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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혜린의 生이여, 다시 한 번

휘수 Hwisu 2005. 12. 20. 12:45

 

                        

  

 

                    내게 전혜린의 첫 이미지는 EBS의 문화사 시리즈

                    '지금도 마로니에는' 드라마의 이재은 이었다.


       

                   거기서 이재은이 전혜린으로 나왔다.


       

                   죽음의 전날, 그녀는 친구, 선배 문인들과

                   술을 마시던 중간중간에 자꾸 누구에겐가 전화를 해서 화를 낸다.

                   또 만나고 싶어한다.


       

                   그 술자리엔 '무진기행'의 김승옥도 있었다.

                   그녀는 계속 그러면서도 2차를 가자고, 3차를 가자고 보챈다.

                   이어지는 시간에 부담을 느낀 다른 이들이

                   다들 집에 가겠다고...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하고

                   정말 어쩔 수 없게 됐을 때...

                   혼자 되는게 두려운 듯 "괜찮아"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서던

                   그 검은색 정장의 뒷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며칠이 지나고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은

                   그녀가 그 다음날 죽었다는 얘길 듣는다.


       

                   나는 고모님에게서 어렴풋이

                   그녀의 얘길 들은 적이 있지만... 궁금해하지는 않았었다.

                   그녀의 일생 보다 4년을 더 살고,

                   가을 휴가의 마지막 날, 그녀를 무심코 다시 만났는데

                   적지않게 놀란다. 그 가슴 떨림이라니...

       

       

                   "우리가 뜨겁게 미칠 듯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순수한 의식의 상태에서 뿐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 - 순수한 사랑이란

                 이 세계에서는 '순간'으로써 밖에는 선사되어 있지 않다.

                 거기에 다른 무엇이 섞인 혼합물, 때로는 대체물만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의 고독은 그러니까 '영혼의 전달'이 불가능한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지속이 불가능한 데 기인하는 불안과 회의에서 싹트는 것이다...


       

                전달 (또는 사랑)이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고

                우리는 '실존'과 마찬가지로 매순간마다 선택되고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이 받아들임, 선택함에 있어서의 결단성이

                우리를 결정하는 전부라는 것을 안다면

                사랑이나 기타의 대인 관계가 얼마나 투명하고 맑은 관계로 될 것인가?


       

                   우정이나 사랑은 그것의 본질에 있어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방향으로 나의 의식을 나날이 선택하는 나의 태도,

                즉 나의 의식의 의도에 의해서만 그러한 것들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전혜린 <순간의 지속> 中에서



       



      녀의 일기는 처음 보면 남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는 흥분이,

        다시 볼때는 거기서 구해주고 싶은 안타까운 충동이 든다.

        나는 고인에게 누가  될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사랑이 그녀를 죽음으로 데려갔다는 직감을 지울 수가 없다.

        

        아마도 그냥 '신비'가 아닌 우리가 말하는 '치정'이라는 개념에 가까울 것이다.

        적어도 그녀에겐 그게 진실로 산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다만 우리가 인정하지 않거나, 더 불행하게는 아예 모르고 있는지도...

       

       

        "그러나 끝났다. 왜 끝났는지는 나도 몰라.

        아무와도 나는 완전히, 절대로, 또 지속적으로 공감을 나눌 수 없는 모양이다.

        결별은 돌연 이유도 없이 우리를 엄습하는 어느 감정인 것 같다.

        나 자신으로 파고 들어가고 나를 이룰 계절이 온 셈인가?"

                                                                                            1964. 1.18

       

       "정말 기적이다. 또 다시 지순한 우리의 상봉은.

        그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나는 축복한다. 나를 위해. 그를 위해.

        릴케의 시집 제목처럼 '나에게 축제, 또 당신에게도 축제'다.

        춤추고 싶다."                                                                   1964. 1.25

                                     

       "남에게 보여서 부끄러운 사랑은 마약 밀매상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대낮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라야 한다."

                                                                                            1964. 4.1

       

       가장 사소한 일에서부터 가장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자기 성실을 지킬 것, 언제나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그녀는 되뇌어 말했다.

       사랑의 순간을 계속 이어가고자 했던 그녀가

       그  대상인 남자에게는 아마도 큰 부담이지 않았을까?

       (덜 깨어있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는 당시 정말 고귀하게 놓여졌고, 행운아였다.

       

       나는 전혜린에 대해서 꼭 잘 쓸 것이다.

       

       "그의 내부에서 끈덕진 열을 뿜으며, 모든 습관의 예복과

        미지근한 생의 소도구들을 불태워 버리는 그 광기로써 그는 당신을,

        아니 자기 자신을 보석과 같은 순간의 빛 속으로 해방한다.

       

        그의 의식이, 그의 언어가

        집요하게 떠밀고 가는 순간의 지속 - 그것이 바로 그녀가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귀한 선물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출처:  SBS 박진호 기자(8시 뉴스 진행)님의 글, 위에 글까지      <펌>


      전혜린과 꿈의 마을 슈바빙.

       

                                                                        덧글. 이문기

       

       

      시인도, 소설가도 평론가도 아닌 헤르만헤세의 '데미안'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를 번역하고 하인리히 뵐 소설 제목을 차용한

      그의 산문집 -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작가로 명명되기 보다는 전혜린. 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여자.

       

      서른 두 해, 길지 않은 생을 살다 요절한 천재로 신화 속 여자.

      인간의 실존을 근본적 조건에 절망하고 평범과 비범을 혐오했던,

      그러함에도 매순간 불꽃처럼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여자.

                                 

      평남 해주 신천에서 태어나 부친 영향으로 서울법대를 나와 어설픈 민족적

      실존주의에서 한국 전쟁을 경험하고 또다른 분단국 서독 북부 뭰헨의

      자유를 호흡하고자 했던 그, 여자의 울타리를 넘어 보편적 성을 지향했던

      전혜린 (1934- 1965) 인간이라는 육체적 현존이 아닌 정신과 관념만이

      그 어떤 추상적 존재를 열망하고 좌초했던 그 여자 전혜린.

                                

      그가 또다른 분단국 서독 남부 도시 뭰헨으로 간 것은 1955년 가을이었다.

      이른바 전혜린의 세계에서 꿈의 마을로 불리우는 슈바빙. 시절의 4년...

      그녀가 조국에서 누릴 수 없는 본질적 삶의 세계를 누린 시기다.

                                

      그녀는 귀국해서 죽기전까지 복음 전파에 주력했으나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쉽게 인간의 의욕을 꺽는가' 로 절망한다.

      그래서그녀는 뭰헨의 슈바빙 시절로 언제까지나 한국에 대한 혐오와

      향한 향수에 향수에 시달려야 했다.그의 짧은 생애를 통해 삶의 일회성인

      치명적 화두는,

       

      " 죽음을 씨로서 속에 지닌 과실의 삶" 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전혀 새로운 발언이나 독창적 수사는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너무

      도 순박하고 치기만만해 그의 발언은 60년대 한국 사회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통영되는 것은 아닐까.

       

      그의 요식된 활자, 죽자, 대자, 불합리, 자살 따위등 실존주의 용어들을 상용

      한 그녀는 늘 검정 스커트와 검정 머풀러를 즐겨 두르고 다녔다던 그녀.

      도저한 페시미스트, 매순간 미칠 듯이 강렬하게  살고자 했던 생의 찬미자.

      평범을 경멸한 귀족주의자인가 하면 무수한 콤플렉스로 시달린 삶의 패배자.

      여자라는 옷을 거추장스러워했으면서도 출산이나 육아의 경계에 행복을 느낀

      모순의 여자, 이 모든 광희의 것들은

      서른둘 젊은 나이인 성급한 죽음이 데려갔다. 아쉬운 것은

      당대의 민주적 현실이라는 그의 개인 차원인 역사가 누락됐다는 사실이다.

      뿐만아니라 전혜린은 그토록 원하던 - 생의 한가운데 - 주인공 니나처럼

      살아갈 직전에 안타깝게도 미완성으로 요절하고 만것이다.

        

       

        -- 아래 글은 전혜린의 이상의 연인처럼 찬미하던 뭰헨의 꿈의 마을 슈바빙으로,

                               어느 기자가 쓴 글을 검색해서 옮긴 글임.

       

        // 뭰헨의 중심가 북족인 레오폴트 거리와 유럽 최대의 도시 공원이라는 엥글리셔

       가르덴(영국공원)을 끼고 있는 동네로. <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책을 통해 80년대 한국 대학생들의 기림을 받은 숄 남매의 이름을 딴 광장이 나오고

       그곳에서 동쪽으로 난 골목을 한동안 들어가다보면 '제에로제'(연꽃)이라는이름의

       카페가 나온다. 제에로제는 뭰헨에 상륙한 전혜린이 처음 음식을 사먹어본뒤 값

       싸면서도 양질의 음식이며 주인의 친절에 반해 단골로 삼았던 집이다. 지금도

       옥호와 외벽만은 전혜린 당시와 다르지 않다. 지난 90년대 이 집을 인수한 스페인

       주인 엘라디오(45세)는 전혜린을 좇는 한국 유학생과 관광객들이 심심이 않게 찾

       는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세계 각국에 작가와 예술가들도 이 집을 추억하는 글을

       많이 남겼기에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제에로제와 영국공원 사이에는 자그마한 냇물이 흐르고 그 연변에 아마도 전혜린이

       세들어 살았을 집들이 서 있다. 전혜린이 '포의 어셔가를 연상 시킨다' 며 끔찍해

       했던 그 집들은 그 사이 새로 단장된 듯 안전된 주택가의 면모를 보인다.

                          

       주말에 영국공원 호수에는 뱃놀이를 즐기는 이들이 백조니 오리니 하는 물짐승들과

       함께 떠 있고, 숲 사이로 난 산책로에는 걷거나 자전거 또는 말을 탄 사람들이 오가며

       모처럼 얼굴을 드러낸 햍볕 아래 젊은이들이 벗은 몸을 태우고 가까운 교회에서는

       정오의 종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온다. 이 평화와 축복의 풍경 속에 녹아들지 못한 채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서 유학생 전혜린은 무엇을 생각 했을까.

       그는 조국에 파란 하늘과 맑은 물을 그리워 했을까. 그 그리움은... //

       

       

                  - 시대의 모럴헤저드에 방황하던 상황이 누구랑 너무 흡사하다 -

       

                                                                       -/-

       


                                              

                                 ♩Mozart 피아노 협주곡20번-2 Romance


       
       
       

출처 : poet ... 휘수(徽隨)의 공간
글쓴이 : rainsp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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