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문세정 시모음 / 다블, 철기시대(펌)

휘수 Hwisu 2006. 5. 13. 00:29

 

2005년 시인세계 신인상

경기도 대부 출생. 경기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예수를 리메이크하다 
 

그는 늘 트로트 찬송가를 부르며 나타난다
목에 걸린 소형 녹음기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지하철 4호선 구간을 뱅뱅 돈다
칸칸마다 음표처럼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하루 종일 연속 재생되는 그의 노래
언젠가, 눈앞이 온통 암흑으로 변하고
자기도 모르게 목울대가 약해지고부터
그의 찬송가는 트로트 버전이 되었다
<샤론의 꽃 예수><샤론의 꽃 예수>를 4분의 4박자로 꺾었고
흥겨운 대목에선 바이브레이션을 넣기도 했다
한 소절 한 소절 깜깜한 세상을 귀로 읽으며
새 음표를 붙이고 장조를 바꾸다 보면
아주 가끔씩 바구니 속으로 떨어지는
동전소리도 그의 귀엔 취타악기음으로 들렸다
퇴근길 풀죽은 몸들을 싣고
지루한 음보로 달리고 있는 객차 안
아주 느린 몸동작으로 악보를 넘기듯
다음 칸을 향해 그가 나를 지나쳐 가고
중간 중간 박자를 놓친
지하철이 황급히 허리를 틀며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불심검문을 받다

 

그를 면회하고 돌아 나오는 밤길
안양교도소 담장은 한층 높고 튼튼해져 있었다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라포르스 성벽처럼
높이 솟아오른 공중탑과 지상 곳곳에서
완전무장을 한 눈들이 바람의 움직임까지 감시한다
감시의 눈길은 어느새 내 걸음걸이를 고치게 만들고
공연히 주위를 살피게 하고 폭풍 전야처럼
제 스스로 내부 단속에 들게 한다 교도소 안에서만큼은
바람조차도 말수를 줄이고 차분해져야 한다는 걸
순순히 몸을 낮춰야 한다는 걸 이미 터득한 것일까
한 걸음 한 걸음 어둠을 가두어 나가는 담장 아래

지금까지 용케도 법망을 피해가며 살아온 나를,
매순간 알게 모르게 불안했던
내 행적을 담장 가로등이 또박또박 조명한다
거리를 좁히며 더욱 끈질기게 따라붙는
불빛레이더, 습관처럼 외투깃을 세우며 위장해보지만
오늘따라 분명하고도 마땅한 알리바이가 떠오르지 않아
자꾸만 시선이 흔들리는 저녁

정작 감시와 단속이 필요한 곳은
적막에 든 교도소 안쪽이 아니라
바로 내가 서 있는 이곳,
시끌시끌한 담장 바깥쪽이다

 

 

내 마음의 연약지반구역
 

 서해포구 월곶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처럼 내 마음에도 무르고 약한 땅
이 있습니다 심장을 중심으로 반경 5cm 지점은 언제나 진흙입자들로 덮
여 있어 무게를 버티는 힘이 매우 약하답니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슬픔
이 그 지점을 통과할 때엔 강도 3.0 이상의 지진이 일어 정신을 잃을 만
큼 전신이 흔들리기도 하고요, 한 번 내려앉은 지반을 복구하는 데는 상
당한 시간이 걸린답니다 네, 그럼요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죠 자칫
하면 당신이나 나나 대책 없이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 나
를 통과하려거든 먼저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마음속도계를 조절해가
며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해요 물이 흐르는 대로 순순히 몸을 내맡
기는 나뭇잎처럼 당신과 나의 숨결이 맞닿아야 해요 그 순간만큼은 지
나간다는 생각조차 내려놓은 채 한 호흡으로 지나가야 하는 내 마음의
습지, 그대가 무심히 던진 말 한 마디에도 쉽게 무너져 내리는

 

 


조직사회에서 살아남는 법

차도와 인도 경계에서
화백나무군단이 스크럼을 짜고 있다
줄자를 대고 자른 듯
잔가지와 잎으로 그물망을 치고
길게 도열해 있는 초록 사병들
철저히 방어벽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로 키를 맞추고 한 몸이 돼야 한다
혼자 앞서거나 대열 밖을 기웃거리다가는
예외 없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방금 전에도 한 차례 단속이 지나갔다
봐라, 길바닥에 뒹구는 저 어린 순과 가지들을
뒹굴면서 아직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
잎들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 대열 밖으로
잠깐 고개를 내밀거나 팔을 뻗치다가
느닷없이 날아온 엔진톱날에 뎅겅뎅겅 잘려나간
한낮의 비극,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엄격한 집단에 들면 들수록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것을
함부로 나서지 말고,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운 것들은 때로 중심을 잃게 만든다

한낮의 고요 속
탕, 하고 총성이 울리자
메아리처럼 숲에서 새들 날아오르고
푸드득 푸드득 헛날개짓하다
멀리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환영, 눈으로만 따라가다
사랑이 날아간 쪽으로
자기도 모르게 기울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