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관련
박라연 '우주 돌아가셨다' 발랄한 상상력 번득
휘수 Hwisu
2006. 7. 5. 09:31
박라연 ‘우주 돌아가셨다’ 발랄한 상상력 번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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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6-06-21 18:30] |
여러 시인에게 ‘데뷔작=대표작’ ‘첫 시집=대표시집’인 경우가 많다. 시는 젊음의 장르라서 그럴까. ‘아무나’
잘 쓸 수 있는 첫 시집보다 훌륭한 다음번 시집을 내는 시인을 ‘훌륭한 시인’의 반열에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다섯번째 시집 ‘우주 돌아가셨다’(랜덤하우스중앙)를 펴낸 박라연 시인(55)은 어떨까. 그의 데뷔작이자 첫 시집 표제작인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가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1990년 이래 스스로를 갱신하는 ‘여성주의 시편들’을 써왔다는 평을 듣고 있다.
슬픔과 사랑을 소녀적이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읊던 그는 이번 시집에서 ‘죽음=또다른 삶’을 웅숭깊게 들여다보면서 신성(神聖)과 신생(新生)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유성호씨는 권말 ‘작품해설’에서 “박라연 시학이 좀더 근원을 지향하면서 어떤 ‘신성한 것’에 가 닿고자 하는 열망을 꾹꾹
눌러담은 결과”라면서 “시인이 아름답게 보여주는 자연·사물 속의 신성, 생과 사를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력, 사랑의 형식 등은 이번 시집에서
박라연 고유의 브랜드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수록작 ‘영산호(湖)’는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의 이정표인 듯하다.
“매 순간 태어나고 죽는/뗏장 묻을 시간도 문상의 시간도 없는/지상에서 가장 단명한 목숨인/물, 속에 어룽대는/얼굴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며/어이! 이 사람아!/오래 사는/몸값으로 죄조차 짓지 않는다면/어찌 산목숨이겠는가?//내 몸 위에서 반짝이는 저 햇살들은/대쪽같이
살겠다며 저를 분질러버린 이들이/세상 그리워/눈부시게 다시 한번 왔다/가는/혼불이라네/아무렴!”(‘영산호’ 전문)
이 원숙한 시인에게 이제 물은 천사이고, 햇살은 혼불로 보인다. 매순간 증발 또는 소멸하는 단명(短命)의 목숨들이 100년을 사는 인간을
측은한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저승에 간 원혼들의 안타까움마저 대신 표현해주는 영원의 메신저들이란 것을 발견한다. 물방울 하나가 산목숨들의 죄를
감싸안고, 햇살 한 알갱이가 위대한 망집을 지녔던 지사(志士)들의 영혼까지 끌어안는다. 물방울은 산 자의 거울이고, 혼불은 죽은 자의 환생인
것이다.
삶과 죽음에서 신성의 육즙이 배어나오는 것 같다. 시인이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개인사적 슬픔을 넘어서서, 죽음이 삶의 보편적 조건이라고
기꺼이 수용했다는 증좌로 읽힌다. 시인이 책머리에 “나의 부친께서는/내 몫의 술까지 마시고 떠나셨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의
‘自存’(자존)은 ‘自序’(자서)의 오타일 듯한데 ‘판타스틱한’ 중의어가 됐다.
〈김중식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