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현 시모음
경북 대구생
경북대 영어과 졸업
2003년 시안으로 등단
전화가 오지 않는다
진달래가 피고 개나리가 졌는데
전화가 오지 않는다
수수꽃다리가 피고 목련이 지는데
넝쿨장미는 담벼락마다 기어오르는데
전화가 오지 않는다
세상은 초록빛으로 달음질치는데
사랑했다 여겼는데, 친구라 여겼는데 그도 저도 아니어도 이해는 하리라 믿었는데 마음이 낡은 솔기 실밥 터지듯 벌어지고 있다 그 틈 속이 너무 깊다 너무 얕다 너무 아득하다 너무 선명하다 문자를 때리고 메시지를 남겨도 답신은 오지 않는다 이 나쁜 자식! 사기꾼! 쌍욕을 하며 구시렁대며 나는 그가 너무 그리워 눈물 흘리며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를 길게 누른다
뚜. 뚜. 뚜 . 기척 없는 저쪽 세상에서 비오는 소리 들린다
UFO
왔어요 왔어! 21만 광년 너머 저 우주에서 UFO가 왔어요 꿈을 가지고 왔어요 손바닥 위 몇 개의 UFO 모양의 팽이를 올려놓은 한 사내, 소리치다 휙 그것들을 던진다 지하철 바닥으로 착륙하듯 사뿐 내려앉는 팽이들 붉은, 푸른 원형의 줄무늬들이 잠시 꿈결에 젖은 듯 돌아간다 거문고, 독수리, 궁수, 백조, 전갈 자리들이, 헤라클레스가, 카시오페아가 돌아간다 저 멀리 서쪽 안드로메다은하까지 날아가고 있다 황도를 돌리고 있는 사내의 저 고단한 집중! 달리는 지하철 바닥에는 분주하게 별자리가 새겨진다 제 몸을 다 태우고서야 지상에 닿을 수 있는 아득한 눈빛들, 오르페우스의 하프 가락이 지직거리며 시간의 무게를 연주한다 반짝이는 꿈 조각들이 기울어지다 쓰러진다 나는 또 천원을 내밀어 비닐봉지에 든 그 꿈들을 사지 못한다 사내는 가방을 밀고 다음 칸으로 가고 칠월의 밤을 페가수스처럼 달리고 있는 지하철 소리, 따각 따각 따아각
반생半生이 흘러가다
홍지문 터널이 내게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중이다
나는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시켜
엑셀레이터를 밟는다
빗줄기가 사선으로 들이치는 차창 밖으로
길가의 주황빛 원추리 꽃들이 흩뿌려지다 사라진다
와이프가 다 닦아내지 못한
빗방울들이 서로 엉겨 무거워지다 주루룩 흘러내린다
터널 안은 고요하다
터널안 일렬로 켜져 있는 불빛이
연속무늬의 꽃잎처럼 번득인다
라디오를 튼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미, 일의 즉각적 반응과 우리 정부의
늦은 대응책을 말씀해 주시죠, 박사님
건조한 목소리의 사내가 한참 열변을 토한다
채널을 다른 곳으로 바꾼다
-남부 지방에 큰 피해를 입힌 태풍 에위니아가 북상중입니다만
세력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늘 장황한 해설로 채워지는 세상을 끈다
굽어진 터널의 회전이 급하다
나는 추월당하지 않으려고 핸들을 꽉 잡는다
문득 렉카와 앰블런스가 앵앵거리며 달려오고
앞차들이 줄줄이 후미등을 켠다
누군가 또 이 질주에서 이탈한 것이리라
후면경으로 순한 짐승처럼 엎드린
차들이 보인다
반원의 터널 끝이 아득히 보인다
1890m의 이 터널 안
누군가 또 참을성 없이 크랙션을 울려댄다
나는 다시 세상과의 교신을 위해 라디오를 틀어본다
반생半生이 느리게 흘러간다
진밭골시편
-낡은 약장-
사랑채엔
천장 가득 약봉지들이 매달려 있다
할아버지는 작두로 약재를 썰어
천칭으로 무게를 다신다 저울대는 가늘게 떨리다가
수평을 이룬다
스무 장의 얇은 종이를 사선으로 겹쳐 놓은 채
가지런히 약첩을 조제하시는 손등, 저승꽃이 피어있다
그 옆에는 감초를 오물거리는 아이들
장독대 옆에서
고모는 종일 한약을 달여 아버지가 누워 있는
안채로 들이고 있다
또 인삼밭에 도둑이 들었다
비온 뒤
돌담 밑에 또아리 틀던 지킴이가 보이지 않는다
설날을 앞두고 떡을 치던 우물가 평평한 돌에
고추들이 빨갛게 널려 있다
배꼽을 드러낸 우물, 동네 아낙들 키득대던 웃음이
놋그릇의 녹처럼 피어난다
햇살이 잡초 사이 얼굴을 묻고 있다
장지문 안, 목침을 벤 할아버지 긴 잠에 빠져 드시고
총총한 약장 서랍은 여닫기지 않는다
서랍장 안의 은행나무가 자라나고 달맞이 꽃이 피어나는
구름밭, 한약냄새가 진동을 한다
열대어를 키우는 남자
열대어를 키우는 한 남자를 알고 있네 우우~ 구피 지브라 키싱구라미 하루를 옭매던 넥타이를 풀며 엄지와 검지 사이로 먹이를 뿌리네 열대어들이 아가미를 뻐금이며 몰려드네 그 남자 넥타이를 더 풀어 내리며 몸을 부딪치며 먹이를 쫒는 열대어를 바라보네 우우~ 구피 지브라 키싱구라미 그 남자 밤마다 몇 개의 지느러미를 달고 초록빛 수초 사이를 유영하네 우우~ 구피 지브라 키싱구라미 옆을 스치는 색색의 열대어와 무수히 접속되어지는 젊음의 열대야 우우~ 구피 지브라 키싱구라미 에어 펌프에서 공기 방울들이 쉬임없이 보글거리며 올라오네 수초와 기포 사이로 점점 멀어지는 미끈한 지느러미들
수족관 한 구석에 레드테일소드* 한 마리가 늘어져 있네 비늘 벗겨진 옆구리에 열대어 몇 마리가 주둥이를 들이밀어 물어뜯고 있네 우우~ 구피 지브라 키싱구라미 배를 뒤집는 그 열대어를 남자는 뜰채로 떠올리네 다 풀어헤친 붉은 넥타이를 침대 위에 던져 놓고 그 남자 흐느적대며 욕실로 들어가네 우우~ 구피 지브라 키싱구라미 그 남자의 등에도 지느러미가 있는지 욕실에서 퉁탕 퉁탕 물소리 들리네 우우~ 구피 지브라 키싱구라미
*레드테일소드; 열대어 한 종류로 몸은 붉고 칼 모양의 꼬리부분이 검다
출처, 시산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