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rain)에 대한 시모음
비 듣는 밤 / 최창균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빗소리
참으로 많은 생을 불러 세우는구나
제 생을 밀어내다 축 늘어져서는
그만 소리하지 않는
저 마른 목의 풀이며 꽃들이 나를
숲이고 들이고 추적추적 세워놓고 있구나
어둠마저 퉁퉁 불어터지도록 세울 것처럼
빗소리 걸어가고 걸어오는 밤
밤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내 문 앞까지 머물러서는
빗소리를 세워두는 구나
비야, 나도 네 빗소리에 들어
내 마른 삶을 고백하는 소리라고 하면 어떨까 몰라
푸른 멍이 드는 낙숫물 소리로나
내 생을 연주한다고 하면 어떨까 몰라
빗소리에 가만 귀를 세워두고
잠에 들지 못하는 생들이 안부 묻는 밤
비야. 혼자인 비야
너와 나 이렇게 마주하여
생을 단련 받는 소리라고 노래하면 되지 않겠나
그칠 줄 모르는 빗소리 마냥 들어주면 되지 않겠나
시집,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 (2004년 창비)
비 / 정지용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山)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낱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문장] 1941년
비 / 이재무
해 종일 욕설 쏟아져 내린다
어머니 생전에 내게 퍼붓던 욕
급살맞을 놈, 호랭이 물려가 뒈질 놈,
환장할 놈, 가랑이 찢어 죽일 놈, 염병할 놈,
죽은 연년생 동생과 함께 밥보다 많이 먹은 욕
쏟아져내려 먼지 푸석이는 생이 젖는다
그리운 얼굴들 쏟아져 내린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욕설이었다
병을 앓으며 생각의 키가 자랐고
집과 멀어질수록 마음의 뜰 넓어졌다
거리에 분주한 바지氏, 치마氏들아
귀 열어 욕설 담아보아라,
모처럼 정겹지 않느냐,
줄기차게 쏟아져 내리는 살뜰한 것들이여,
떠나서는 돌아오지 않는 간절한 것들이여,
불쑥 찾아와 얼룩의 생 닦아내는 지혜의 물걸레여,
줄기차게 잔소리 쏟아져 내린다
살가운 추억, 떠나버린 애인들
오후 강의도 작파해 버리고
에라, 욕에나 젖어 비에 젖어 술에나
젖어 사랑에 젖어
빗방울, 빗방울들 / 나희덕
빗방울, 빗방울들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그 빛, 그 가벼움,그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