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백우선 시모음

휘수 Hwisu 2006. 7. 22. 12:30

전남 광양 출생
1981년 《현대시학》등단
1995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우리는 하루를 해처럼은 넘을 수가 없나』
『춤추는 시』『길에 핀 꽃』『봄비는 옆으로 내린다』『미술관에서 사랑하기』등 

 

장미를 위하여

 

그 이름, 얼마를 달싹여 이렇듯 겹겹의 입술인가

그 얼굴, 얼마를 여겨보아 이렇듯 겹겹의 눈시울인가

가슴에 모아 올린 두 손,

얼마나한 떨림의 겹침인가

한시도 안 놓치려 깨우는 침――전신의 가시여, 가시여

 

열쇠 노인 

 

세상 한 구석
냉랭한 눈빛의 알루미늄 틀 속에서
열쇠를 깎고 자물쇠를 푼다

 

주렁주렁 걸린 열쇠로도
전란이 닫아버린 한쪽 눈을 아직 열지 못하고
몸의 길을 환히 열지 못하고
식구들의 막힌 길을 찰칵찰칵 열어 젖히지 못하고

 

자물쇠의 맺힌 가슴 녹여내는 그 손끝으로
한 평짜리 노점이나 열고
식은 도시락이나 열고
차들에 휙휙 날리는 자전거길이나
열고 간다

 

한 생의 온몸이 열쇠가 되어
세상의 어두운 자물쇠 구멍으로
비빗비빗 비집고 들어간다
                                                                                          

사랑

 

ㅅ은 둘이 기대어 있다
     마음과 몸도 기대어 있다
     함께 하는 그들,
     다리도 두 팔을 펼치고 있다

 

ㅏ는 사람과 배꼽 밑이
     꽃길로 높고 깊게 일어서 있다

ㄹ은 위아래 둘이 한 몸이 되어
     노래의 물결로 출렁이고

 

ㅏ는 마주보고 쳐다보며
     그대께로 곧추선 끝없는 지향

 

ㅇ은 둘이 하나 되는 나들목
     끝없는 생명의 문, 고리, 방울, 열매
     가장 절절이 휘감아드는 말-- '응, 응, 응'의 그것
                                     

동해 일출


 검은 배와 사람들, 어둠을 몸에 두른 채 밝음을 해에게 몰아주고 있다. 해의 그늘을 받쳐주고 있다. 해와 빛의 노래에 침묵이 되고 있다. 해를 잉태한 바다, 해를 분만하는 바다의 진통, 하늘도 벌겋게 목이 탄다. 쉼 없이 뒤채는 아픈 기다림의 바다, 피를 쏟으며 가까스로 마지막 안간힘을 쓴다. 바닷가는 무거운 신들을 끌며 못내 서성인다.

 

  머리꼭지를 드러내는 햇덩이, 어부들의 곱은 손이 받아올리고 하늘이 가만히 안아올린다. 바다의 탯줄을 끊으며 해는 뜬다. 온 세상이 아기의 첫 울음빛 바다로 출렁인다. 해의 등정을 거들어낸 동해의 고기들도 바다의 주름진 배에서 솟구친다. 갈매기도 바다의 생살이나 해의 옆구리를 째고 난다. 어떤 새는 날아올라 서쪽으로 깃을 치다가 설악산에 둥지를 틀기도 한다.

 

  햇빛은, 해가 뜨기도 전 저 손발 시린 어물전 불통의 불꽃들에서 빨갛게 이글거리며 피어올라 이미 우리들 가슴팍에 안겨 와 있었을까, 배의 불빛으로 엔진 소리로도 해는 우리들 겨드랑이를 파고 들어와 빛나고 있었을까, 혹 어떤 바람 같은 것들은 우리의 몸속으로 몰래 흘러들어와 그 속에서 반짝거리며 춤추고 있었을까, 해의 씨는 늘 이렇게 우리 피에 뿌려져 해를 부르며 살게 하는 것일까

 

삶은 달걀

 

 삶은 달걀이다. ― 그래, 삶은 달걀이다. 삶에도 유정란, 무정란이 있고 삶에도 껍질과 알맹이, 노른자위와 흰자위가 있고 삶도 굴러가고 그런 만큼 늘 아슬아슬하고 그러다가 더러는 금이 가고 깨지고 증발해 버리고 삶도 아예 제 몸을 바위 따위에 날려 차라리 박살이 나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삶도 누군가의 따스한 품에 안겨 개나리꽃빛 햇병아리가 되고 높은 지붕 위에 의젓이 날아오르는 수탉이 되어 새벽과 한낮을 알리기도 하고 삶에도 똥이나 피가 묻어 있기도 하고 삶도 누군가에게 삶아 먹히기도 하고 삶도 곤달걀이 되기도 하고 삶도 둥글어야 하고 그러자니 또 바로 서기 어렵기도 하고 삶에도 중금속이며 항생제 따위의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 있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