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시모음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87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가구(家具)의 힘」당선
1994년 첫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제15회 동서문학상 수상
1996년 제1회 꿈과시문학상 수상
2005년 제10회 현대시학 작품상
춤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연습을 한다.
근육은 날자 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絶海孤島,
내려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무늬로 뒤덮인다
발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
서녁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 동이일까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 제10회 현대시학 작품상-
묘비명
유별나게 긴 다리를 타고난 사내는
돌아다니느라 인생을 허비했다
걷지 않고서는 사는 게 무의미했던
사내가 신었던 신발은 추상적이 되어
길 가장자리에 버려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그 속에 흙이 채워지고 풀씨가 날아와
작은 무덤이 되어 가느다란 꽃잎을 피웠다
허공에 주인의 발바닥을 거꾸로 들어올려
이 곳의 행적을 기록했다,
신발들은 그렇게 잊혀지곤 했다
기억이란 끔찍한 물건이다
망각되기 위해 버려진 신발들이
사실은 나를 신고 다녔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맨발은 금방 망각을 그리워한다
앞발이 들린 채 끌려가는
복날이 지났는데도 쇠줄을 질질 끌며
자기의 생이 더이상 갈 수 없는 곳에서 앞발이 들린 채
낑낑거리는 검고 마른 개를 시장 한켠에서 본다
보신탕 가게를 지날 때면,
아파트 한 채씩 분양받고
철망 속에 웅크리고 있는 개 잔등을 생각한다
눈곱 잔뜩 낀 개들이 아파트를 지나쳐 갈 때,
내 생으로 가닿을 수 없는 피안이
앞발이 들린 개의 발톱 앞에 펼쳐진 시장 한쪽이라는 생각이 든다
낡고 허름한 가옥들 사이로 난 길에 러닝셔츠를 배까지
밀어붙이고 부채질하는 노인 하나가 돗자리에 앉아
무슨 소린가 하염없이 늘어놓고 있다
그늘 속에서는 죽은 벌레들이 자꾸 발견된다
작은 장난감처럼 아이가 희미하게 웃는다
나는 아이가 시멘트 바닥에 크레용으로 그린 집에 차양을 달아주고 싶다
방주
그것은 다라이에 붙어 있었다.
그것이 자랄수록 다라이는 하늘로 떠올랐다.
인생이란 때로 붉은 다라이에서 바라본
물빛 세로줄무늬가 연속된 비닐 천막의
천장인지 모른다, 포장마차 속
아이는 다라이에 눕혀져 키워졌다.
흰 실로 몸을 친친 감은 누에고치처럼.
뜨내기 손님들이 남긴 생의 얼룩이
카바이드 불빛 아래 고여가는 雨期의 밤,
포장을 때리는 쉼없는 빗소리에
아이는 한 겹씩 고치를 벗고 있다.
나비로 탈바꿈할 때까지, 비가 내린다
우동을 파는 고단한 어미의 잠에 떠밀려
새벽을 견디는 시장의 포장마차 속
아무도 눈여겨본 적 없는 한 척의 배가.
조심스레 아이를 품고 물거품 이는
해변의 풍요로운 기슭으로 간다.
세로줄무늬의 천장위로
비가, 그치고 있다.
파리떼가 푸른 등을 반짝이며
점점이 박혀있다.
저 곳
空中이라는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 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空中이라는
말.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