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해 시모음 1
1963년 경북 문경 출생
영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199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05년 시집 <자라> 창비
민달팽이들
지하 사우나 앞을 지나는데
환풍기에서 훅 끼쳐 나오는 열기, 살 냄새들
지금 내가 밟고 선 깊고 깊은 땅 속 나라에
벌거숭이들이 버글 버글하다는 상상을 해 본다
헬스에서 PC방에서 식당까지
그곳에는 없는 게 없다
아침부터 한 밤까지 내처 사는 여편네들도 있다
지상은 이제 피곤한 싸움터일 뿐,
그곳은
수술자국 남겨진 아랫배를 다 드러내어도
부끄럽지 않은 해방 터가 된지 오래,
들어갔다 나오는 얼굴들이 다 하얗다
눈부신 나자로의 얼굴도 저랬을까
죽음 이후가 제발 그렇다면
먼저 가신 부모 형제들과
아기 때처럼 발가벗고 앉아
오로지 득도에만 골몰한
민달팽이로 모여 사는 것도 행복한 일
오늘 무언가를 잊고 싶다면
지하 사우나로 가 보라
그곳 환풍기에서 올라오는 훈김만으로도
한 겨울에
라일락이 저리 만개한
환생
만발한 진달래 곁을 걸어가는데
누군가인지 목구멍에 쇠가 걸린 소리가 난다
돌아보니 고양이 한 마리가 짓이겨진 앞다리 하나를 덜렁거리며 따라오고 있다
뭉툭한 허벅지가 피범벅이다
온몸의 털이란 털이 다 곤두서서 이쪽을 보길래
동물 보호소에 알릴 생각은 못하고
넌 꽃이 피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꽃이 피려고 이리 새된 시련이 다가온 것이니
온몸의 신경이 푸들푸들 떨리면서 아찔하게 맞는 꽃이란
일생 단 한번이면 족한 것이라고
꽃이 피고 나면
밖이었던 세상은 안이 되고 봉오리 안은 밖이 되듯
너는 또 한번 다리 저는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는 거라고
어쩌면 저 꽃들도 잔뜩 피 흘린 뒤였을 거다
면도칼로 가지를 찢고 나온 혈소판들은
나오자마자 응고되어 꽃잎이 되었던 것
그 맘으로 환하게 상처가 지나간 진달래들이 붉게 웃고 있고 지금쯤,
너도 잘린 허벅지 끝에 짓이겨진 꽃들을 태평스레 핥고 있을 거다
능소화
담장이건 죽은 나무건 가리지 않고 머리를 올리고야 만다
목 아래가 다 잘린 돼지머리도 처음에는 저처럼 힘줄이 너덜거렸을 터
한번도 아랫도리로 서 본 적 없는 꽃들이
죽은 측백나무에 덩그랗게 머리가 얹혀 웃고 있다
머나먼 남쪽 어느 유곽에서도
어제 밤 그 집의 반신불수 딸이 머리를 얹었다고 한다
그 집의 주인여자는 측백나무처럼 일 없이 늙어가던 사내 등에
패물이며 논마지기며 울긋불긋한 딸의 옷가지들을 바리바리 짊어 보냈다고 한다
어디 가서도 잘 살아야 한다
우둘투둘한 늑골이 어느새 고사목이 되어도
해마다 여름이면 발갛게 달거리를 올리는 꽃이 있다
열린시학 (2007년 봄호)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