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관련

[스크랩] 이기형 선생님.

휘수 Hwisu 2007. 12. 3. 02:07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이기형 시인과 함께 조우한 어느 날..


아흔의 노작가가 뿜어내는 氣란걸 느껴본다.

난 참 헐겁게 살아간다는 생각이들 정도다.

 

                                                                                                                  <도계고등학교 교정>

 

 

[나의 生, 나의藝 ] 4. 원로시인 이기형



문학사는 계속 다시 씌어야 한다. 구술사 방법론은 공적 기록만큼 사적 기억과 증언도 중요하다는 발상의 전환에서 출발함으로써 한국근현대문학사의 재구성을 위한 새로운 출구가 된다. 이 점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한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에서 문학 부문은 타 예술장르와 방향이 조금 다르다. 음악·무용·연극 등 공연예술, 미술·건축 등 조형예술처럼 예술사의 기초자료 확보를 위한 구술 채록 정도가 아니라 문자기록 중심의 주류사에 맞선 대항이념적 성격까지 지향한다는 말이다. 기존 문학사의 경우 문학전집이나 교과서에서 보듯이 분단 이후의 남한 주류문학이라 할 순수문학·우파문학·민족주의문학 중심의 이념적 성향이 고착화돼 있다. 더욱이 ‘한국문단사’ ‘증언으로서의 문학사’처럼 기존의 문단측면사나 원로 문인들의 인터뷰·대담 기록을 보더라도 이미 문단적 위치가 확고한 분들의 보조자료로서 일종의 영웅미담용 회상기 구실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구술사 이론과 현장론적 증언 채록을 통해 문학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비주류 작가와 주변부 장르를 재조명하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야 할 터이다.

 

 

이런 점에서 원로 시인 이기형(李基炯·87)의 증언은 구술사 방법론이 문학사 재구성에 어떤 보탬이 될지 알려주는 시금석이 된다. 이기형 시인은 다른 원로 예술인처럼 문단의 대표성을 지닌 유명한 분이 아니다. 1980년에 등단한 늦깎이 시인에다 문단에서 소외된 좌파 원로였기 때문에 기존 연구가 거의 없었고 월남한 분이라 학연·지연과도 무관하다. 이 점은 역으로 기존의 문단권력관계나 문헌자료의 제약에 매이지 않는 비주류의 새로운 증언을 통해 구술사의 개가를 올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기형 시인은 1917년 11월11일(음력)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 12세 때 야학을 통해 반일 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함흥고보를 졸업하고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를 다니다 귀국하여 ‘지하 협동단 사건’ ‘학병 거부사건’으로 피검되기도 하였다. 시인의 생애는 이 땅에서 소외된 비주류 좌익의 역사적 운명을 보여준다. 그는 카프 작가 한설야의 소개로 상경하여 몽양 여운형에게 배우고 마르크스주의 사학자인 문석준과 교유하였으며 이기영·임화·박세영 등 카프 출신 문인과 이태준·안회남·지하련 등 훗날의 월북 문인들과 어울렸다. 이기형 시인의 기억은 매우 구체적이다. 여운형의 첫 인상을 말할 때는 “눈은 검은 눈은 아니고 약간 누르스름한데 아주 빛나고 인자했어. 이마는 약간 벗어졌는데 그 전체 인상은 귀족적인 거는 있으면서도 어딘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런 호남자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하는 식으로 실감나게 묘사한다. 특히 시인이 감격해하는 장면은 44년 여름 몽양 여운형의 주선으로 그의 육촌 여동생과 결혼할 때, 몽양이 주례를 서고 카프 비평가 임화와 국문학자 김태준이 축사를 했다는 대목이다. 당대 최고의 좌파 지성들이 서울 가회동 골목에서 젊은 시인을 위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장면의 회상을 거듭하였다.

또한 40년대말 월북 문인의 북한에서의 행적을 소상하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카프 시인 박세영이 북한의 애국가를 작사할 때 김일성의 지도를 직접 받고 긴장했다는 증언을 전하는 대목이나, 안룡민의 압록강변 집에 머물면서 밤새 정담을 나누었다는 회상에서는 당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반면 40년대초 석관동의 임화·지하련 부부 집을 방문했을 때 만난 작가 안회남이 그즈음 막 징용에서 돌아와 초췌해보였으며, 47년 월북 후 평양 민주조선사에서 조우했을 때는 남쪽 출신이라 홀대받아서인지 아니면 두고온 가족 때문인지 쓸쓸해 보였다는 대목에선 시인의 섬세한 상황 파악이 돋보인다.


임화의 소개로 좌익 조선문학가동맹의 맹장 김남천의 가회동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곰팡이 핀 ‘자본론’을 햇볕에 말리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는데, 신인이 이시인에게 그맘때 매일신보에 기고했던 ‘8·15’란 소설의 표제를 한글로 표기할까 한문으로 할까를 의논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해방 직후 서로 견원지간으로 알려졌던 좌우익의 친분을 증언한 것도 특이하다. 김남천은 우익 한민당 간부인 장덕수와 평양 대동면 동향 출신이고 동서지간이라 친했다는 내용은 냉전체제적 선입견에 사로잡혀 그 시절을 모르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시인은 “당시에는 좌·우익 인사들의 관계가 오늘날처럼 극악스럽지 않고 부드러웠다”면서 “김남천과 장덕수는 이념적으로는 상극이었지만 동서지간이 될 만큼 절친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내가 우남 이승만이 귀국할 당시 동신일보 기자였는데 45년 10월18일 하지와 이승만을 인터뷰했거든, 그 이승만하고 내가 모셨던 몽양 여운형 선생도 이념은 달랐어도 인간적으로는 아주 친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분단 이후 너무 경직되고 과장된 교육 탓에 오히려 요즘 이념이 다르면 인격적으로도 능멸해버리는 풍토가 돼버렸다”고 한탄했다.

이시인의 공식 경력에 의하면 47년 몽양 여운형 선생의 암살 후 33년 동안 “일체의 공적 사회활동을 중지하고 서울 뒷골목에서 칩거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여럿 드러났다. 비록 다 공개할 순 없지만 그 시기에 북한에서의 기자 활동과 당에 대한 호감, 6·25전쟁 때의 빨치산 활동, 재야 민주화투사로 활동한 뒷이야기를 녹취할 수 있었다. 그는 47년 여운형이 암살당한 후 월북하여 ‘민주조선’ 사회부 기자를 하다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취재 중 빨치산 활동을 하다 체포, 투옥된다. 이후 엄혹한 분단체제 하에서 구멍가게, 학원 강사, 번역, 사설학원 운영 등의 일을 하였다. 만약 그가 문단 및 학계에 영향력이 지대한 유명한 권력 문인, 대표 인사였다면 세상에 이미 알려진 생애와 증언 이외의 새로운 사실,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을까 싶다.

이기형 시인은 80년대초 시인 김규동, 작가 남정현 등을 통해 창작과비평사의 이시영·신경림·백낙청을 만나고 ‘몽양 여운형 평전’을 쓰면서 진보적 민족문학 진영의 원로로 공적 활동을 재개한다. 89년 7월 시집 ‘지리산’ 필화사건으로 발행인이 구속되고 자신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된 적도 있다.

이후 재야 민주화, 통일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99년 ‘4월 혁명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민예총·범민련 등의 고문으로서 국가보안법 폐지와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등 재야 민주화운동에 여전히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이기형, 늦깎이 등단 ‘통일시인’-

구술사의 이념에 따르면 주류 담론에서 소외된 비주류 문학담론의 담지자가 주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남한 문학사에서 소외되었던 한설야·임화·이기영 등 카프 작가와 이태준·안회남·오장환 등 문학가동맹 출신, 북한문학의 주류가 된 박세영·박웅걸·박산운·황건·안룡만·리동규·천세봉 등에 대한 이시인의 귀중한 증언은 그 자체로 새로운 문학사의 기초자료가 될 터이다.

구술사의 본래 이념대로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대항 담론을 제시함으로써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문학사 내지 구술 문학사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여러번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서 시인은 미수의 나이에도 여전히 빨치산을 기리고 통일운동에 열을 쏟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는 첫 시집 ‘망향’(1982)부터 ‘산하단심(山河丹心)’(2001), ‘봄은 왜 오지 않는가’(2003)에 이르기까지 분단 극복과 통일 지향의 시정신을 열정적이면서도 일관되게 보여준 바 있다. 특히 ‘가시밭 약전(略傳)’ 연작시에서는 직접 만나 취재한 수십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겪었던 고난과 신념의 편린을 장강대하처럼 토해낸다. 이는 단순한 취재의 산물이 아니라 동지애의 발로였다.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북한에선 유명한 시인 이동규와 빨치산 활동 중 체포되어 처형되기 직전 지리산 57사단에서 만났다는 극적 증언이 한 증거라 하겠다.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빨치산’으로 유명한 정순덕 할머니가 시편에서 누락된 이유를 증언한 대목이다. 시인 생각에는 노영호야말로 투쟁을 한 진정한 마지막 빨치산이고 정순덕은 단지 산에서 연명만 하다가 하산했으며 더욱이 나중에 전향했기에 ‘가시밭 약전(略傳)’의 반열에 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가 진행되던 지난 4월 정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조시를 써서 낭독하는 동지애를 보인 것도 인상적이었다. 워낙 연로해서 수전증으로 떨리는 두 손을 한데 그러쥐고 어렵게 원고지에 한자 한자 각인하듯 육필시를 쓰는 모습은 경이롭다 못해 처연할 지경이었다.

〈김성수/ 문학평론가·한신대 연구교수〉

출처 : Jakga
글쓴이 : Jakga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