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박라연 시모음

휘수 Hwisu 2006. 7. 8. 01:07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시단에 등장했으며,

현재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시집으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과

산문집 『춤추는 남자, 시쓰는 여자』가 있다.  
 
다시 꿈꿀 수 있다면

 

다시 꿈꿀 수 있다면
개미 한 마리의 손톱으로 사천오백 날쯤
살아낸 백송, 뚫고 들어가 살아보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제 몸의 일부를 썩이는 일
제 혼의 일부를 베어내는 순간을 닮아보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향기가 악취되는 순간을 껴안는 일
다시 꿈꿀 수 있다면
제 것인 양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누군가의 슬픔을 소리낼 줄 아는 새가 되는 일
새가 되어 살면서
미처 못 간 길, 허공에 길을 내어주는 일
그 길을 또다시 잃어버리고도
개미 한 마리로 살아내게 하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새가 되어 살면서
축복은 神이 내리고
불운은 인간이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
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
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
을 꿰맨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
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흘려 깁고 있지
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
은뱅이 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
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 더욱

 

극락 가는 길

 

아무리
몸을 뒤져도 열쇠가 없다
영구암 극락전에 엎드려서
빛의 대양의 나무뿌리의 해탈
그 찰나를
가져가기 위해 피리 속에 감췄는데
숨 끊어지기 직전의 호흡까지 바쳐
불고 또 불었는데
무릎에 등에 심장에 그 소리 문신해두었는데
호주머니가 텅 비었다
다시 극락전에 이르러
그 피리 소리에서 뿌리가 돋아날 때까지
머문다 해도
극락전의 열쇠는 안 보일 것이다
열쇠는
만들어진 적 없으므로

 

-시집 <우주 돌아가셨다>(랜덤하우스중앙)에서

 


목백일홍 피는 자리

 

명옥헌, 배롱나무 군락지에는
그의 속내를 환하게 비춰내 생(生)의 악취를
경계하게 해주는
타인을 품을수록 꽉 찬 육체가 되는
이슬호수가 있어
장수할수록 서로 눈부실까
몇 섬의 이슬이 고이면 나무들은 꽃이 필까
이슬의 집을 꿈꾸다 고개를 들었을 때
두 개 이상의 쇠기둥을 의족 삼은 오장육부의 반 이상이 시멘트로 봉합된
배롱나무 오누이들
십자가에 못 박힌 형상인데도
호수 가득 제 심장을
분홍으로 펄떡이게 하고 있다
저렇게 아픈 자리가 피워낸 호수였구나!
성자가 아니면서
성자처럼 아프면서 꽃 피워내는 자리
그 자리에만 새겨야 할 밀서가 있다는 듯
한없이 부리를 찧고 있는
호반 새 한 마리

 

― ‘우주 돌아가셨다’(랜덤하우스중앙)에서


상처

 

그때 그 잎새
슬픔이 지나간 자리마다
숭숭 뚫리는 비릿한 구멍들
망각의 못 박을 일이다

 

그때 그 잎새에
꽁꽁 묶여 알몸으로 살 것 같은
내 영혼의 팔랑개비여 돌아라
바람 없는 날이라도 부디
가벼웁게 살 수 있도록


가을 화엄사에서

 

그리움에도 시절이 있어
나 홀로 여기 지나간다 누군가
떨어뜨린 부스럼 딱지들
밟히고 밟히어서 더욱 더디게 지나가는데
슬픈 풍경의 옛 스승을 만났다
스승도 나도 떨어뜨리고 싶은 것 있어 왔을 텐데
너무 무거워서 여기까지 찾아왔을 텐데
이렇게 저렇게 살아온 발바닥의 무늬
안 보이는 발그림자 무게를
내 다 알지 하면서 내려다보는 화엄사의
눈매 아래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무엇인가
탁탁, 탁탁, 탁탁
모질게 신발을 털며 가벼웁게 지나가려 해도
안 떨어지는 낙엽
화엄사의 낙엽은 무엇의 무게인가

 

시집 "생밤 까주는 사람" 중에서

 

목계리

 

가도 가도 산뿐이다가
겨우 몇 평의 감자밭 옥수수밭이 보이면
그 둘레의 산들이 먼저 우쭐거린다
제 몸을 가득 채운 것들을 신의 흔적이다,
라고 믿고 살지만
두 눈으로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사람의 흔적인 옥수수의 흔들림 감자꽃 향기는
왕산(王山)이 본 것 중 가장 귀한 것이다
가도 가도 산뿐이다가
차 파는 오두막집이 보인다
그 주인은 이미 산(山)의 일부이면서
바람의 일부일 것이다
적막 속 어딘가에 집 한 채만 보여도
왕산(王山)은 그 기(氣)를 바꾼다
수십만 평의 산을 거뜬히 먹여 살리는 것은
한 됫박쯤 될까 말까 한
몇 사람의 숨소리일 것이다

 

―시집 ‘우주 돌아가셨다’(랜덤하우스중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