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배한봉 시모음

휘수 Hwisu 2006. 6. 21. 13:23

경남 함안 출생.
1984년 박재삼 시인의 추천을 받아 작품활동 시작.
1998년『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등단.
1998년 경남문협 우수작품집상(『흑조(黑鳥)』) 수상
1998년『흑조(黑鳥)』( 현대시).
2002년『우포늪 왁새』( 시와시학사, 시와시학 시인선 17).
2004년『악기점』(세계사 시인선 128)
2006년『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문학의전당
편역서『우리말 부모은중경』(1988, 청운).

                                       

비 맞는 무화과나무


물 젖어 풀린 화장지처럼 무화과
과육이 흘러내렸다, 나무 아래 서성이는
내 어깨에 머리에 무화과 맨살이
취객의 오물처럼 엉겨 붙었다

 

열매란 둥글고 단단하게 자라서
익는 것이라 여긴 내게
비 맞는 무화과, 이런 삶도 있다고
꽃 시절도 없이 살았던
뚝뚝, 제 안에 고인 슬픔을
빗물로 퍼내는 것 같다
웅덩이 같은 몸을 가진 무화과

 

누구나 웅덩이 하나씩은
가지고 살지, 상처를 우려내
가뭄 든 마음을 적시기도 하지
그러나 너무 오래 고여 있으면
안 되는 웅덩이
퍼 내지 못하면 결국
출렁이지도 못하고 뭉크러지는
영혼의 폐허가 되고 말지

 

취객 같은 무화과나무 아래
내 가슴속의 무화과 어디 갔나, 나는
폐허처럼 서서 한참이나 비를 맞는다

                                                 

육탁(肉鐸)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 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사람의 집 창문도 저렇게 늘 열려서 불빛을 흘릴 것이다
 지하도에서 역 대합실에서 칠 바닥도 없이 하얗게 소금에 절이는 악몽을 꾸다 잠깬
 그의 작고 둥근 창문도 소금보다 눈부신 그 불빛 그리워할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캄캄한 방문을 열고
 나보다 손에 들린 검은 비닐 봉지부터 마중할 새끼들 같은, 새끼들 눈빛 같은

 

 

남해 마늘밭

 

하오의 바닷바람에 온몸을 출렁이는 마늘밭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종을 뽑는
할머니 일생을 솨르륵 솨르륵 읽고 있다
밀물과 썰물 소리를 내던 검푸른 시간
그 추억의 손목을 잡아당기면
해수병 앓는 영감이나 도회지로 나간 자식들
성큼성큼 졸랑졸랑 걸어오던 시절도 보이리라
종을 뽑아야 마늘 뿌리 더 굵어지듯
꽃시절의 골수 뽑아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켰던 우리들의 어머니, 어머니
여름날 긴 해도 짧던 그 마늘밭이
오늘은 바다가 된다, 주름지고 못 박힌 손
허옇게 센 머리칼을 적시며 출렁이는 바다
그 바다에 뜬 섬 하나
영영 펴지지 않을 것 같은 굽은 등 위로
솨솨솨 바람 불어 남루해진 세월을 지운다
끼욱끼욱 몇 마리 갈매기도 불러와
수만 권 생애의 책을 펼쳐 읽는
검초록 광휘의 남해 마늘밭

 

 

각인

 

이름부터 아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장수풍뎅이, 각시붕어, 닭의장풀꽃
사는 법 알면 사랑하게 되는 줄 알았다
아이는 한 송이 풀꽃을 보고
갈길 잊고 앉아 예쁘네 너무 예뻐, 연발한다
이름 몰라도 가슴은 사랑으로 가득 차
어루만지지도 못하고 눈빛만 빛내고 있다
사랑은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임을
내게 가르쳐 주고 있다
헛것만 가득한 내게 봄을 열어주고 있다
깨닫느니, 느낌도 없이 이름부터 외우는 것은
아니다, 사랑 아니다
생각보다 먼저 마음이 가 닿는 사랑
놀람과 신비와 경이가 나를 막막하게 하는 사랑
아름다움에 빠져 온몸 아프고
너를 향해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때
사랑은 웅숭깊어 지는 것이다
이름도 사랑 속에 또렷이 새겨지는 것이다

                                                      

산벚꽃나무 아래서의 통증

 

 

     대지가 검은 서랍을 열자 풀들은 파랗게 생각을 내밀어 흔들었으나 겨우내 닫혀 있던 내 생각의 상자에서 쏟아진 어둠은 파랗게 곰팡이를 피워내고 있었다

 

   얌전한 고요가 산벚꽃나무를 흔들자 어두운 구석에서 빈혈 앓던 생각들이 꽃과 함께 바람의 허리를 잡고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대지는 아득히 가슴 벌려 반가운 친구를 맞이하듯 감싸안았다

 

   꽃나무를 지나 흘러가던 길이 지워지고, 별들은 모두 지상에 내려와 꽃잎이 되었다

 

   꽃가지가 공중에 꽃을 풀어놓고 몸에 스민 바람의 무게를 덜어내듯이 가만히 목울대를 밀고 올라오는 통증

 

   얌전한 고요가 다시 산벚꽃나무 가지 흔드는 것을 나는 보고만 있었다

 

전지(剪枝)

 

복숭아나무 가지마다 꽃눈이 싱싱합니다
복숭아나무는,
그악스런 눈바람 견디느라 좀 늙었지만
아직 팔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나는 얽히고설킨 가지를 자릅니다
지치고 아픈 과거 시간을,
잘 보이지 않는 내 삶의 곁가지를
환한 봄볕에 잘라 말립니다
고통의 능선 너머에 결실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속 만 가지 생각중에
실한 열매되는 것은 
한두 개도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시집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2006년 문학의전당

출처, 네블,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