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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무산 시모음

휘수 Hwisu 2006. 3. 27. 12:13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등이 있으며,
1989년 제1회 이산문학상, 1997년 제12 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부리가 붉은 새

 

부리가 붉은 새여,
하늘을 날 때와 둥지에 앉을 때
어느 때를 위하여 사는가

 

꿈을 좇을 때와 생활에 충실할 때
어느 때를 위하여 사는가
어느 때가 일상이며 어느때가 꿈이냐

 

너도 수없이 부수고 꺾이었느냐
날개가 둥지를 부수고
둥지가 날개를 꺾어버리는 일을
너도 수없이 많이 당했느냐

 

부리가 붉은 새여,
다리가 잘리고 날개만 있다면
날개 꺽이고 다리만 남는다면
하늘에도 무서운 적이 있고 땅에도 덫이 있는데

 

마음에 숨겨진 비겁함이 도사리고 있는데
언제나 날고 언제나 둥지를 틀수 있는
네 자유는 어떻게 얻은 것이냐
어디서 그런 자유를 물고 온 것이냐

 

내 하루의 하늘이 손바닥만한 창살인데
쇠창살에 앉아 날개 쉬는 부리가 붉은 새여 새여
역광을 받은 네 날갯짓이 눈부시구나
얼마를 싸워서 이긴 자유이기에
부리가 그토록 붉고 붉은가

 

 

내 손길이 닿기 전에 꽃대가 흔들리고 잎을 피운다

그것이 원통하다


내 입김도 없이 사방으로 이슬을 부르고

향기를 피워내는구나

그것이 분하다


아무래도 억울하는 것은

네 남은 꽃송이 다 피워내도록

들려줄 노래 하나 내게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 가슴을 치는 것은

너와 나란히 꽃 피우는 것은 고사하고

내 손길마다 네가 시든다는 것이다


나는 위험한 물건이다

돌이나 치워주고

햇살이나 틔워주마

사랑하는 이여.

 

연꽃

                                            

저리 맑다 싶은 연못도

땅이 흔들리고 바람이 불고 물이 들고 나면

가라앉은 흙탕 일어 물이 흐리다

 

지친 몸은 쉬게 해야 한다

소란스런 정신은 쉬게 해야 한다

소음기 없는 발동기를 단 영혼은 쉬어야 한다

가라앉은 맑은 눈 비칠 때까지

자신의 영혼을 한동안 쉬도록 명령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조용히 살 수만 없다

핏발 선 눈빛을 거둘 수 없다

세찬 바람 잘 날 없고 생존은 예고 없이 침범당한다

우리가 쉬는 사이 어둠은 차올라온다

 

쉼없이 나아가 꽃을 피워라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밀려드는

진흙탕과 쓰레기와 함께 파리가 끓는 자리에

눈물과 피와 좌절의 구역질나는 골짜기에

강한 눈빛 하나 피워라

 

창림사지

석탑 하나 마주 하고서
저물도록 그 앞을 떠나지 못합니다

 

오늘에사 처음 본 탑이지만
탑은 나를 천년도 넘게 보아온 듯
탑 그림자가 내 등을 닮았습니다

 

수억 광년 먼 우주의 별들도 어쩌면
등 뒤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석탑 하나 마주하고 오래 서 있자니
나의 등이 수억 광년 달려와
나를 정렬하고 마음을 만납니다

 

옛사람들은 거울보다 먼저
마음을 비춰보는 돌을 발명하였습니다

 
 
강박

홍수에 불어난 강을 힘겹게 건너서는
뒤돌아보고 가슴 쓸어내린다
벌건 흙물 거친 물살 저리 긴 강을

 

내게도 지나온 세월 있어
지나오긴 했는지 몰라도
뒤돌아보이는 게 없는 건
아직도 쓸려가고 있는 것인가
내가 언제나 확인하고 확신하는 이 몸짓은
떠내려가면서 허우적이는 발버둥인가

 

내게는 도무지 사는 일이 왜
건너는 일일까

 

한 시대를 잘못 꿈꾼 자의 강박일까
삶은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일까
이 생의 건너에는 무슨 땅이 나올까

 

많이도 쓸려왔을 터인데 돌아보면,
어째 또 맨 그 자리일까

 
야생
야생에는 식물성 냄새가 난다
야생의 들짐승
야생의 날짐승
그리고 야생의 여자
야생의 수생짐승
그들을 안아볼 때마다
야생에는 식물성 냄새가 난다

어두운 밤길에서 만나는
산짐승의 사나운 눈빛도
밤의 숲 속 짐승들의 거친 교미도
저들끼리 싸워 피 흘릴 때도
나무들이 뿜어대는 뜨거운 열기인 양
야생에는 식물성 냄새가 난다

저들은 분리되지 않은,
저들은 분화되지 않은,
무수한 촉수와 날카로운
긴장의 그물을 가졌다
대상과도,
자신의 몸과도

동물은 사람 뿐이다.
 
장작불
우리가 산다는 건 장작불 같은 거야
먼저 불탄 토막은 불씨가 되고
빨리 불붙은 장작은 밑불이 되고
늦게 붙은 놈은 마른 놈 곁에
젖은 놈은 나중에 던져져
마침내 활활 타는 장작불 같은 거야
우리가 산다는 건 장작불 같은 거야
장작 몇 개로는 불꽃을 만들지 못해
여러 놈이 엉켜 붙지 않으면
절대 불꽃을 피우지 못해
몸을 맞대어야 세게 타오르지
마침내 활활 타올라 쇳덩이를 녹이지
 
 
예전엔 얼굴을
보아 알겠더니
요즘엔 뒤를
보아 알겠네

예전엔 말을
들어 알겠더니
요즘엔 침묵을
보아 알겠네

예전엔 눈을
보아 알겠더니
요즘엔 손을
보아 알겠네
 
사랑 노래
뿌연 가로등 밤안개 젖었구나
사는 일에 고달픈 내 빈손
온통 세상은 비오는 차창처럼
흔들리네 삶도 사랑도
울며 떠난 이, 죽어서 떠난 이
나도 모르네 떨리는 가슴도
하나 없어라 슬픈 사랑노래여
심장에서 굳센 노래 솟을때까지
 
공장 불빛은 빛을 바래고
술 몇잔에 떨리는 빈 가슴
골목길 지붕 어두운 모퉁이
담장에 기댄 그림자 하나
어떻게 하나 슬픈 사람들아
뭐라고 하나 떨린 가슴으로
하나 없어라 슬픈 사랑노래여
심장에서 굳센 노래 솟을 때까지
 
도시는 달을 끄고
불을 밝혀 낮을 연장시킨다
언제 달을 봤던가
달은 정전돼 있었다

산들이 웅성거리며 달을 밀어올리고
나는 오랫동안 캄캄한 산길에 있었다
오래 어둠에 둘러싸여 있노라니
마음속 깊은 골짜기가 열리고
아래로 흐르는 물이 보이고
그 물결 위에 달빛이 어린다

언제부터 잃어버렸을까
나의 반  대지의 반  세계의 반
달이 해의 잔해라면
저 하늘의 밤 별들도
문틈에 밀려오는 햇살에 부서진
작은 먼지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밤의 표상은 저리 둥글고
낮의 배후는 저리 영롱하다
해는 살갗을 비추나
달은 희디흰 뼈를 비춘다

돌아보느니, 우리는
세상의 반만 가지고 살고 싸웠느냐
 
노동자는 나이가 없다
그리고 어찌 되는 거지
이제 어찌 되는 거지
소줏잔이나마 사흘 동안 집들이하고
남은 술 따라 마시며 생각커니
그리고 어찌 되는 거지
이십년 가까이 일해서 마흔에 가진 내 집
그것도 순전히 몇년 동안의 피터지는
파업투쟁이 가져다 준 것이라
17평 아파느 밤 경치도 보기 좋네
얼큰 취해보니,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정신없이 마셨나보네
처음 집 가지는 기분이 이런가보네
친구들 불러 동료들 불러 동지를 불러
온수 욕탕에 집어 넣어 목욕도 시키고
기름 보일러 따끈하게 틀고 앉으니 내 세상 아닌가
하루 월차까지 내고 한번 오지게 마시긴 했는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구년 부금 물고 나면 나이 오십
나이 오십에 온전한 17평 하나
그동안 좀 모을 수 있을테지
그러면 더 큰 그곳으로 갈 수 있을까.아니지
이제 4학년 하나 2학년 하나 물가는 또 어쩌고
누가 아파버리면 어쩌지?
그때까지 내 건강은 버틸까?
늙으신 어머니와는 언제까지 떨어져 살아야 하지?
그리고 십년이면 육십, 그리고 어쩌지?
남은 술잔 비우느니, 기쁨도 잠깐
허허, 또 제자리
이제 좀 물러나도 되겠다 싶어
그동안 노조싸움 치를 만큼 치렀고
이 나이에 머리통 터지고 질질 끌려가도
새파란 형사놈 앞에서 반말 들으며
앞장설 만큼 섰다 싶어
이제 좀 뭘 해도 되겠다 싶었는데
허허, 또 제자리 아닌가
희뿌연 새벽은 얼큰하게 밀려오는데
허허, 잠시 헛꿈에 젖었나보네

자본에 팔린 노동자의 꿈은 다 헛꿈인가보네
오지게 마신 술은 다 뭐였나?
마누라와 애들은 단꿈에 젖어 자고 있는데
그래 그래, 노동자의 운명을 어쩌겠어
너저분한 술상을 치우고 또 가야지
자전거 꺼내 기름도 쳐두고 찬바람도 쐬고
자본에 팔린 노동자의 헛꿈도 깨어버리고
그래 또 새벽일 나서야지
 
노동의 밥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
펄펄 살아 튀는 밥을 먹으리라
먹은 대로 깨끗이 목숨 위해 쓰이고
먹은 대로 깨끗이 힘이 되는 밥
쓰일 데로 쓰인 힘은 다시 밥이 되리라
살아 있는 노동의 밥이

목숨보다 앞선 밥은 먹지 않으리
펄펄 살아오지 않는 밥도 먹지 않으리
생명이 없는 밥은 개나 주어라
밥을 분명히 보지 못하면
목숨도 분명히 보지 못한다

살아 있는 밥을 먹으리라
목숨이 분명하면 밥도 분명하리라
밥이 분명하면 목숨도 분명하리라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
살아 있는 노동의 밥을
 
그런 날이 있다
 
생각이 아뜩해지는 날이 있다
노동에 지친 몸을 누이고서도
창에 달빛이 들어서인지
잠 못 들어 뒤척이노라니
이불 더듬듯이 살아온 날들 더듬노라니
달빛처럼 실체도 없이 아뜩해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언젠가 아침 해 다시 못 볼 저녁에 누워
살아온 날들 계량이라도 할 건가
대차대조라도 할 건가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삶이란 실체 없는 말잔치였던가
내 노동은 비를 피할 기왓장 하나도 못되고
말로 지은 집 흔적도 없고
삶이란 외로움에 쫓긴 나머지
자신의 빈 그림자 밟기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경계
누가 이런 길 내었나
가던 길 끊겼네
무슨 사태 일었나 가파른
벼랑에 목이 잘린 길 하나 걸렸네

옛길 버리고 왔건만
새 길 끊겼네

날은 지고
울던 새도 울음 끊겼네

바람은 수직으로 솟아 불고
별들도 발 아래 지네

길을 가는 데도 걷는 법이 있는 것
지난 길 다 버린 뒤의 경계

아, 나 이제 경계에 서려네
칼날 같은 경계에 서려네

나아가지 못하나 머물지도 못하는 곳
아스라히 허공에 손을 뻗네
나 이제 모든 경계에 서네
출처 : poet ... 휘수(徽隋)의 공간
글쓴이 : 휘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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