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요것조것수납장

[스크랩] 샘머리공원에서 꽃몸살을 앓다

휘수 Hwisu 2006. 4. 14. 00:02

4월로 접어들 무렵, 또 한 바탕 꽃샘추위가 몰아쳤습니다. 그동안 꽃샘추위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정곡을 찌르는 걸 보면 역시 꽃샘추위의 공격성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이제 마지막이라 그런지 추위는 말할 수 없이 모집니다. 살이 쩍쩍 갈라질 만큼 무섭게 냉기를 몰고 왔습니다. 아마 이 추위 한방으로 가지째 흐트러진 꽃들을 전부 날려버릴 심산인가 봅니다. 어저께의 꽃샘추위가 걱정되어 점심을 후딱 해치우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습니다. 꽃들은 더 화사하게 가지를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꽃샘추위에 얼어 죽기는 커녕 더욱더 생기를 얻어 주변을 온통 꽃물결로 몸살나게 했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갑던 꽃샘추위도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꽃의 열기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거의 매일 주변을 돌아보지만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마저 남은 꽃망울들이 다 터지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입니다.

남아있는 꽃망울 뿐 아니라 새로 망울지는 꽃망울까지 다 사라지려면 아마 몇 달은 꽃 멀미에 시달릴 것만 같습니다. 쓰나미처럼 밀어닥치는 꽃물결을 보며 꽃에 관한 이야기들을 글로 옮겨 놓기엔 내 필력이 너무나 보잘 것  없음을 느낍니다. 꽃 하나를 가지고 이야기를 다 만들고 나면 사방팔방에서 터지는 꽃망울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주변에 널려있는 오만가지 꽃들을 전부 이야기로 풀어내려면 꽃들이 다 지고 눈보라치는 겨울이 와도 다 못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출몰한 나비가 이리비척 저리비척 날개 짓을 하는 바람에 꽃향기에 취한 내 마음도 비척거렸습니다.

 

점심을 해치우면 습관적으로 도로변 꽃길을 순례하던 발걸음을 오늘은 샘머리 공원으로 틀었습니다. 샘머리 공원도 이미 아늑한 봄기운에 젖어 있습니다. 둔산의 중심에 위치한 샘머리공원은 사방팔방으로 굵직굵직한 빌딩들이 바라다 보이는 시내 한 중간에 놓여 있습니다. 공원 입구로 들어서니 맨 먼저 우람한 느티나무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울퉁불퉁한 근육질도 모자라 장독만큼 굵은 밑동에서 새끼를 친 가지들이 이리저리 손을 뻗어 하늘을 옭아맸습니다.  맨 꼭대기에 놓여있는 까치집 한 채도 외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맨 먼저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아 생기어린 목청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까치들, 그 까치들은 아마도 이 느티나무가 살아온 날들을 속속들이 알 것만 같습니다.

 

 

밤새도록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배기가스 냄새와 삶의 허기로 쓰러지는 수많은 서민들의 애환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 삶의 냄새와 허기 때문인지 대신 영양제 주사를 맞고 있는 육중한 느티나무 밑동엔 군데군데 하얀 팩이 연결돼 잇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사람이나 나무나 늙고 병들면 애처롭긴 마찬가지입니다. “고목도 늙고 병이 드니 오던 새도 날아오지 않는구나”  라며 툭하면 한숨을 섞어 흥얼흥얼 하시던 생전의 어머니의 노래 소리가 아련히 들려옵니다. 그 고목의 느티나무만 턱 버티고 있으면 샘머리 공원이 칙칙하게 변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주변에 만화방창 늘어져있는 꽃들을 보니 활기가 되살아납니다. 

상큼한 꽃향기가 붙잡아 고개를 돌렸더니 바로 매화가 손짓을 합니다. 그 향기가 폭발을 합니다. 어질어질 쓰러질 것만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꽃향기가 세찬 물결이 되어 내 몸을 마구 밀어 붙이고 있습니다. 높은 꽃물결로 변해 공원 구석구석 꽃향기를 한 아름 선물로 덥썩 안기는 매화들, 군자의 기품이 따로 없습니다.   

 

탐스러운 목련은 벌써 꽃잎을 떨어내고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꽃잎들에 구구절절 슬픈 사연이 묻어있는 것 같습니다. 만개한지 얼마 됐다고 벌써 꽃잎을 지우다니, 화무십일홍,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은 꼭 목련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것도 붉은 빛깔의 적목련이 아닐까 싶습니다. 눈 깜짝할 새 꽃을 지우는 목련을 보면 불현듯 삶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 뒤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저리 매정하게 제 몸을 갈갈이 찢어 흩뿌려버릴까요. 꽃받침에서 몽우리가 빠져 나와 꽃몽오리를 밀어 올릴 땐 연꽃처럼 거룩하더니만 질 때는 태풍전야처럼 적막합니다.

지독히 인내를 해서 피운 꽃들인데 이왕이면 오랫동안 있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뼈를 깎는 삼동의 추위도 견디고 꽃샘추위도 몰아내고 어두운 세상에 환하게 불을 밝혀준 꽃들이 속절없이 진다면 아마 희망이란 단어는 쉽사리 찾을 수도  없을지 모릅니다.


망울망울 터진 산수유의 노란 꽃물도 여기서는 지천입니다. 하늘 한 켠이 그림을 그린 듯 노랗게 타오릅니다. 그러나 산수유도 꿈이 있긴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위해 저리 노란 꽃들을 밤낮으로 피워 올릴까요. 산수유는 아마 노란꽃들이 빨리 떨어지길 비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꽃망울이 처음 터졌을 땐 눈이 부실 듯 노랗더니 지금은 약간 누런빛을 띠고 있습니다. 노란빛에서 누런빛으로 변하고 점차 빨간빛으로 물들어 갈 때 산수유는 비로소 제 존재를 깨닫게 될 것 같습니다. 단순히 꽃을 보여주기 위해 땅위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염주 같은 빨간 열매가 되어 세상을 환히 불 밝히는 것이 제가 존재하는 이유라는 것을 말이지요.  크고 탐스러운 꽃만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눈을 닦고 납싹 엎드리고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꽃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미쳐 그 꽃을 보지 못해 그렇지 그 꽃들도 나름대로 꿈을 꾸며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모진 시련이 닥치는 것은 힘없는 서민 뿐 아니라 이름 없는 풀꽃들도 똑 같습니다.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납작 엎드린 것이 눈치나 슬금슬금 보는 힘없는 백성을 빼 닮았습니다. 지금 또  대로변은 마이크를 왕왕 틀며 시위를 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로 가득 합니다. 괭과리나 북치는 소리도 높게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흐드러지게 핀 꽃을 마중하러 나온 농악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한 끼 밥을 더 얻어 가족들과 안락한 둥지를 꾸밀까 고민하는 이 땅의 여리디 여린 백성들입니다. 그래도 꽃은 흐드러지게 피어납니다. 살얼음 같은 세상에 제 목숨하나 던지며 소신공양하는 사람들이 많아져도 꽃은 후줄근히 피어납니다. 귀청이 터지도록 시끄러운 시위대의 목소리가 만발한 꽃에 척척 들어붙는 한낮, 따끈한 햇살을 받아 화들짝 꽃망울을 와르르 터뜨리는 광경이 사방팔방에서 총을 쏘아내는 전쟁터 같습니다.

 

 


 소총, 기관총, 곡사포 각종 총신과 포신에

붙는 불

지상의 나무들은 다투어 꽃들을 쏘아올린다

개나리, 매화ㅣ, 진달래, 동백---

그 현란한 꽃들의 전쟁

적기다!

서울의 영공에 돌연 내습하는 한 무리의 벌떼!

요격하는 미사일‘


                서울은 불바다 1/오세영


출처 : 겟세마네
글쓴이 : 유진택 스테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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