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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비의 암각화 외 4편

휘수 Hwisu 2008. 3. 28. 11:17

 

비의 암각화

 

 

 

                                    최 정 진

 

 

 

 마당에 고인 웅덩이를 어머니가 빗자루로 쓸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사냥한 짐승의 울음이 메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흙은 비에 젖고 동굴의 벽은 빗소리에 젖던 날이 있었습니다 짐승

의 비명을 사랑한 물이 하늘까지 달아나 구름이 되었고, 인간에게

연민을 품은 물이 지상에 돌로 남은 날이 있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빗소리를 주워 남들 몰래 동굴의 벽에 숨기고

있었습니다 비가 그친 줄도 모르고 빗소리를 숨기다 그만 사냥을 나

서려면 아버지들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내 모습을 기이하다 여긴

아버지들이 돌칼로 겨누고 달려든 순간, 내 몸에 뚫린 굴에도 어떤

형상들이 그려졌을까요 돌칼의 하염없이 날카로운 딱딱함에 내 몸

에서도 자꾸만 빗소리가 새나왔습니다  

 

 비가 오면 아버지들은 동굴 밖의 빗줄기를 보며 돌칼의 날이 아직

무디다하고, 어머니들은 그런 아버지들의 어깨에 기대어 빗소리를

듣던 날이 있었습니다

 

 쓸어내도 마당의 웅덩이는 내가 쓰러졌던 자세로 고입니다 저 웅덩

이들의 나열이 비 오는 날에서 비 오는 날로만 이어지는, 비의 연표

임을 알겠습니다 지상에 웅크리고 울음마저 썩어가는 내 육신 앞에

앉은 어머니 하나 멍한 눈빛을 하늘에다 쏟아 붓고 있었나요 피부에

갇힌 구름이 되어 자신의 몸에 빗살무늬를 새기고 있었나요

 

 나는 한 없이 깊은 동굴입니다 인간들이 옷으로 꿰어 입기도 하고

말려뒀다 먹기도 하는, 사냥 당한 시간입니다

 

 

기울어진 아이*

 

 

                                       최 정 진

 

 

 세탁소가 딸린 방에 살았다 방에 들여 놓은 다리미 틀에서 엄마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내 몸의 주름은 구김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다림질

밖에 몰랐다 엄마의 품에 안겨 다려지다 어느 날 삐끗 뒤틀렸는데 세탁소

안에서 나는 구부정하게 다니는 아이라고 불렸다 

 

 다린 다는 말은 주름을 지우는 게 아니라 더 굵은 주름을 새로 긋는 문제였

다 수선된 옷들이 마지막 누운 곳은 다리미틀 위였다 뜨거운 것과 닿으면

닳은 곳부터 반짝거렸다 오래입은 옷일수록 심했다 엄마는 밤마다 어딜 가

는지 브라더 미싱 앞에서 드르륵 어깨를 떨었지만 우는 게 아니었다 꿰맨다

는 말은 상처를 없애는 게 아니라 얼마나 잘 가리냐의 문제였다 엄마, 엄마

가슴에 난 구멍은 얼마나 크길래 날 실통에 걸어야 했나요 나를 돌돌 풀어

슴에 안아야 했나요

 

 천장엔 옷가지가 우겨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바닥에 흘려두면 주머니

의 새들이 쪼아 먹었다 엄마, 주는 대로 먹지 않는 헨젤에 관한 동화를 읽

어요 뼈다귀를 내밀기 전에 끝나는 동화 말이에요 밤의 세탁소 깜깜한

비닐숲을 헤치고 다가가면, 엄마는내 바지의 밑단을 늘려내밀었다 짧아지

지 않는 바지 안에 갇혀 내 몸은 부풀고 부풀기만, 그러다 세탁소 밖으로 뻥

터져버렸는데, 그 후로는 얇은 바람에도 어깨를 떨어서 지금껏 너덜너덜한

등을 가진 아이라고 불린다

 

 세탁소가 딸린 방에서 나는 밤마다 기울어졌다 엄마, 내 몸의 기울에 맞춰

숙이지 마라 방에도 걸음걸이가 있는지 바지단에 남은 얼굴처럼 곰팡

이도 한쪽 벽에만 핀다 세제의 기울기가 달라서, 얼룩도 때로 빠지는 정도가

다르다 지구서 잠드는 우리는 제 각기 다른 별의 중력을 한 자루 가득 꿈 속

아온다.

 

 

*베누아 페터즈

 

 

 

 

유성우流星雨에 젖은 날


 

                                     최 정 진


 

유성우가 내린다하여 강변에 간다

아직은 저녁이어서

수면을 따라 걸으며 기다리는 밤

석양 앞세워 밀물 차 오르는 바다처럼

강도 만조를 꿈꾸는 걸까

수면이 상류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뜨거운 숨 뿜으며 거꾸로 걷는 아줌마들

등이 아니라, 밤으로 가는 저녁 하늘처럼

짙어가는 표정 마주 보고 걷는다

맞닥뜨린다는 것은 본래

더 가까워질 거리가 남아있지 않을 때

터벅터벅 멀어질 일만 남을 때 아니었나

눈 마주치며 같은 방향을 향해 걸을 수 있다니

앞서 가는 아줌마 눈이 밤처럼 깊어지고

거꾸로 보면 느낌표 같은 그림자가

찰박찰박 흔들리다 내 발을 향해 차 오른다

 

한참을 걷다 거꾸로 흐르던 하류가

상류와 만나는 곳에서 멈춘다

차 오르던 밀물도 어디쯤에서 썰물과 만나

흰 물거품 일으키며

서로의 안부, 파도소리로 토닥였으리라

강변에 무리 이룬 억새

유성우를 기다리는 사람들 표정 잔잔하다

 

어느 쪽으로도 흐르지 않는 수면에서

송사리들이 물 밖으로 몸을 활시위처럼 당긴다

그녀가 내 밖으로 튀었을 때도

저렇게 반짝이는 것이 흘렀었나

오늘은 페르세우스자리에서 별들이

지상으로 튀는 날

만조의 별자리가 쏟은 눈물

우린 그것을 유성우라 부른다

 

                      

         

드라이클리닝

 

 

 

                                          최 정 진

 

 

1

 

 옷들이 한 통 가득 쌓이던 장날이면 세탁소에서는 '드라이'를 돌렸

다 드라이 기계의 둥근 유리뚜껑이 아버지, 눈망울 같아요. 비누거

품이 일며 통이 돌아가요. 밖이 시끄러워서 내 몸이 마르는 것 같아

요. 조용해라, 얘야, 방 안에서는 네가 더 시끄럽구나, 나는 장이

하기 전에 방에 펼쳐둔 갱지 위에 손님이 주문한 바지의 재단을

쳐야 한단다. 네 몸이 마르는 건 네가 울기 때문이란다. 아니에요,

아버지, 내 눈에서 흐르는 건 눈물이 아니라 아버지가 연필로 잘못

긋고는 지워버린 바지의 밑단인 걸요. 갱지에서 닦아내는 까맣게

지우개 똥인걸요.

 

2

 

 비가 그치고 장이 파하면 텅 빈 장터 움푹 꺼진 곳마다 물웅덩이들

만 남겨지곤 했다. 구름을 따라 이동하는 행상에서 뒤쳐진 자들. 파

문이 기와지붕의 무늬처럼 제자리에서 일렁이면 나는 일기장을 한

장씩 찢어 접은 종이배를 수면에 띄우며 놀곤 했다. 찢어낼수록 일

기장이 얇아져서 나는 쉽게 잠이 들어버리곤 했는데, 마른 웅덩이

바닥이 사나운 꿈자리처럼 쩍쩍 갈라지는 밤마다 아버지는 가라앉

은 종이배를 인양해 와서는, 퉁퉁 불은 글자들을 내 잠에다 파도소

리로 속삭여주곤 했다. 그때마다 두터워지는 기억을 말랐었다가 젖

는다고 불렀던 것은, 서랍이 뒤척여서가 아니라 서랍 속의 일기장이

습기를 꼴딱 삼키는 소리 때문이었다.

 

3

 

 방 안에는 해 대신 TV가 떴다. 방을 밝히는 것은 창문 밖의 햇살이

었지만 방 안에서는 브라운관이 눈부셨다. 아버지가 손님이 주문한

바지를 재단하고 있을 때 TV속 88서울올림픽 경기장에서 벤 존슨은

100미터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그 순간 아버지가 TV를 냅다던져버

린 이유는 모르지만,

 햇살이 들지 않는 방구석에서 나뒹구는

 일그러진 브라운관 안에서 옆 마을 새댁은 나를 훔쳐갔다가 꼬박

하루 만에 돌려주고 있었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강보에 번져있

던 축축함은 요즘도 내 눈밖으로 눈물이 되어 나오는데,

 테이프를 끊은 벤 존슨의 몸을 트랙 밖으로 꺼내 젖은 빨래처럼 바

닥에 내던져버린 손은, 고통에 찬 비명과 닮은 함성으로 경기장을 

채우던 그 많은 손짓들은 새하얀 비누거품이었을까 젖었다 마르는

동안 상처는 가벼워지는지 무거워지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재단

하던 손님들의 바지통은 올림픽이 돌아올 때마다 가늘어졌다.

 

4

 

 장날이면 세탁소의 드라이 기계 속에서는 통이 돌았다. 아버지는

드라이 기계를 옮기던 어느 날 통에 깔려 허리가 접혀버렸는데, 척

추가 삐뚤어져 버려서 그만 갱지 같은 방에 누워 디스크를 앓아야

했다 밤마다 방에서 들려오던 신음소리가 척추를 조금씩 교정해주

었지만, 자꾸만 가늘어져 가는 아버지의 몸과 드라이 기계를 번갈아

볼때마다 나는 저 둥근 유리 뚜껑이 심해로 가라앉고 있는 잠수정의

창문인지, 하늘로 날아오른 비행기의 창문인지, 유리뚜껑의 통 안

서 비누거품과 섞여 맴돌고 있는 저 옷자락들이 비늘 몇 개를 보

로 떨구는 물고기인지, 방금 막 구름 밖으로 부리를 내민 새인지,

압 속에서 옅어지는 게 나인지, 희박한 공기 중에서 부푸는 게 나

지, 구분되지 않았다.

 

 

 

                                       

몽야간夢野間

 

 

                                           최 정 진

 

 

 네가 꾸는 꿈 속으로 들어가려고 네 잠꼬대에게 길을 물은 적이 있

 

 시린 몸을 뒤척여서 네가 덮은 것이 이불이 아니라 강줄기임을 알

았다 감은 네 눈꺼풀 아래로 꽃잎도 아니고 금붕어도 아니고 새

의 깃털로 채워진 강줄기가 흘러들고 있었다  

 

 혹여라도 너와 닮은 여자를 볼 때면 그 여자가 안보일 때까지 나는

몸이 얼어붙는 기후에 속해있어야만 했다

 

 불어간 바람을 따라 허공이 한 줄기 파였고 바람소리가 석순으로

자라났다 환한 빛에 이끌려 동굴의 입구로 나오면 추위 속에서 떨어

온 나무의 시간만큼 나뭇가지마다 꽃송이가 발자국으로 피어나 있

었다

 

 내가 뒤쫓던 네 흔적은 떠나온 지 오래 될수록 가까이서 빛나는 향

기였을까

 

 헤어진 날 밤에 너는 함께 베던 네 방의 베개를 만리향 밑에 묻었다

고 했다 덕분에 일만 시간이 지난 오늘에까지 내 잠을 통로로 풍겨

오는 네 머리칼 냄새를 잊을 수 없다

 

 바람을 따라가다 길가에서 쉬는 모자를 주워 머리에 썼다 그날부터

나는 모자 속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꿈만 꾸게 되었다 내가 지
르는 짐승의 비명소릴 따라 깨어나는 날이 늘어갔다

 

 내 방의 베개를 마당에 내놓고 태우던 날 멀리 보이는 산의 골짜

기 속에서 캄캄하게 타고 있을 동굴들을 떠올렸다 꽃잎이었다가 금

붕어의 지느러미로 나부꼈다가, 한 토막 숯에 벽화를 무늬로 남겨

놓고 날갯짓으로 솟구친 새 떼를 떠올렸다

 

 죽어서 땅에 묻히면 동굴이 된다는 불길에게 제를 올려주고 싶은밤

이었다

 

 잠이 들면 나는 새로 산 베개에 조금씩 꿈을 흘려둔다 잠에서 되돌

아오는 길을 잊고 싶지 않아서다 네 입속으로 날아간 내 목소리는

어느 하늘 동굴 앞에서 떨고 있을까

 

 꽃은 나뭇가지가 베고 자는 베개이다

 

 

                                       * 몽야간- 우루시바라 유키, '충사'인용

 

 

 

출처 : e 시인회의
글쓴이 : 최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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