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제 시모음 2
1963 전북 정읍 출생
서강대 신방과, 서울 예술신학대 기독문학과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詩 '나는 날마다 전송된다' 당선
시집 '삼류극장에서의 한 때', ' 이 달콤한 감각'
꽃 피는 힘
끙, 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아버지가 조카 녀석의 비비총을 움켜쥐고 쩔쩔맨다
녀석이 손쉽게 장전하던 장난감 총을
애써 당겨보지만 얼굴만 벌겋게 달아오른다
마른 줄기 같은 힘의 무늬만 곤두선다.
기어이 허허하고 놓아버린다.
숱한 전쟁을 치르며 훈장까지 걸어주던 힘이
아버지도 어쩌지 못해 부수고 고함치며 제멋대로 날뛰던 힘이
늘 무섭고 단단한 표정으로 고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꼿꼿하게 받쳐주던 힘이
마른 손끝에서 바르르 떨고 있다.
더 이상 몸 밖으로 손 내밀지 않는 힘
걸음을 옮길 때에도 그저 구경만하는 힘
동물성에서 식물성이 되어가는 힘
그래도 힘은 절대 사라진 게 아니다, 아버지 깊은 속 어딘가에
가느다란 숨결처럼 숨어 있다가
아버지도 어쩌지 못해 휘청거리는 몸을 받쳐주거나
가끔 제 붉고 뜨거웠던 흔적을 보이려는 듯
얼굴 위에 진한 꽃잎들을 펼쳐 보인다.
이미 滿開한 힘은
점점 더 투명해진 무엇이 되어
마음 쪽으로 스며들고 있다.
이제 힘은 맘껏 열매를 달고 익어갈 것이다.
그 힘을 가만가만 고르며 아버지는 한바탕 허허 웃는다.
부레옥잠
제 몸속에 가둔 바람 한 움큼으로도 지탱할 수 있는 생이 있다
뿌리를 갖고도 평생 떠다니는 몸들
옹기에 띄워둔 부레옥잠이 꽃을 피웠다
그저 고요하나 수면 위 바람을 품고 떠있는 것이라 여겼는데
흰 꽃, 이파리들 속에 퍼렇다 못해 자줏빛으로 멍든 꽃잎 하나
그 멍, 한가운데 점처럼 박힌 달
저 달을 잉태하기까지 가슴에 품은 바람의 독기는 오래 싱싱하게 윤기가
흘렀을까, 알몸의 뿌리를 드러냈을까
다섯 살 이후 내가 품은 것들은 모두 바람이었고 병이었다
그것들이 등짝에 뿌리를 내리는지 자주 앓아누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탕에선
병의 뿌리조차 허우적거렸다
그때마다 차갑거나 뜨거운 것들이 가슴에서 울컥울컥 솟구쳤다
간혹 달 같은 누런 알약들이 손바닥위에 떠있었다
그러나 내 슬픔은 고요했고
유리창에 고인 날들은 늘 잠잠했다
부레, 그것은 멍든 바람의 씨앗과 병을 매단 것들의 유일한 이름이었다
그 이름으로 날마다 눈물의 바탕에 뿌리를 내리고도 한생을 고요하게
떠들 수 있으니
식물의 날들은 언제나 윤기가 흐르고,
꽃이 피고
현대시학, 2005년 7월호
정오
언제나 일방적인 햇빛. 담벼락 아래 웅크린 고양이가 제 몸을 몸에 달라붙은 햇빛을 핥아먹는다. 수만 가지 생의 시간을 또 한 겹 발라낸 햇빛은 싱싱하다. 싱싱할수록 고양이의 눈동자는 더 예리하게 날이 선다.
불어터진 면발 같은 소음을 뿜어내며 지나가는 중화반점 오토바이 뒤로 햇빛에 그을린 집들이 쏟아진다. 환풍기마다 살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하수구마다 냄새를 헹군 몸들이 헛구역질을 하며 흘러간다.고양이는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있다. 이때쯤 한 번은 앞집 여자의 고함소리가 들려야 한다. 다시 길은 졸깃해진다.
잘 달구어진 철판처럼 허공은 순식간에 몇 개의 날카로운 경적소리를 구워낸다. 여전히 태양은 끓어오른다. 날개달린 것들 스스로 몸을 던진다. 고양이는 끝끝내 정오를 기웃거리지 않는다. 햇빛은 핥을수록 허기가 진다. 고양이가 앉았던 그늘이 움푹 패어 있다.
시작, 2005년 여름호
꿈의 잠언
1
세월이 너무 태연하게 늙어간다. 고정된 것들 모두 얼어붙는다. 한때의 애인은 컴컴한 지하실 문을 두드리고 사납게 펄럭이던 지상의 그늘들은 겨울 수용소로 압송당했다. 알몸의 나무가 바람의 춤을 익힐 때에도 진리의 서적들은 여전히 혐오스러운 가면을 쓰고 돌아다닌다. 관념의 시절이다. 아무것도 슬프지 않다.
2
부드럽고 천한 여자의 가슴을 그리워한다. 쾌락은 얼마나 정성스레 나를 양육할 것인가. 내 혀는 얼마나 자랑스럽게 욕망의 젖꼭지를 빨며 말을 익힐 것인가. 수치심으로 가득 찬 여자들의 정신을 배우고 싶다.
나는 부패함으로 살찌워진다. 정신의 텃밭에서 썩은 씨앗들이 재배된다. 내 살점들, 아프지 않다.
겨울이 오면, 나는 하얗게 탈색된 세상을 체험하며 온갖 환멸들을 습작한다. 그런 경이로운 시간이 내게 있음을 찬송한다. 헛것의 창작물들이 내 일생을 대표할 것이다. 먼 날, 유물이 진열될 때마다 칭송되는 신으로 군림할 것이다.
나는 쾌락의 아들― 오, 여자들아. 검은 구멍을 열어다오. 내 모든 감각들은 은밀한 숲과 험악한 늪에서 죽음의 꿈이 생성되어가는 과정을 맛보고 싶어한다. 나는 애무의 고통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다.
3
얼음의 나라에는 얼음의 군주가 있고, 얼음의 백성이 있고, 얼음의 길이 있고, 얼음의 자동차가 있고, 얼음의 계절이 있고, 얼음의 산이 있고, 얼음의 숲이 있고, 얼음의 나무가 있고, 얼음의 꽃이 있고, 얼음의 석양이 있고, 얼음의 집이 있고, 얼음의 아이가 있고, 얼음의 노인이 있고, 얼음의 시계가 있고, 얼음의 램프가 있고, 얼음의 하수구가 있고, 얼음의 계단이 있고, 얼음의 창이 있고, 얼음의 눈물이 있고, 얼음의 노래가 있고, 얼음의 춤이 있고, 얼음의 기억이 있고, 얼음의 꿈이 있나니,
그러니 어떤 꿈이 흘러다니겠는가.
어떤 희망이 범람하겠는가.
4
내 정신은 끊임없이 환각 속으로 진화한다.
5
모든 꽃들은 열매를 맺으며 썩어버린다. 다행한 일이다. 살아 있는 것들에게 고정할 수 있는 건 권태뿐이다. 다시 늙은 자들이 두려워하는 저녁이 왔다. 잎의 그늘이 사라진 허공으로 거대한 구름들이 몰려온다. 얼어붙은 별들을 향해 짐승들이 날아간다. 단아하고 선명한 달빛은 언제나 배후에서만 반짝인다. 한 번 사용한 계절은 돌아가 지옥의 방이 된다. 겨울의 밤은 환기구가 없다. 저 태연한 세월.
시계는 늘 무뚝뚝한 변호를 하고 나는 도덕과 가치로부터 제명당했다. 탄생의 죄악을 감당할 어떤 정신이 있을까? 몸은 한 방울의 물이 되기 위해 영혼의 능욕을 견뎌내지만 내 쾌락은 고귀하고 당당하다. 이제 나는 모든 증오를 절제한다. 고요하고 불길한 새벽에 이르기 위해.
단언하건대, 나는 부패한 집이고 몽상이고 노래다. 나는 동요하지 않는다.
울고 있는 아이
시장 한복판에서 울고 있는 아이.
울면서도 과자를 먹고, 중고 전자상 티비를 보며 울고, 고개를 두
리번거리며 울고.
생선들이 토막나고, 그릇들이 흥정되고, 앉은뱅이 수레가 지나
가고, 트럭이 경적을 울리며 겨우 빠져나가고, 땡중이 구걸하고,
그 사이 몇 번인가 닭 목이 비틀어지고, 다시 전도사가 지나가고,
튀김들이 익어가고, 모든 걸 구경하는 아이가 울고, 서성이며 울
고, 또 울고.
공중으로 첫 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고, 그곳에 서서 아이는
울음이 젖어 연거푸 울고.
세월이 가고, 울고 있는 아이의 얼굴에 수염이 돋아나고, 주름이
패이고, 머리칼이 하얗게 바랠 때까지 그저 울고.
노을 속에 잠기다
파장동 횡단보도에 서있는 저물녘
어쩌면 나는,
유린당한 착란의 풍경
불이 꺼진 유리창 속에서만 어른거린다.
내 눈동자 속에서 한 무리의 새떼가 솟구친다.
이마에서 흘러나온 붉은 타르 같은 칠로 덕지덕지 번져가는 허공
벌써 뼈를 이룬 것들은 대지에 우뚝 검게 서고
모든 빛은 나의 내부로 들어와 죽는다.
나는 어쩌면,
유리창에 낀 먼지의 얼룩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이면지처럼 창백한 여자의 얼굴을 지나
구멍가게 시멘트벽의 부서지는 모서리를 지나
불붙는 문들과 화려한 구멍들을 지나
돌아보면 도시는 모래의 유적
돌이켜보면 나는
저 아득한 古生代 노을 속을 떠돌다
잠을 잘 때만 부스럭거리며 내 정체를 드러냈었지
나는 모래의 태반에서 기어나온 몸
어쩌면, 정말 어쩌면
몇 번인가 뒤집힌 지층의 풍경, 불붙은 모래먼지의 착란
속에서 한 어여쁜 아이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노을 속에 잠기다 잠깐 뒤돌아보면.
놀이터에서의 한때
출입금지구역
지하도 후미진 곳에서
누워 있는 중년의 사내가 발견되었다
불빛 쪽으로 한 팔을 던져놓고 그는
반듯한 표면 위 가지런하게 무거운 중년을 내려놓았다
소화시키지 못한 몇 낱의 알약을 뱉아버린 채
차가운 바닥에 오른쪽 빰을 밀착시켜
더 깊은 땅 밑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무게 중심을 벗어난 구두가 나뒹굴고
식은 체온은 따끈한 호흡의 접근을 막는다
앙 다문 이빨, 말의 길이 막혀 있다
그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통과 증오,
체념까지 충분한 양을 가졌으므로
이제 여한 없이 휴식을 선택했다
작동이 정지된 몸 안으로 딱딱한 휴식이 가득찬다
세상의 길들을 불신했던 그는
자신의 죽음마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부릅뜬 눈으로
편안함을 방해하는 자들을 노려본다
휴식을 얻기 위해 광란의 밤을 지샜노라고
부서진 손톱과 엉겨붙은 핏자국을 제시한다
콘크리트벽을 밤새 후벼파며 새겼던 기호들이
불빛 속으로 쏟아진다
그의 마지막 움직임이었을 저 손,
무엇을 움켜쥐려 했는지 단서조차 없다
잠시 울 검사관이 다가와 사망진단서를 발부하자
그제서야 알아차린 듯 두 눈을 감는다
아주 조용한 곳으로 그가 옮겨진다
텅 빈 바깥으로 줄이 쳐지고 팻말이 걸린다
여기는 출입금지구역입니다
꽃들은 상처 자국에서 핀다
뿌리 잘린 것들의 밑바닥엔 모두 상처가 있지
조팝나무 가지가 꽂힌 그릇의 물을 갈아주며 그가 중얼거린다
봄빛을 따라간 산책길에서
주워 온 꺾인 가지 몇,
시퍼런 눈조차 뜨지 못했던 것들 어느새
새하얀 연고 같은 꽃들을 매달고 있다
무슨 보물인 양 여기는 그의 우스꽝스런 몸짓을 보면서
고아원 양지바른 곳에서
여린 가지를 뻗고 자라온 그가
남매를 두고서도 또 다른 아이를 원하는 집착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여지껏 삼켰을 눈물에 대해
어쩐지 그의 웃음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눈물이 싱싱해질수록 더욱 더 선명한
조팝나무 저 꽃들,
바람에 날려 온 봄빛의 부스러기일지도 몰라
상처를 딛고 악착같이 반짝이는 딱지 같은 꽃들을
무슨 별인 양 바라보는
그의 양팔에 아이들이 매달린다
어떻게 이것들이 내게서 생겼는지
햇살과 공기와 구름과 모든 계절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그러나 꽃들이 제 몸을 벗어나기 전까지
그것들이 단단한 씨앗을 품을 때까지
아직은 잘린 상처로 눈물을 삼키며 허공을 움켜쥔
조팝나무 가지의 아슬아슬한 터전, 그의 봄날
망가지는 것들의 자리
아픈 허리를 달래며 누운 어둠 속
딱, 딱, 마디 꺾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선다
자세히 들어보니 새로 들여온
서랍장이 자리를 잡느라
뼈마디를 꺾는 소리다
단단하게 못질된 어디 꺾일 마디가
있었는지
연거푸 비명을 지르며 어둠 깊이 제
몸을 내려놓는다
내 몸의 뼈들도 이제서야
몸속 가득한 어둠의 바탕에 자리를 잡는 것이리라
고딕으로 조립된 꿈의 형태가 망가지자
이제서야 겨우 몸은 내게 자리를 내어준 것이리라
간간이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내부에 진열된 것들을 더듬는다
나는 어둠으로부터 모든 걸 익히기 위해
포장된 식간들을 뜯어냈다
태양은 일기장마다 흠집을 내었다
풍경들이 텅 비어버린 집은 블랙홀처럼 고요했다
울음은 증발했고 녹슨 공기들이 들락거리며 나를 일그러뜨렸다
어릴 적 밤마다 공동묘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는
뜬소문을 기억해내며
여기저기 어긋난 뼈마디를 조금 더 어둠의 내부에 내려놓는다
날마다 서랍장은 젖은 살을 말리며
온 힘을 다해 뼈마디를 꺾는다
서랍이 비틀리고 자세가 기울고 형태가 무너져내린만큼
제자리를 잡는다
망가진 가구들은 그만큼 스스로의 내부를 향해 간다.
향기에 대한 관찰
젖은 쓰레기 더미 위에서
치자꽃 무리가 피었다
깨진 유리병과 망가진 잡동사니 따위로
딱딱한 형태를 견뎌낸 것들,
텅 빈 공기의 틈으로 주입되는 한 호흡의
향기가 되기 위해 몰입한다
역한 핏물이 주르르 몸밖으로 흘러나갈 때까지
부패의 꿈속으로 매몰된다
그 속에서 뿌리들이 번식하는 소리
뿌리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꽃과 열매와 벌레와 여자와 아이들이 익어간다
이곳에 이르면 모든 경계는 모호해지고
날카로움도 망가짐도 눈부신 풍경이 된다
새들 속에서 우는 잡동사니와
나뭇잎 속에서 펄럭이는 고철과
꽃들 속에서 반짝이는 유리조각
온갖 황홀한 향기로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사물들, 사물들 모두 응고된 공기의 흔적이 아닐지
배설물이거나 발자국이거나 혹은 눈물?
가끔씩 정체를 드러내며
차갑고 날카롭게 지상을 휩쓸고 지나간다
뿌리 내린 것들은 지탱할 수 없을 때까지
몸을 부풀려 꿈 속 배경이 된다
망가질수록 황홀해지는 지상의 풍경
치자꽃 향기가 콧속으로 스민다
나는 느릿느릿 고정된 생이 형태를 망가뜨리며
수많은 사물들 사이에 눕는다
점치는 여자 1
무수한 죽음을 안고 사는 여자
잠시만 이 생에 집착해도 머리가 아픈 여자
천둥이 치고 캄캄한 불길에 재가 되어버릴 것 같은 여자
알약을 삼키듯
서둘러 온갖 사주팔자를 집어먹는 여자
비로소 펄펄 살아 움직이는 여자
날마다 새로 태어나고 날마다 죽는 여자
억울하게 목매단 죽음이 통곡을 하면서도 신이 난 여자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칭얼대며 춤추는 여자
몇 대조 할아버지로 달려오는 여자
수 백번 사랑하다 죽고도 몸을 뒤트는 여자
나비가 되고 싶어서 죽었다고 우기는 여자
뭉게구름으로 떠돌다 울고
산발한 꽃송이 봄으로 피었다가 이제는
달로 잉태하라고 붉게 흘러나오는 여자
죽어서도 안 죽었다고 밥 달라고 우기는 여자
다 퇴화해버리고 죽어서도 안 죽는 꿈만 남은 여자
어떤 게 삶인지 죽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여자
천년 전에 이미 죽은 여자
지구의 60억 죽음을 다 가지고 싶어 안달하는 여자
인류의 역사를 전부 죽음으로 이야기하는 여자
더 많은 죽음들이 들어찰수록 오래 사는 여자
완전한 여자.
한 방울의 고통
실습용 애인이 떠나자
갑자기 약지손가락이 생인손을 앓는다
손끝에 모여든 한 방울의 통증으로 온몸이 들끓는다
날림으로 조립했던 애무의 손끝도 그런 증상이었다
애인은 작동될 때마다 덜커덩거렸다
내장을 더듬으면 빠져 나온 나사못이나 깨진 파편조각의 감촉
손끝이 아려왔고
그때마다 몇 방울의 윤활유 같은 욕설을 배설했다
사용기한을 넘긴 애인은 폐기처분되었다
작동을 멈춘 감촉은
망가진 공구처럼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
미세한 느낌들을 친절하게 전해주던 손끝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소스라치듯 물러서는 세상과의 접속이 끊어진다
모든 애무는 관념이 된다
오랜 시간 너무 많은 감촉들이 스며들었다
차갑고 뜨거운, 거칠고 부드러운 세상의 느낌은
추억의 부속품처럼 제각각
내 생을 조립하려 몸 속에 진열되었지만
스스로 분해하고 망가지는 느낌에 길들여질 뿐
오래 고여 곪아버린 일회용 애인들이
무감각한 몸을 빠져나가려 벌겋게 몰려든다
폐기된 부품들처럼 널려진,
수많은 감촉들이 뒤범벅이 되어 통증이 인다
나는 한 방울도 안 되는 고통을 감싸쥐고
온갖 생소한 느낌들에게 손가락을 들이민다
현대시, 2003. 2월
아름다운 세탁소
맑은 날 아침 젖은 옷을 꺼내 말린다
눈부신 햇살에 닿아 얇디얇은 것들 속이 비치기도 한다
더럽고 냄새 나는 경험, 구겨진 추억과
벗어던진 나날들, 구석에 웅크린 채 나는
말끔히 지우기 위해 많은 눈물을 헹구었다
악착같이 비벼대고 가슴을 치면서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푹푹 삶아야 했다
나는 본래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한 톨의 씨앗으로 자라나 열매를 맺고,
다시 한 올의 실이 되고,
짜여져 정갈하게 물들여지기까지 반듯한 바탕이었다
더듬거리며 검은 연기가 솟는 추억의 공장들을 떠돌았다
안과 밖으로 쉴새없이 더러움이 흡수되었다, 세월들은
내게 눈총이나 욕설 따위를 던졌다
내부에선 헛된 꿈이 끊임없이 들끓었고
식은땀이나 거친 각오 같은 냄새들이 배어나왔다
이런 게 아니었다고, 그때마다 역겨운 기억을 헹구어내며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싱싱한 날개로 되살아나기 위해 더욱더
뜨거운 다짐을 누르며 구겨졌던 꿈들을 다시 편다
그러나 아무리 헹구어도 실핏줄을 떠도는
끈끈한 추억의 입자들, 그 미세한 흔적들로 인하여
나는 천천히 낡아갈 것이다, 지상의 질서 속에서 헤매는 동안
사용할 수 없이 낡아버릴 때까지
맑은 날이면 나는 젖은 몸을 말리고 있다
삼류극장에서의 한때, 민음사,1997
달
그때였다, 텅 빈 자궁처럼 패인 놀이터
뭉텅뭉텅 어둠을 베어 먹던 그녀가
몸을 쥐어뜯으며 금속성 울음소리를 낸다
그녀가 선명해진다
이물질처럼 덜컹이며 그녀를 탄다
여전히 달은 몸 속에서 꿈틀거린다, 꿈틀거리며 아득한 몸속을 떠다닌다
가슴을 지날 때마다 뜨거워진다
달이 타오른다, 울음에서 말에서 꿈에서 끊임없이 타오른다
그녀가 달 속에서 타오른다
붉은 길이 되어 이리저리 흘러다닌다
아득한, 너무 아득한 지평선을 향해,
삭아버린 뼈를 짚고 떠도는 달 수천 수만의 길을 떠돌아도 제자리인 달 기어이 뜨거운 바다를 게워내는 달 울다 만 영혼을 삼키고 식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달 어둠의 레일을 벗어나지 못하는 달 한 번도 착륙할 수 없는 달 순식간에 깨져버리는 달 껍질을 벗기면 핏빛 얼룩일 뿐인 달 너무 낡아 하얗게 바랜 달
그때였다, 열린 자궁 같은 놀이터에 흰 피가 자욱히 번진다
뿌리를 움켜쥔 식물들만 예민하게 반응할 뿐
길 위에 쏟아진 법칙들은 어떤 결론도 수정하지 않는다
놀이터 울타리 너머 부스러기 풍경을 주워담는 어둠
달은 여전히 꿈틀거린다
아직도 그녀는 그네를 탄다
끝끝내 구멍인 유일한 어둠
그녀는 모든 풍경을 경멸할 자격이 있다
모든 아침과 모든 문과 모든 걸음을 증오할 자격이 있다
단순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스며드는 그 놀라운 감각들, 달의 자양분
마침내 그녀는,
허방에 매달린 그네에는 달이 머물렀던 흔적만 남는다
현대시, 2005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