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에덴에 살던 녹색비단구렁이의 외출/박남희
에덴에 살던 녹색비단구렁이의 외출/박남희
- 강영은 시집 『녹색비단구렁이』 서평
1. 에덴과 세속도시 사이의 집
강영은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녹색비단구렁이』는 에덴과 세속도시 사이에 존재하는 시인 자신의 집에 대한 기록이다. 집은 넓은 의미에서 우주를 포괄하고 좁은 의미에서는 시인의 몸을 상징한다. 그의 시에서 몸으로서의 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그 하나는 어머니의 자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여성으로서의 몸이다. 강영은 시인은 이 시집의 서문에서 “누구는 꽃이라 했고 누구는 집이라 했고/ 누구는 독이라 했다/ 피었다 지고, 세웠다 무너지는 동안/ 시퍼렇게 독 오른 나를/너에게 바친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꽃과 집과 독은 에덴과 세속도시에 동일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코드로서 강영은 시인의 대부분의 시를 관통하는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집이 세워졌다 무너지는 동안의 삶이 보편적인 인간의 삶이다. 우리의 몸이 집이라면 그 몸에서 피어나는 것이 ‘꽃’이고 ‘독’이다. 여기서의 ‘꽃’은 시인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존재성과 더불어 시를 상징하기도 하고 사랑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독’은 에덴 신화의 뱀과 연결된 원죄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자신의 존재성을 ‘녹색비단구렁이’로 형상화하고 있다. ‘녹색비단구렁이’로 상징되는 시인의 자의식의 뿌리가 에덴신화에 닿아있다는 것은 그의 시가 단순히 언어적 상상력에 머물지 않고 보다 근원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어머니. 천둥번개 치고 비 오는 날이면 비 냄새에 칭칭 감겨 있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몸 밖으로 범람하는 강물이 되고 싶어요 모과나무 가지에 매달린 모과열매처럼 시퍼렇게 독 오른 모가지를 공중에 매달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신부가 되어 한 번의 낙뢰, 한 번의 키스로 죽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내 몸의 죽은 강물을 퍼 나르고 싶어요
하지만 어머니, 내가 건너야 할 몸 밖의 세상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뿐이에요 눈부시게 빛나는 햇빛의 징검다리뿐이에요 내 몸에 똬리 튼 슬픔을 불러내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연두에서 암록까지 간극을 알 수 없는 초록에 눈이 부셔 밤이면 독니에 찔려 죽는 꿈들만 벌떡벌떡 일어나요
어머니, 녹색비단구렁이새끼를 부화하는 세상이란 정말이지 음모일 뿐이에요 희망에 희망을 덧칠하는 초록의 음모에서 나를 구해주세요 제발 내 몸의 비단 옷을 벗겨주세요 꼬리에서 머리까지 훌러덩 벗어던지고 도도히 흐르는 검은 강, 깊이 모를 슬픔으로 꿈틀대는 한 줄기 물길이고 싶어요
―「녹색비단구렁이」전문
에덴 신화가 인간이 뱀의 꼬임에 빠져서 타락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면 이 시는 시인 자신이 스스로 뱀이 되어 몸 안에 숨어있던 욕망을 표출하고 싶어한다. 시인이 ‘녹색비단구렁이’를 통해서 아이러니하고 이율배반적인 존재성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은 시인 자신의 무의식이 에덴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비오는 날이면 비 냄새에 칭칭 감겨있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몸 밖으로 범람하는 강물이 되고 싶”다는 진술은 시인의 원초적 욕망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여기서 ‘녹색’은 시인에게 있어서는 허위적 색깔이고 세상이 시인을 향해 던지는 ‘음모’일 뿐이다.
시인이 녹색비단구렁이가 되어 바라보는 세상은 “눈부시게 빛나는 햇빛의 징검다리가 있는” “구름 한 점 없는” 세상이지만, 그러한 세상은 시인의 “몸에 똬리 튼 슬픔을 불러내지”는 못하기 때문에 시인은 “밤이면 독니에 찔려죽는” 악몽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희망에서 희망을 덧칠하는 초록의 음모”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찬란한 햇살이 빛나는 초록의 세상이 ‘몸 밖의 세상’이라면, 시인이 욕망하는 세상은 “도도히 흐르는 검은 강, 깊이 모를 슬픔으로 꿈틀대는” ‘몸 안의 세상’이다. 이처럼 시인의 관심은 자신의 몸을 중심으로 구별된다.
엄마가 내 푸른 담요를 걷었을 때
나는 꽃이 될 거라는 예감을 가졌어요.
꽃이 나에게 노크를 했거든요.
엄마가 내 몸 속에 얼마나 많은 꽃씨를 숨겨 놓으셨는지
보세요, 저리도 많은 발가락과 손가락들을
마구 뻗어난 길들을
늙은 소나무의 축 늘어진 그것이든
버드나무 휘어진 허리춤이든 낭창낭창 휘감는
붉은 뱀들이 절정으로, 꼭대기로 치닫고 있잖아요?
폭염에 술 취한 딸처럼
주홍빛 얼굴을 울컥울컥 게우고 있잖아요?
그게 나라구요, 나였다구요
그러니 엄마, 습한 문 열고 나 장마 지게
꽃다운 나답게 꽃답게 툭, 툭, 모가지를 떨굴 때까지
그냥 피어나게 내버려 두세요
―「능소화」전문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묘하게도 이 시는 「녹색비단구렁이」의 후속편처럼 읽혀진다. 「녹색비단구렁이」에서 시인이 어머니에게 제발 자신의 몸의 녹색비단옷을 벗겨달라고 호소하는 말과, 이 시의 첫 행 “엄마가 내 푸른 담요를 걷었을 때”라는 진술은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연관성을 가지고 이 시를 읽다보면 「녹색비단구렁이」에서 시인이 허위의 초록 옷을 벗고 맨 몸으로 새롭게 만나고 싶은 것이 ‘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인은 본능적으로 엄마가 제 몸 속에 수많은 ‘꽃씨’를 숨겨놓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이 욕망하는 ‘능소화’는 “늙은 소나무의 축 늘어진 그것이든/버드나무 휘어진 허리춤이든/낭창낭창 휘감는 붉은 뱀”이라는 점에서 그의 욕망이 에덴신화의 뱀에 닿아있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시인은 “폭염에 술 취한 딸처럼/주홍빛 얼굴을/울컥울컥 게우고” 있는 능소화야말로 자신의 본래적 모습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인의 이러한 진술을 통해서 신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선악과를 따먹었던 이브의 초상을 발견하게 된다. 즉 그의 몸에 흐르는 피는 생래적이고 본원적인 것이고, 시인은 이러한 자신의 욕망에 정직해지고 싶은 것이다. 시인이 시집의 서문에서 ‘꽃’이나 ‘집’과 더불어 ‘독’을 언급했던 것도 뱀에 닿아있는 시인의 존재성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2.지상의 집과 하늘의 집
이 세상에는 집들이 많이 있다. 인간이 이 땅에 지어놓은 인공구조물을 제외하더라도 온갖 짐승들의 집들로부터 미미한 동물들의 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집들이 존재한다. 좀 더 넓은 의미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집이다. 바다나 강 같은 물속은 물고기들의 집이고, 땅속은 두더지와 같은 지하생물들의 집이고, 하늘은 구름이나 별들의 집이다. 이렇듯 우리는 집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그런데 시인에게 있어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집이다. 그에게 있어 어머니는 땅과 같이 본능적이고 생산적인 집이라면 아버지는 하늘과 같이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집이다.
내 핏줄에 핏 톨 하나씩은 남겨주셨을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달려와 나를 일으킨다
중얼거리는 주기도문 속의 아버지,
창세기의 어둠을 걷으셨던
모든 아버지의 아버지인 그 아버지도 내게 계시다
길을 가다가 만나는 중절모의 노인들은 다,
내 아버지로 보인다 아니 내 아버지시다
이렇게 많은 아버지를 가졌지만 내 몸의 핏줄들은
아버지께로 닿지 못한다
한 남자의 몸속에 집 한 채 들여놓던 오래전 그 때,
낡아서 덜컹거리는 아버지를 떠나왔기 때문이다
수로가 막힌 은하수처럼 눈과 귀와 입을 다물고
집짓기에 골몰해 있는 동안
낡고 쓸쓸한 집이었던 아버지는
지상에서 하늘로 이주하셨다
내 눈 속으로 물꼬가 트이는 밤, 하늘을 본다
나를 쳐다보는 저 별은 어느 아버지일까?
대답이나 하듯 더욱 눈을 크게 뜨는 별빛을 보면
모두가 그렁그렁한 아버지의 눈빛이다
지상에 집 한 채 남기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내게 하늘을 남겨 주셨다
―「아버지 별」전문
9월의 숲 속 길을 간다
쓰러진 나무둥치 위로 싱싱하게 뻗는 넝쿨들
발목에 감기어드는 그것들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몸의 탯줄이라 말하고 싶다
내 눈을 뚫고 들어오는 푸름이 하도 깊어
까마득히 잊었던 胎의 길로
직행하는 기억들
어머니의 밑동을 찢고 나오던 그날의 울음도
저렇듯 시퍼랬으니 그 울음의 뿌리가
미지를 향한 두려움 탓만은 아닌
태어나지 않은 나와 태어난 나의 간극에서 자란
둥근 열매의 전언이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제 이름을 잊은 채 산정에 묵고 있는
저 오래된 몸들도
제 몸의 바깥을 향해 그림자를 내비친 적이 있었다
지상의 모든 길을 끌어안고 둥근 길을 가고 있는
그 빈집은
밤마다 무량한 별빛에 닿고 있을까
9월의 하루를 몸에 지닌 채 이생의
문지방을 넘어가는 바람들,
소멸과 만나는 일이 두렵지 않은 길고 긴 날의
저녁이 진통을 끝내면
언덕 넘어 사라진 새들처럼
나는, 한 덩이
붉은 노을을 순산할지 모른다
―「호박」전문
시인은 9월의 숲속 길을 가다가 쓰러진 나무 둥치 위로 싱싱하게 뻗어가는 호박넝쿨을 본다. 시인은 그것을 보면서 돌연 “아직 태어나자 않은 몸의 탯줄”을 연상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세상으로 나오던 때의 기억을 더듬어 그 때의 ‘울음’의 뿌리가 “태어나지 않은 나와 태어난 나의 간극에서 자란/ 둥근 열매의 전언”에 닿아있음을 감지한다. 즉 시인은 호박을 보면서 자신의 전생과 현생을 동시에 읽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호박이 “제 몸의 바깥을 향해 그림자를 내비친 적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지상의 모든 길 끌어안고 둥근 길을 가고 있는 빈집”(호박)이 밤마다 무량한 별빛에 닿는 상상을 하게 된다. 시인이 자신의 분신처럼 보이는 호박을 ‘빈집’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은 그의 삶에서 느끼는 아버지에 대한 결핍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이 꿈꾸는 삶의 황혼에서 붉은 노을을 순산하기 위해서도 “무량한 별빛”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붉은 노을’은 아마도 시가 아닐까?
이상의 시들을 통해서만 보더라도 그의 삶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그것은 그에게 가장 귀중한 몸의 출발이 이들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시인에게 있어서 부모는 육신의 에덴동산과도 같은 본원적인 집인 것이다.
3.언어와 이미지가 범람하는 상상력의 집
에덴에서 살던 ‘녹색비단구렁이’는 현재 세상의 눈부신 욕망의 불빛을 따라 세속도시에서 살고 있다. 그가 무시간의 공간인 에덴을 떠나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에 내려온 것은 이 지상에서 그가 찾아내야 할 집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본원적인 집은 몸이지만, 몸이라는 집은 그 자체로는 ‘빈집’이기 때문에 그것의 허전함을 채울 또 다른 집이 필요하게 된다. 인간은 이 지상에서의 결핍을 견디기 위해서 각기 다양한 집을 찾아 나선다. 그러다 만나게 되는 것이 언어와 이미지로 이루어진 집들이다. 언어와 이미지로 이루어진 집들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언어와 이미지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언어를 소비하고 이미지를 소비하는 동물이다. 인간이 책을 읽고TV를 보고 컴퓨터를 하는 것도 인간의 이러한 본성과 무관하지 않다.
오른쪽 왼쪽 귓바퀴에
벌레 먹는 소리
사방에서 몰려 온 벌레들이
구멍 뚫는 소리
먼 별의 입구에서 떠나온 그 소리들로
나는 그만,
소리의 무덤을 가진 셈인데
우글거리는 말의 행방을 찾아
불과 물과 바람의 길을 지나 온 귀가
제 몸 속에 관 하나 남긴 것일까
시공의 벌레구멍에서 입 없는 벌레들이
지구의 중심축을 갉아먹는 그 때
하루 한차례 내가 자전하는 그 때
귓속 길을 지나 온 귀의 평생이
소리의 귀퉁이를 다져넣어 제 일생을
떠메고 가는 그 때
死角死角, 집 한 채 세우는 그 때
―「벌레들의 지구」전문
생각해보면 지구는 온통 벌레들의 세상이다. 카프카의 상상력을 빌리지 않더라도 신의 눈으로 보면 인간은 벌레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존재 역시 벌레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이 세상은 벌레들로 우글거리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땅에 존재하는 생물들뿐만 아니라 ‘소리’와 같은 것도 벌레로 보고 있다. 인용 시에서 시인이 감지하는 소리는 “시공의 벌레구멍(Worm hole)에서 입 없는 벌레들이/ 지구의 중심축을 갉아먹는” 소리라는 점에서 범우주적이다. “시공의 벌레구멍”은 시인이 웜홀(Worm hole)의 개념에서 따온 것으로, 블랙홀과 화이트홀 사이를 이어주어 짧은 시간에 우주여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초시간적 구멍을 말한다. 이렇게 먼 별에서 떠나온 소리들은 시인의 몸에 이르러 소리의 무덤이 된다. 시인은 소리의 무덤에 쌓여있는 소리들의 정체, 즉 ‘말의 행방’을 찾아나서게 된다. 시인의 시 쓰기는 여기서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에게 있어서 시 쓰기는 “말의 행방을 찾아/불과 물과 바람의 길을 지나온 귀가/제 몸 속에 관 하나” 남기는 일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시 쓰기는 “귓속 길을 지나온 귀의 평생이/ 소리의 귀퉁이를 다져넣어 제 일생을/떠메고 가는”일이다. 하지만 시인은 시 쓰는 일을 “死角死角, 집 한 채 세우는”일이라고 하여, 죽음의 집을 세우는 일과 동일시하고 있다. 초월적 시간이 지배하는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인간의 모든 삶은 죽음을 포함하여 동일한 것이다.
1.
스팸제로가 분석한 아래 유형의 그녀들을 앞으로 스팸편지함으로 걸러내시겠습니까?(체크 후, 설정하기를 누르시면 됩니다)
당신의변태적상상력을감히뛰어넘겠습니다아파트계단에서옆집아저씨랑하다들킨황당한밤의황녀되는법바람난내아내를공개합니다하루두알로가슴미인피부미인이된다외로운유부녀를위로해주실분언니잊지않았죠보고즐기며X확대까지실제삽입장면보실분들만입장하세요
천공에서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커서,
밤의황녀검은머리채를날려버린다가슴미인의손을놓아버린다외로운유부녀의입을막아버린다바람난아내의눈을덮어버린다즐기는언니긴다리를부러뜨린다확대한X를축소시킨다
그녀들이 봉쇄당한다
2
전원을 다시 켠다 죽은 그녀들이 되살아난다 죽은 그녀들이 뛰어내린다
그녀들을 향해 돌진하는 이 시대의 속도는 무효다
―「발칙한 속도」전문
별들이 떠다니는 우주는 종종 초시간성이 지배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사는 지구는 여전히 속도가 지배하는 곳이다. 인간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동안, 속도를 지배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중의 하나로 여겨왔다. 현재와 같이 과학이 발달하게 된 것도 속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대과학의 첨단을 달리는 ‘컴퓨터’는 인간의 물리적인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가장 대표적인 발명품이다. 인용 시에서 시인은 소리와 이미지가 지배하고 있는 ‘컴퓨터’라는 사물을 통해서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의 본질을 탐색한다. 컴퓨터는 온갖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인간에게 편리함을 주는 도구이지만, 때로는 온갖 쓰레기 정보들을 통해서 인간에게 해를 입히거나 불필요한 욕망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러한 쓰레기 정보들은 삭제하고 또 삭제해도 끝없이 되살아난다. 전원을 새로 켜고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순간 “죽었던 그녀”들은 불사조처럼 되살아나는 것이다.
시인이 이 시에서 등장시키고 있는 스팸의 내용물들을 ‘그녀’라고 의인화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단순한 스팸의 일부가 아닌,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상징하는 시대적 코드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성을 상품화하고 소비하는 시대에 “그녀들을 향해 돌진하는 이 시대의 속도는 무효다”는 시인의 선언은, 욕망의 초시간성과 영속성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즉 에덴이라는 초시간적 집으로부터 속세의 집에 이르는 인간의 긴 여행은, 그동안 욕망의 속도가 시대의 속도를 끊임없이 앞질러왔음을 역사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에덴에서 외출한 녹색비단구렁이는 지금도 이 세상에서 집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 집은 그가 이 땅에서 영원히 채울 수 없는 욕망이라는 집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긍정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의 집을 헐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신비로운 언어의 집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박남희: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1996)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1997) 고려대. 숭실대 강사 일산문학학교 시창작반 강사 시집 <폐차장 근처> <이불 속의 쥐> 2005년 문학과경계
다층, 2008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