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문인수 시모음 2

휘수 Hwisu 2008. 4. 20. 12:01

뻐꾸기 소리 

 

 

  곤충채집 할 때였다./ 물잠자리, 길앞잡이가 길을 내는 것이었다. / 그 길에 취해 가면 오 리 길 안쪽에 내 하나 고개 하나 있다. /고개 아래 뻐꾹뻐꾹 마을이 나온다. / 그렇게 어느 날 장갓마을까지 간 적이 있다./ 장갓마을엔 누님이 날 업어 키운 큰 누님 시집살이 하고 있었는데 / 삶은 강냉이랑 실컷 얻어먹고 집에 와서 으시대며 마구 자랑했다./ 전화도 없던 시절, /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느그 누부야 눈에 눈물 빼러 갔더냐며 / 어머니한테 몽당빗자루로 맞았다. / 다시는 그런 길 그리움이 내는 길 가보지 못했다.*

 

 (이 행간엔 자꾸 소리가 난다)

 

 2006년 1월 12일 뻐꾹뻐꾹뻐꾹……큰누님 저 세상 갔다.

 향년 76세, 삼일장 치른 뒤 우리 남매 어머니한테 갔다.

 활짝 반기면서 어머니는 대뜸,

 하필 내게 물었다.

 “느그 큰누부는 안 오나……?” (약속대로 우리는) 나는, 딴청을 피며 어물쩍 넘겼다. 어물적 넘겼으나 어머니. 오늘은 날 패지도 않는다. 뻐꾹뻐꾹

 지금은 서울 작은 형네 아파트엔 물론 몽당빗자루도 없고

 연세 아흔 여섯, 어머니는 요즘 뭐든 대강 잘 넘어간다.

 그런다음 …… 그다음, 그다음에 가 뵈어도 어머니,

 “ 나,왜 이리 오래 사노!” 당신을 직접 때리는 것인지 큰누님 안부, 다시는 한번도 잠잠 묻지않는다. 뻐꾹……

 

 *졸시 <눈물> 전문

 

 

책임을 다하다

 

 은행나무 가로수 한 그루가 죽었다. 죽는 데

 꼬박 삼년이나 걸렸다. 삼년 전 봄에

 집 앞 소방도로를 넓힐 때 포크레인으로 마구 찍어 옮겨심을 때

 밑둥치 두 뼘가량 뼈가 드러나는 손상을 입었다. 테를 두른 듯이 한 바퀴 껍질이 벗겨져버린 것,

 나무는 한 발짝 너머 사막으로 갔다.

 

 이 나무가 당연히 당년에 죽을 줄 알았다. 그러나

 삼년째, 또 싹이 텄다. 이런, 싹 트자마자 약식절차라도 밟았는지 서둘러 열매부터 맺었다. 멀쩡한 이웃 나무들보다 먼저

 가지가 안 보일 정도로 바글바글 여물었다. 오히려 끔찍하다, 끔찍하다 싶더니 이윽고

 곤한, 작은 이파리들 다 말라붙어버렸다. 나는

 나무의 죽음을 보면서 차라리 안도하였으나,

 마른 가지 위 이 오종종 가련한 것들

 그만, 놓아라! 놓아라! 놓아라! 소리 지를 수 없다. 꿈에도 들어본 적 없는 비명,

 나는 은행나무의 말을 한마다도 모른다.

 

 

배꼽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전에 없던 길 한 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 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뒤란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는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붕 위 조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 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대숲 


  시퍼렇게 털 세운 대숲 한 덩어리가 크다

  저 어슬렁거리는 풍경은 사실 전국 어디에나 붙박인 유적 같은 것이다, 그들은 왜 마을 뒤, 산 아래에다 대숲 우거지게 했을까.

  대숲 속은 아직 덜 마른 암흑이 축축하다

 꽉 다문 입, 마음의 그 깜깜한 짐승을 풀어 놓았을까. 날 풀어 놓고 싶어하는 비밀이 지금 사방 눈앞에, 귀에 자자하다. 댓잎 자잘한 동작들이 소리들이 그렇듯 무수한 것인데, 울부짖음이란 본디 제 것이어서 잘디잘게 씹히거나 또 한때 새까맣게 끓어오르는 것.

  마을 뒷산 아래, 너무 깊이 뿌리 내려 떠나지 못하는 바람의 몸, 바람의 성대가

 하늘 쪽으로 몰려 쏟아지는 광경이 폭포 같다.

 무너미 무너미 시퍼렇게 넘어가곤 한다.

 

비닐봉지

 

차들이 비닐봉지 하나를 연신 치고

달아난다. 비닐봉지는 힘없이 떳다 가라앉다 하면서

찢어질듯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지만 도통

소리가 없다. 연속으로 들이닥치는 무서운 속력 앞에, 뒤에, 두둥실

웬 허공이 저리 너그러운지.

 

누군가의 발목에서 떨어져 나온 그림자, 그늘인 것 같다. 과거지사는 더이상 다치지 않는다. 이제

적의 멱살도 박치기도 없는 춤,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또 잔뜩

바람을 삼킨다. 대단한 소화능력이다. 시장통,

거리의 밥통이다. 금세 홀쭉하다.

 

시집 <배꼽> 2008. 창비

 

1945년 경북 성주

1985년 <심상> 신인상

1996년 제14회 대구문학상

2000년 제11회 김달진문학상

2003 제3회 노작문학상을 수상

시집 <늪이 늪에 젖듯이>(심상. 1986)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문학아카데미, 1990)

<뿔>(민음사, 1992) <홰치는 산>(만인사, 1999), <동강의 높은 새>(세계사, 2000)

<쉬>(2006년 문학동네) <배꼽> (2008. 창비)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