무력한 처지에 대한 번민과, 상품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제작진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감독의 고민과 창작의 고통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매우 자전적인 자기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탱고영화입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영화감독 샐리는 영화제작 과정 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현실의 장벽이 두터워질수록 더욱 더 탱고의 유려한 선율에 집착하게 되지요. 예술에 대한 욕망이 다른 형태로 발현된다고나 할까요. 감독은 실제 탱고 댄서인 파블로 배론에게 초보부터 전문가 단계까지 탱고의 스탭 바이 스탭을 배워가면서 탱고와 사랑에 동시에 빠져드는 역할을 온몸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습니다. 샐리가 처음 파블로에게 레슨을 받던 날 파블로는 이렇게 지시하죠. “걸어봐요” “물 흐르듯이” “중심을 잡아요” 라고. 이 말은 곧 “무슨 일이든 자유롭게 저질러 보되 신념을 가지고 행하라”는 우리네 삶에 대한 조언으로도 읽힐 수 있겠지요.
비오는 거리와 기차역과 부두와 탱고빠와 호텔 안을 종횡무진하며 펼쳐지는 탱고의 장면은 정말이지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멋들어집니다.
(파리 텍사스), (천국보다 낯선), (브레이킹 더 웨이브)등을 촬영한 로비 뮬러의 아름답고도 역동적인 카메라는 이 멋진 모습들을 흑백 필름 속에 유장하고 리드미컬하게 담아내고 있지요.
하지만 그것 뿐만은 아니죠.
감독은 탱고가 남성과 여성의 불균형한 파워에 관한 메타포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려 하지요. 마초적인 가부장과 요조숙녀가 혼연일체를 이루어야하는 탱고의 규칙,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서로의 몸을 맞댄 남성과 여성의 헤게모니 신경전을 그려내면서 감독은 조화로운 탱고 뒤에서 존재 대 존재로서의 남과 여가 어떤 투쟁을 거듭하는지에 대해 가장 투명하게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전반부의 탱고 레슨에서 파블로는 찬사에 아주 익숙한 마초맨으로, 자기보다 나이도 많은 샐리 포터에게 “날 따라하기만 해”하고 소리지르기도 하고 인정 사정 보지 않고 욕을 퍼붓기도 하지요. 훌륭한 탱고 댄서가 되려면 여자는 우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남자가 하는대로 따르는 것을 배우라고 하지요. 영화감독으로서 모든 것을 통제하던 입장의 샐리는 이런 수동성에 익숙해지지 않아 저항을 하게 되고 파블로는 그녀가 자신의 움직임까지 제약하며 자신의 춤을 망친다고 화를 내지요. 하지만 후반부의 영화준비 작업에선 샐리가 “이제부터는 내 지시를 따르라”고 외치고 모든 것을 주도하는 관계로 바뀌지요. 당연하지요. 탱고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 감독이 바로 샐리니까요. 이렇듯 감독은 남녀의 권력관계를 절묘한 타이밍으로 밀고 당기는 탱고에 변주해 자연스럽게 비추어 내고 있습니다.
덧붙여서
1. 샐리가 어느날 파블로에게 묻죠. 왜 탱고를 선택했냐고. 그러자 이 남자 이렇게 대답하죠. “내가 탱고를 선택한 게 아니라 탱고가 날 선택했다”라고. 그 남자, 오만만땅스럽죠? 하지만 그의 춤을 보다보면 그 말이 얼마나 그 남자를 절묘하게 갈파한 절창의 구절인지를 저절로 느끼게되죠.
2. 여기서 보여지는 탱고는 실로 격조 높고 품위 있고 아름답지요. 제가 tango라는 아이디를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이 영화이지요.
3. 인생을 살면서 저를 가장 열등감의 도가니탕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든 여성이 바로 이 샐리 포터 감독이지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심오찬란한 영화를 만들었던 여성이 춤까지 그렇게 환상적으로 잘 추다니요. 알고 보니 그녀는 십대시절부터 영화제작과 춤을 함께 배웠다는군요. 극장의 퍼포먼스 안무가로도 아주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있대요. 게다가 작사도 하고 밴드 활동도 하고.... 이 정도면 감히 질투조차 못 할 경지인 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