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우 시모음
1959년 마산출생
1998년 현대시학에 '슬픈 가족사'외 4편으로 등단
계간 '시와 사상' 주간
박강우 소아과 의원 원장
<현대시학> 당선작 (1998년 11월호)
슬픈 가족사 외 4편
I 새장 안으로
그 여자는 꽃나무를 심는다
그 여자 앞을 카인이 지나가며
꽃나무를 꺾는다
꺾여진 꽃나무를 몸 안에 집어 넣고
그 여자는 새장을 만든다
카인은 돌아와
그 여자를 몸 안에 집어 넣고
새장을 계속 만든다
새장이 완성된 후에
카인은 그 여자를 끄집어내고
그 여자 안에서 자란 꽃나무는 몸 밖으로 나와
그 여자와 카인을 가지에 매달고
새장 안으로 들어간다
II 그녀의 자궁 속으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를
자궁의 문 안으로 밀어 넣고 걸어가면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그 여자의 방이 있고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그 남자의 방이 있고
그 여자의 방문이 열린 날
계단의 한가운데 발끝으로 서서
방안을 기웃거리며
내 이름은 푸른색 얼굴, 당신 이름은 무엇
그 남자의 방문이 열린 날
계단의 한가운데 앉아 방안을 기웃거리며
내 이름은 붉은 색 얼굴, 당신 이름은 무엇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방으로 들어가면
남자는 없고, 여자의 노랫소리만 들리고
나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계단을 콩, 콩 뛰어 다니고
그 여자가 그 남자의 방으로 들어가면
여자는 없고
남자의 발자국 소리만 들린다
III 아이들은 거꾸로 선 포도나무처럼 자란다
꽃씨를 공중에 심으면
공중에 매달려 꽃나무는 거꾸로 자란다
아이는 꽃나무에 매달려 "꽃이 지면 갈꺼야"
어른은 "공중에 핀 꽃은 지지 않는다, 그냥 가자"
매달린 아이의 팔이 뚝, 떨어지고
꽃나무에 매달린 팔은 가지가 된다
아이는 울고
어른은 웃는다
아이는 꽃나무가 되어 간다
맨발을 공중에 심고
머리에 꽃이 핀다
아이는 웃는다
"꽃나무는 붉은 하늘"
"붉은 하늘은 잠잔다"
"잠자는 건 나의 나무 침대"
웃는 아이에 매달려 어른이 운다
매달린 어른의 팔이 늘어나고
어른의 팔이 뚝, 떨어진다
IV 카인의 성(城)
굴뚝 위에서 마법사는 피리를 불고
몸 위로 쓰러질 것 같은 굴뚝 아래 엎드려
나의 노래는 물에 젖은 행진곡
손뼉치며 하나, 둘, 박자에 맞추어
마을 사람들이 모이고
눈을 감고 굴뚝 위로 사람들은 올라가고
눈을 뜨면 땅으로 떨어져
내 옆에 엎드려
내 꿈은 쓰러진 맨드라미
밟으며, 밟으며 사람들은 다시 모이고
굴뚝 위에서 팔을 펴고
성 밖으로 날아가며 사람들은 노래하고
눈을 뜨면 땅으로 떨어져
내 옆에 누워
나의 눈은 안보여
너의 눈은 보여
피리 소리를 따라 굴뚝은 커져가고
사람들은 굴뚝 위로 올라가 팔을 펴고
성 밖으로 날아간다
V 흔들리는 새장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새장은 허물어져 간다
아이는 새로운 새장을 만든다
아이는 꽃나무를 꺾어 몸 안에 넣고
새장 안으로 들어간다
몸 안의 꽃나무가 자라고
몸 밖으로 자라나온 가지가 창살을 움켜쥐고
새장을 흔든다
새장은 흔들릴수록 견고하다
달의 전설
달의 감옥은 지금도 떠오른다
드문드문 등불 켜진 채 어둠 속에 잠겨
감옥 밖에서는 한가로이 등불을 헤아린다
등불 하나, 나 하나
어둠 둘, 나 둘
아주 먼 옛날에는 달의 감옥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있었다 삶에 지친 사람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등불을 켜고 상처가 나을 때까지 며칠씩 있다가 내려오곤 했다 그런 날은 피고름 섞인 비가 내리고 지상의 등불들은 가물거리며 숨을 죽였다 더러는 영원히 내려오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사 다리를 오르는 사람이 없어지자 사다리는 잊혀져갔다 간혹 저녁뉴스 시간에 사다리를 보았다는 사람과 달의 감옥에 갔다 왔다는 사람의 소식이 방송되기도 하지만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은 달을 닮은 감옥을 가슴 속에 지니고 태어난다는 전설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아직도 한 달 에 한 번씩 모든 방에 불이 켜진다 내려오지 않은 사람들의 영혼이 일제히 등불을 밝히고 지상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일 거라고 신비주의자들은 말하지만 지상의 종말에 대한 경고라 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아무도 모른다 메시지가 아니라 단순한 자연현상이라고 과학자들은 믿고 있다
무심하게도
등불 하나, 나 하나
어둠 둘, 나 둘
한가로이 헤아리고 있다
유전자 공법
오늘도 만들어봐요
눈 부릅뜨고 다니는 사람의 길을 위해
지금의 보도블럭을 걷어내고
새로 설치할 신물질을 생각해봐요
겨드랑이 안쪽의 속살처럼
넘어져도 까르르 웃음이 나오는 감촉의 물질
밟으면 노래가 흘러나오는 물질
그런 신물질이 만들어지면
이제 태양에서 명왕성까지 다리를 놓아요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을 지나며
아직도 남아 있을
태양계의 염기배열이 순수하게 남아 있을
잠든 아이의 속눈썹에서 DNA를 추출해요
꼭 필요한 사랑이라는
우주의 미량원소도 모두 모아요
열성 인자인 달도 포함시켜요
기쁨과 슬픔이 맞물릴 때
우수한 형질의 RNA가 만들어지는
잡종 강세의 법칙을 아시죠
명왕성에 도달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요
첫날 아침에 힘차게 맞물린 염기배열이
빛나는 DNA를 만들고
DNA는 윤기 있는 RNA를 만들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나의 형제들과 나를 낳고
미래의 내 아들을 낳고......
서바이블 게임
그녀의 흰 살을 열고 들어가서
남자 A는 남자 B를 향해 폭탄을 던지고
남자 B는 폭탄을 안고 터지며
펑, 펑 웃는다
"눈이 없어졌다" 펑
"귀도 없어졌다" 펑
눈 감고 귀 막고 펑, 펑 던지면
남자 A가 지워진다
그녀의 흰 살 속에 박혀
"터진다, 터진다"
남자 C는 남자 D를 향해 별을 던지고
남자 D는 별을 안고 빛나며
"별이 되어 지고 있다"
"그녀의 흰 살 속으로 지고 있다"
남자 D는 그녀의 흰 살을 남자 C에게 던지고
남자 C는 그녀의 흰 살을 품에 안고
흰 살이 되어가며
"박혀 있는 별들이 터진다"
"별들이 터지며 웃는다"
남자 A가, 남자 B가, 남자 C가, 남자 D가 웃는다
그녀는 웃지 않는다
펑, 펑 터지며 말 없이 서 있다
나무에 못 박힌 겨울
나무에 못 박힌 겨울을 보았다
그 나무 아래를 지날 때
그 겨울은 나에게로 떨어졌고
나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달렸다
첫 번째 외나무다리를 건너와
쫓아오던 사람들이 그 겨울을 밝고 지나갔고
나는 끝까지 비명을 참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첫 번째 집 앞에서 나는 기다렸다
그 겨울을 깔고 앉아
지나온 외나무다리를 생각했다
다리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들이
다리 위에 푸르게 빛나는 집을 짓고
다리를 건너는 사람을 집 속에 집어넣고
부수고 다시 짓고
부서진 집에서 푸른 뇌수액이 나와
살아남은 사람들의 집으로 흘러갔다
첫 번째 다리를 부수고 돌아왔을 때
사람들의 집이 무너지고
무너진 곳마다 외나무다리가 생겼다
두 번째 다리를 부수고 돌아온 사람들은
이슬 내린 거리에서 백 년 동안 잠을 자고
이른 새벽 죽은 사람들의 두개골을 안고
세 번째 다리를 부수러 떠났다
안개가 걷히면 외나무다리는 다시 생겼고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모자를 뒤집어 쓰고 다시 달린다
두 번째 집을 향해
첫 번째 다리와 두 번째 다리와
세 번째 다리를 건너
긴 비명 속을 끝까지 달린다
<당선소감>
화창하게 맑은 가을의 어느 휴일, 소녀는 응급실로 실려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나에게 안겼다. 숨을 쉴 때 마다 쑥, 쑥 들어가던 가냘픈 가슴과 푸른 입술, 수차례 반복한 응급치료에도 소녀는 계속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입술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소녀를 중환자실로 옮겨 놓고, 혼자서 이 작은 생명을 구해내야 하는 과제를 풀기 위해 의학서적을 쌓아 놓고, 증례보고를 뒤져가며 나의 입술은 바싹 타들어 갔다. 호흡부전에 빠지기 바로 직전, 절대절명의 순간! 내가 내뱉는 말들이 바쁘게 뛰어 다니기 시작했다.
"간호사, 마취과에 연락하여 인공 호흡기를 달 준비하시고, EKG(심전도)모니터링 하시고, 아이소프로테네롤(기관지확장제)을 인젝션 펌프(정밀용량 점적을 위한 기구)로 줍시다"
일주일 후 인공호흡기를 떼고 깨어난 소녀의 웃음이 그 동안 소녀의 옆에서 밤을 새워 지친 나의 어깨를 살짝 떠밀었다 오늘 아침 의식불명의 아이가 중환자실로 입원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지금 중환자실 문 앞에서 또 한 번 혼자서 풀어내야 할 과제를 생각하며, 뜬 눈으로 지새워야 할 밤을 생각하며 가슴을 짓누르는 중압감으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다 이 중압감을 견딜 수 없어 중환자실 문 앞에서 돌아서기를 서너번, 오늘 아침은 힘차게 문을 밀고 들어간다. 누워 있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깨어나 웃음을 보여 줄 것인지, 영원히 웃음을 간직한 채 잠들어 버릴지, 아이에게 다가가며 상념에 잠긴다. 오늘 밤에는 폭우라도 쏟아졌으면 좋겠다 아이의 소중한 생명만을 생각할 수 있도록, 나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잡념들을 씻어 갔으면 한다
<심사평>
슬픈가족사 외 4편의 시들은 초현실적인 환상의 공간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환상의 공간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못 도착적인 상황들의 돌발성은 애매하지가 않다. <붉은 하늘은 잠잔다"/"잠자는 건 나의 침대"/웃는 아이에 매달려 어른이 운다>(슬픈 가족사)에서 우리는 지시적 관념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느낀다. 그게 환상의 세계가 지니는 본질이며 미학이다. 혹은 <힘>이다. 인간상실의 문명오염이 끌고 가는 극단의 상황에 대한 도덕적 우려보다는 작품으로서의 탄력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천착을 또 다른 <힘>으로 보았다. 자칫 유희적인 비약이 시를 가볍게 할 위험성이 있었다.
(심사위원: 정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