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수 시모음
1945년 경북 성주군 초전면 출생
1966년 동국대 국문과 중퇴
1985년 심상신인상에 「능수버들」외 4편이 당선
1986년 시집 『늪이 늪에 젖듯이』심상사
1990년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문학아카데미
1992년 『뿔』민음사
1996년 제14회 대구문학상 수상.
1999년 네 번째 시집 『홰치는 산』만인사
2000년 김달진문학상 수상
2003년 노상문학상 수상 ‘달북’
함벽루
낙숫물이 직접 강물로 떨어지는 누각이 있다.
경남의 합천 황강 기슭에
땅 밟지 않은 비,
그래도 비,
비,
온 적 간 적 없는 근본 슬픔이 세상엔 있다
꼭지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생(生)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그늘에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 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처럼 떨어져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현대문학, 2004년 7월
각축
어미와 새끼 염소 세 마리가 장날 나왔습니다.
따로 따로 팔려갈지도 모를 일이지요. 젖을
뗀 것 같은 어미는 말뚝에 묶여 있고
새까맣게 어린 새끼들은 아직 어미 반경 안에서만
놉니다.
2월, 상사화 잎싹만 한 뿔을 맞대며 톡, 탁,
골 대리며 풀리그로
끊임없는 티격태격입니다. 저러면 참, 나중 나중에라도
서로 잘 알아볼 수 있겠네요.
지금, 세밀하고도 야무진 각인 중에 있습니다.
빗소리는 길다
저 긴 빗소리 창을 열고 들어오지 못한다
저 슬피 어둠 속에서 떠돌고 있는 것들이
기억하노니 내 청춘 아닌 것들 없으나
더는 젖지 않겠다.
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힘껏 누워 있다.
이 긴 빗소리 밤새도록 다 풀려 나간다.
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문학의 전당
바다 가는 길
바닷가 화진 휴게소에선 바다 가는 길이 막힌다.
지역 특산품점 앞엔 전시용 간이 덕장이 있고, 여러 줄
과메기 꽁치 떼가 무슨 두루마리 사연처럼
복잡한 철자처럼
꼬부랑 빽빽하게 널려 꾸득꾸득 물기 빠지고 있다. 매점과
화장실 건물 사이엔 지금
직사각형의 바다가 꽉 차 솟을대문 같다. 그러니까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바다인 셈인데 웃기는 것은, 두
건물 사이
그 좁은 통로 초입 매점 쪽 벽 상단에
새파란 페인트 글씨로 '바다 가는 길'이라 써놓고 같은 색
깔로
화살표 하나를 꼬부려 그려놓은 것. 하긴, 뾰족한 주둥이
가 그대로
바닷물에 꽂힐 듯 목마르다. 파닥, 파닥거리다 더는 못 간
다, 가지 못한다.
동해안 먼 길 바다 직전, 그리움이 내주는 길은 거기까지
다. 곶에, 목젖에 건들리며 펄럭이는 저 암흑
너무 크다. 너라는 비현실,
굳게 빗장 질린 데까지 가서 잔뜩 몸 웅크릴 것,
수음하며 수음하며 문장이여 말라붙어야 한다.
시집, 쉬!
낡은 피아노의 봄밤
누가 이 피아노를 한 번 힘껏 눌렀겠다.
아이들이 자라 스무 살이 훨씬 넘는 동안 또 몇 년
뚜껑 한 번 열린 적 없을 것이다. 피아노 속은 지금
콩나물 대가리가 다시 수북하게 자란 저녁일까 언제나
거실 한 쪽 벽면을 차지한 채 저도 헌 집, 무겁게 내려앉은 피아노는
컴컴한 벽돌 조 양옥 같다. 문턱처럼 걸리거나
저녁노을처럼 걸리는 감정들은 뜰에, 저 서너 개
큰 독에다 묻었겠다. 잘 삭혔을까 어두워진 것처럼 꽉 다문 입,
속은 구린내 나겠지만
흉금이란 그러나 노후에도, 노후해도 썩지 않고 영롱하게 글썽이는 것,
반짝 반짝 올라가 하염없이 공중에 쌓인 소리,
뚜껑 밤하늘엔 별 총총 수심도 많겠다. 명멸, 명멸, 명멸,
사소하게 일일이 다 접으며 또 그렇게
겨울 보냈으리 기나 긴 눈보라 주먹만한 눈발,
파아노는 폭설 창고일까 기쁨이거나 슬픔,
저 목련 폭발 환한 야음이다. 야반도주처럼 훨 훨,
봄날은 또 사정없이 날 새누나. 두 팔 벌려 무너지듯
누가 이 피아노를 한 번 힘껏 눌렀겠다.
기차가 몰고 온 골목
- 인도 소풍
인도 대륙을 기차로 이동하는 동안은 지루합니다. 잠깨고
보니 기차가 또 서 있는 중이었고,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무
슨 일 때문인지 이번엔 아무런 역도 아닌 인적 드문 어느 농
촌 들녘 같았습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탄 기차와 나란히, 그
러나 교행하는 다른 기차가 또 한 줄 건너편에 서 있었고요,
초라한 행색의 사람들이 쏟아질 듯 모두 이쪽을 건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양쪽 기차에서 우르르 쏟아져내린 잡상인
들이 이리저리 뛰며 뭐라 외쳐댑니다. 여럿이 까치발 들며
바구니에 담긴 것, 손에 든 것들을 차창에 갖다대며 흔들
며 갑자기 되게 북적댑니다. 기차가 다시 움직였는데요, 하지
만 이렇다 할 추억이 없으니 만나고 헤어지는 일 또한 어떤
죄도 아니었고요, 그 사람들은 외국인인 우리 일행들한테 특
히 많은 호기심을 보였는데요, 서로가 참 제 나랏말로 손 흔
들거나 웃거나 하면서 작별하면서 다만 저릿하게, 한줄기 길
게 통하는 것, 그걸 잠시 내다보았습니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도착한 기차와 기차 사이, 기차가 몰
고 온 기나긴 골목 하나가 꿈틀, 장터거리처럼 문득 거기 생
겨났고요, 그 끝이 한바탕 일출중이었습니다. 몇백 년, 몇천
년에 걸쳐 몰고 온 것일까요, 낡은, 오랜 그 골목에서 우리,
한때, 한세상 와글거린 적 있습니다.
시집, 쉬!
낮달이 중얼거렸다
이 슬픔 중에 낮달이 보인다.
저, 뭐라 중얼거린 것 같은데
달구질 소리에 묻힌다.
다시 찾으려 하니 정작 잘 보이지 않는다.
산 아래, 대낮은 여러 갈래 길이 훤한데
더 여러 갈래 마음이 어둡다.
구름 옆이었을까,
소나무 꼭대기 짬을 뒤져보니 거기 있다.
낮달은 내처 간다. 분명,
인생에 대한 그 무슨 대답인 것 같은데
하늘엔 아무런 지형지물이 없으니
저 어렴풋한 말씀을
한 자리에 오래 걸어두지 못하겠다.
또, 달구질 소리에 묻힌다.
시집, 쉬!
드라이플라워
마음 옮긴 애인은 빛깔만 남긴다
말린 장미·안개꽃 한 바구니가 전화기 옆에
놓여 있다. 오래,
기별 없다. 너는 이제 내게 젖지 않아서
손 뻗어 건드리면 버스러지는 허물, 먼지 같은 시간들.
가고 없는 향기가 자욱하게 눈앞을 가릴 때
찔린다. 이 뽀족한 가시는
딱딱하게 굳은 독한 상처이거나 먼 길 소실점,
그 끝이어서 문득, 문득 찔린다.
이것이 너 떠난 발자국 소리이다.
빗소리 모아 듣다
아무도 안 오고 저, 빗소리 모아 듣다.
커다란 목련 나무에 이제 여나문 개째 꽃망울 툭, 터지는가
운문사 내원암 이 사발 속 같은 골짜기,
산빛 흐릿흐릿 잠긴다.
대숲 또한 묵직하게 시꺼멓게 잠긴다.
두루 다 잠가놓고
끙, 절 들어가 앉는 거 느껴진다.
저 목련,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핀다고?
아니다, 자꾸 흰 돌멩이 하나 올려놓듯 등 달 듯 그렇게
몇억 겁게 한 송이씩 꽃피는 것 같은 봄날,
나도 저 빗소리 모아 오래 탑 쌓고 있다.
쉬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시집, 쉬!
창포
창포를 보았다.
우포늪에 가서 창포를 보았다.
창포는 이제 멸종 단계에 있다고 누가 말했다.
그 말을 슬쩍 못들은 척 하며
풀들 사이에서 창포가 내다본다
저 혼자 새초롱하게 내다보고 있다.
노리실댁/소래네/닥실네/봉산댁/새촌네/분네/개야미
느미/꼭지/뒷모댁/부리티네/내동댁/흠실네/모금골댁/
소득골네/갈 잿댁 우거진 한쪽에 들병이란 여자도
구경하고 있다.
단오날 그네 맨 냇가 숲에서
여자들, 수근대며 눈 흘기며 삐죽거린다.
그 여자,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만
멀리 가 버린다 창포
긴 허리가 아름답다.
채와 북사이, 동백진다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 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 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달빛동화
달은 언제나 우리들보다 몇 살 더 많았다.
달이 앞장 서 갔다.
아이들 여럿이 하고 함께 갔다.
별을 헤면서 갔다.
얼마나 많이들 헤아려 담았을까
긴 둑길을 너무 멀리 올라가 있었고
불현듯 무서웠다.
누가, 귀신 온다! 소리치며 뛰었다 다들 뛰었다.
먼 갈갯마을 개 짓는 소리들이 뒤꿈치를 물 듯 물 듯 따라왔다.
문을 쾅 닫고 문구멍으로 내다봤다.
벌쭘 열린 삽짝 밖으로 빙긋이
달이 나가고 있었다.
달에게 주먹감자를 먹이고 싶었지만 못했다.
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문학의전당 2006
새떼
저녁노을 속으로 깡통 소리 날아간다.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논두렁논두렁 휘어지게 달리며 논물에 빠지며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후우여 후여 쫓으면 새떼는 여러 번 날아 오른다 한 삽 퍼 던진 자갈돌들처럼 한꺼번에 새까맣게 요란하게 날아오른다 휘영청 헌 보자기 내려 덮이듯 논빼미 저쪽 끄트머리로 다시 가 내려 앉는다 쥑이뿔고 싶도록 얄밉게 또 내려 앉는다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논두렁논두렁 휘어지게 달리며 땡볕에 악 받히며 종아리 긁히며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후우여 후여 쫓으면 지친다 어느덧 거물거물 해 늘어지고 마지막으로 두어 바퀴 휘이 나락논을 돌아 서천 붉은 구름 속으로 팍팍팍팍팍 꽂히는 새떼 자욱하게 스민
노을의 측백나무 울타리 속으로 씻은 듯이
나도 집에 돌아가곤 했다.
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2006년 문학의전당
달북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원이다.
빨래궁전
-인도소풍
아므나 강변 작은 촌락 한 움막집에, 그 집 빨랫줄 위로 옛날
옛적 사랑 많이 받은 왕비의 화려한 무덤, 타즈마할 궁전이 원경
으로 보입니다. 궁의 둥근 지붕이 거대한 비눗방울처럼, 분홍 엷
은 나비처럼 아련하게 사뿐 얹혀 있고요 빨래가, 원색의 낡고 초
라한 옷가지들이 젖어 축 처진 채 널려 있습니다.
족보에도 없는, 이 무슨 경계일까요. 오색 대리석으로 지어졌
으나 죽음은 그 어떤 역사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이 가볍고 가
벼워서 짐이 없는데요. 삶이란 또 몇 벌의 누더기에도 당장 저토
록 고단하고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때,
어린 새댁이 하얗게 웃으며 얼른 움막 속으로 숨어버렸는데요.
개뚱밭에 굴러도 역시 이승에 땡깁니다. 오래 내 마음을 끄는 그
녀의 남루한 빨래궁전 쪽, 저 검고 깊은 눈이 전적으로 아름답습
니다.
벽화
벽에, 시멘트 반죽을 바르는 조용한 사내가 있다.
벽이 꽤 넓어서 종일 걸리겠다. 사내의 전신이,
전심전력이 지금 오른손에 몰려 있다. 입 꽉 다문 사내의 깊은속엔
저런 노하우가 두루마리처럼 길게 감겨 있는 것이겠다.
흙손을 움직일 때마다 굵직한 선이
쟁깃날을 물고 깨어나는 싱싱한 밭고랑처럼
제 길 따라 시퍼렇게 풀려 나온다. 뭘 그리는 것인지,
일생을 기울여온 사내의 집중이 확산일로에 있다. 막막한
여백이 조금씩 움찔, 움찔, 물러난다.
작업복 등짝을 적시는 땀처럼
벽에 번지는, 벽을 먹어 들어가는 사내가 있다.
벽을 지우는, 혁신하는 사내가 있다.
벽에, 벽을 그리는 사내가 있다.
벽에, 다시 꽉 찬 벽에
비계를 내려오는 사내의 고단한 그림자가 길게 그려졌다. 천천히
미끄러진다. 벽에 떠밀리는 사내가 있다. (창에,
석양의 길 건너편 장면이 그대로 액자 속에 담긴다.)
벽에, 마감재 같은 사내의 어둠이 서서히 발리고 있다
꼭지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생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그늘에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 가랴
주전자 꼭다리처럼 떨어져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동강에서 울다
동강은 대뜸 말문을 막는다.
어이없다, 참 여러 굽이 말문을 막는다.
가슴 한복판을 뻐개며 비스듬히 빠져나가는
저기 내려 꽃피고 싶은 기슭이 너무 많다.
몸이 먼 곳,
인생이 저렇듯 아름다울 수 있었겠으나
어떤 죄가 모르고 자꾸 버렸으리라.
늙은 사내는 엎드려 산 첩첩 울고
물길은 산에 막히지 않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