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혈(動血)함의 존재론, 김영승의 시 / 정과리
동혈(動血)함의 존재론
―
김영승의 시
모든 것으로부터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이 발각당한 자가 있다. 시시각각으로. 세세년년. 발각당함은 급격하고 항구적이다. 발각은 영구 동력의 운동이다. 바깥의 사물들, 풍경들, 햇빛, 사람들, 시선은 모두 ‘강풍’으로 돌변하여 몰아친다. 그 강풍에 노출된 자는 “헥헥/연 날리기를 당하고/찢어 발겨진 채/여자같이/알몸으로――”(「나무 세 그루」) 난행당한다. 그 세상에서는 “그저 곁에 함께 있는” 것조차 “그 자체가 가공할만한 불안,//긴장,초조,폭력”(「‘있음’에 대한 참회」)이다.
우리는 김영승 시의 도처에서 세상에 완전히 발각당한 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발각당했을 때, 이 힘없는 자는 완벽히 망가진다.
그 말이 옳다 소위 ‘가난’
하지 않았다면 우리 사이에
무슨 싸울 일이 있겠느냐 치욕에 치욕에
또 치욕
나도 치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다 그 스트레스는
나를 쭈글쭈글 오그려뜨렸다
난롯불에 오그라진
플라스틱 그릇처럼
― 「인생」 부분
‘나’는 가난해서 망가지고 그 가난으로 인한 자해(부부 싸움) 때문에 더 망가지고 그것을 치욕으로 느끼는 자의식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여 더 망가진다. 난롯불에 오그라든 플라스틱 그릇처럼. 이 ‘나’의 삶은 완벽한 당함의 삶,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서의 ‘수동성(受動性)’의 삶이다. 이 완벽한 수동성은 모든 지점에서 모든 때에 모든 면에서 그대로 기술된다. 왜냐하면 시인의 언어 역시 그것을 ‘가릴 수 있는’ 언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언어 또한 세상에 완전히 발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김영승의 시는 오늘날까지의 한국시에 존재한 가장 동혈(動血)한 시로서 평가될 만하다. 모든 것을, 그러니까 생활을, 생활고를, 가정사를, 베갯머리송사는 없을지라도 이불 속 이야기를, 희노애락의 감정을, 가장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바로 그 순간에, 그 장소에서 표출하는 시가 그의 시인 것이다. 좀 더 현학적으로 말해, 이러한 순수한 정서의 ‘토로’로서의 언어는 플라톤이 ‘디에제시스diègèsis’라고 명명한 것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ꡔ일리아드ꡕ의 초두에서 크리세스Chrysès가 아가멤논Agamemnon에게 한 청원을 예로 들면서, “매 순간 표출되는 말들을 말할 때, 그리고 그 말들이 발성된 순간들 사이에 일어난 일을 말할 때, 그것을 ‘토로diègèsis; exposition’”1)라고 지칭하고, 사건들의 재현으로서의 모방(mimèsis)2)과 구별하였다. 이것은 이후 서양의 장르사에서 실종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미메시스에 중점을 둔 아리스토텔레스의 ꡔ시학ꡕ이 ‘토로’를 시학의 영역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르 이론에서 제외되었으나 19세기의 낭만주의자들은 서정시를 중심으로 순수한 감정의 분출을 하나의 언어미학으로 정립하려고 애를 썼으며, 그 이후 문학의 영역에서 슬그머니 제외된 순수 서술 혹은 순수 표출로서의 ‘시’와 (재현으로서의) 문학 사이의 항구적인 갈등은 문학사의 은폐된 비밀에 속하게 되었다.3)
텍스트 생산의 차원, 즉 시 창작의 차원에서 디에제시스는 실은 광범위하게 생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엄밀하게 보자면 모든 텍스트는, 시를 포함하여, 토로와 재현이 혼합된 양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비록 극적 재현일지라도 화자(화자)가 그것을 진실의 이름으로 ‘진술’한다면 디에제시스의 집합에 넣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대부분의 시는, 특히 한국시는, 즉각적 정서의 표출이자 그것을 통한 진실의 가리킴을 꾀한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80년대에 시가 폭발한 것은 그 때문이다. 80년대의 시는 무엇보다도 ‘부당하게 연장된 군사독재’라는 허위의 현실에 맞서 곧바로 진실의 핵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김영승의 시는 그런데 이러한 ‘토로’로서의 시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형태를 보여준다. 플라톤은 크리세스의 청원을 예로 들면서, 그 순간, “시인(호머)은 마치 크리세스인 듯이 말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김영승의 시에서는 이 ‘마치’가 불필요하다. 시인은 그 스스로에 대해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화자이자 동시에 인물이다. 그리고 화자와 인물은 완벽히 일치한다. 좀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인물(대상)은 없고 화자만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의 존재 이유를 위기로 몰아 넣는다. 왜냐하면, 시인 자신의 순수한 감정의 분출로서의 시는 결국 사적인 것의 공적 드러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사사로운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크리에스의 청원이 의미를 띠는 것은 트로이 전쟁이라는 이야기 속에 삽입됨으로써이다. 그런데 김영승의 시에는 삽입되는 공적 이야기 공간이 없다. 김영승의 시는 오직 김영승만의 시일 뿐인가? 그것을 독자가 읽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러나 시는 발표되는 순간, 이미 공공의 장에 위치한다. 그 점만으로도 김영승의 시는 공적 공간, 즉 사회적 담론의 장을 전제한다. 우리는 영화에서의 ‘외-영상hors-cadre’과 같은 의미에서 ‘바깥-이야기’를 상정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저 바깥 이야기, 즉 김영승의 시 안에는 부재하는 사회적 담론이 어떻게 김영승의 시에 작용하는가이다.
하나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사회적 담론은 이미 김영승의 사적 공간을 ‘강타’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그것은 그의 시에 현전하고 있지 않은가? 화자를 극빈하게 하고, 치욕스럽게 하는 침탈자의 위세로서. 그러나 이것은 잘못 제기된 질문이다.
물론 그런 사회성은 김영승 시의 화자를 이미 장악하고 있다. 그것은 화자의 존재적 지위를 완벽한 수동성으로 만드는 원인이다. 즉, 그럼으로써 그것은 시의 화자를 사회 속에 짓눌린 나약한 개인으로 꽁꽁 붙박아 놓는다. 시의 화자는 공공의 힘에 의해 사적인 삶을 강요당한 채로 공적 영역 속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존재다. 화자는 그 사회의 힘에 저항할 어떤 사회적 힘도 가지고 있질 못하다. 그것은 김영승의 시를 항구히 ‘사적으로’ 만드는 힘이다. 그의 시가 사회적 담론의 장으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힘이다.
여기까지 와서야 독자는 김영승 시의 저 ‘토로’가 정말 순수한 토로가 아닐지 모른다는 의혹을 품는다. 사회적 담론이 자신의 사적 공간에 개입하는 방식을 만드는 작업은 시인의 시적 실천에 속한다. 김영승의 시가 순수하게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체 하면서 실은 그를 사적인 존재로 꽁꽁 묶어 놓고 있는 사회의 힘에 어떤 저항의 전략을 실천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그는 사사로운 얘기를 하는 그 양태로 공적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다음 구절을 보자.
强風에 비 내리던
어제는 그 中의 一人이 한 턱을 낸다고 해서 다 함께
‘영월보쌈’에 갔다 故鄕 ‘進永’에서 딴 것이라고
감(柿)도 한 봉지 싸 주었다
돼지고기 보쌈에
고기 버섯 오징어 등 잔뜩 들어간 해물파전에
역시 고기 버섯 등 잔뜩 들어간 빈대떡에
함지박만한 그릇에 담아 떠서 먹는
통조개 새우 등 잔뜩 들어간 해물칼국수에
이 仁川 그 海邊의 墓地에 사는 내가
완전 海物이 되는 줄 알았다 들기름과
고추장을 넣고 썩썩 비벼먹는 보리밥에 호박죽에 새우젓에
막장에 찍어 먹는 고추 마늘 등등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이루 말할 수 없는 음식을
앞에 놓고
나는 그저 소주만 몇 盞 마셨다
― 「강풍에 비…」 부분
여기에서 강풍은 시의 풍경 속으로 난입하지 않는다. 못한다. ‘나’와 문예반 주부들은 지금 ‘영월 보쌈’ 집에 보쌈되어 강풍과는 무관히 즐겁게 놀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나’는 강풍 속에서도 나의 삶의 에너지가 남아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인가? 분명 그렇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강풍은 바깥에서 불고 있을 뿐 아니라 보쌈집 내부에 특이한 방식으로 투영되어 있다. ‘나’ 앞에 마구 쏟아지는 음식물들이 바로 강풍과 같지 아니한가? 그것들은 “인천 그 해변의 묘지에 사는 (나를)/완전 해물”로 만들어 버릴 듯한 기세로 닥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삼킬 듯이 달려드는 그것들은 실은 나의 먹이들이다.
바깥 세계의 표상이었던 강풍은 음식물의 양태로 치환되자마자 그 존재의 지위를 전도 당한다. 먹는 것으로부터 먹힐 것의 과잉됨으로. 그러니까 시인은 지금 강풍을 농(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킴으로써 그것에 대한 공포로 떠는 자신을 진술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과잉시켜서 그것을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시키고 난도질하여(요리하여) 나의 먹잇감으로 만드는 희롱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 희롱은 그러나 적나라하게 폭력적으로 자행되는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아이러니컬한 방식으로 ‘작업’된다. 왜냐하면 겉으로 ‘나’는 “(내가) 완전 해물이 되는 줄 알았다”고 능청을 떨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신을 추락시키는 체 하면서 실은 강풍을 추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옛날의 수사학에서 ‘거꾸로 말하기’(prétérition; 逆言法)라고 명명한 기교가 절묘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농’하고는 화자는 “그저 소주만 몇 잔 마셨다”고 쓴다. 이것은 단순한 부정적 멸시도 아니며, 나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그 강풍에 대한 두려움 때문도 아니다. 이어지는 시행들을 보면, 그가 소주만 몇 잔 마신 시간은 깊은 숙고가 진행된 시간이다.
왜냐하면 그는 집에 돌아 와 “如前히/强風에 비 내리는 (…) 새벽(에 일어나)/배가 고파 밥을 차려 먹”었기 때문이다. 음식의 종류는 달라졌으나, 그는 보쌈 집에서의 푸짐한 상차림의 음식들을 그렇게 먹어야 했듯이 푸짐하게 “잔뜩 먹었다.” 그는 ‘영월 보쌈’ 집에서도 먹고 싶었을 것이다. 기꺼이 먹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 먹었다. 왜 안 먹었을까? 다시 말해 사회성을 슬그머니 자신의 공간 속으로 포획하고는 그것을 처치하지 않았다. 왜? 단서가 여기에 있다.
둘러싸여 구경하던
그 ‘영월보쌈’ 음식들
나에게 있어서
좋은 음식은
그저 하나의 이미지고
‘관념’이다
ponytail, pigtail의
少女같은
그 주부들
인용된 부분 중 첫 번째 연은 약간 모호하다. “둘러싸여 구경하던”의 시선의 주체는 누구일까? ‘나’와 “그 주부들”일까? 그렇다면 ‘둘러싸고 구경하던’이라고 말했어야 하리라. 그렇다고 “음식들”에 눈이 달렸다고 할 수도 없는 법이다. 분명 둘러싼 것은 ‘주부들 그리고 나’이고 구경한 것도 ‘그들과 나’이다. 그런데 왜 “둘러싸여”라고 말한 것인가? 그것은 실은 주부들과 나 사이에 어떤 분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즉, 둘러싼 것은 주부들이고 ‘나’는 그 주부들에 둘러싸여 ‘어떻게 먹는가’를 구경당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저 ‘구경’은 그러니까 ‘영월보쌈 음식들’이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나’가 아닌가? 그래서 음식을 초점으로 볼 때 둘러싸고 구경한 것은 ‘주부들과 나’이지만, 주부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둘러싸여 구경당한 것은 ‘나와 음식들’이 아닌가? ‘나’의 이 미묘한 이중적 위치가 ‘둘러싸여 구경하던’이라는 특이한 표현을 낳은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주부들은 그녀들의 가난한 시인 선생님에게 음식을 잔뜩 사주고 어떻게 잘 먹는가를 호기심을 세우며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때 저 쏟아진 음식들은 ‘나’를 비추어보는 거울이 되었을 것이다. 강풍은 정말 강력하게도 불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희롱어법에 의해 추락한 그 순간에도 강풍은 여전히 ‘나’에게 세차게 불어닥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각 속에는 주부들에 대한 증오도 멸시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정도 들었고/또 그들 一身上에 있어/걱정도 한다.” 그것이 ‘소주만 몇 잔 마시는’ 숙고를 야기한 원인이자 동시에 숙고의 내용일 것이다. “좋은 음식은/그저 하나의 이미지고/‘관념’이다”라고 말할 때의 그 ‘이미지’, ‘관념’은 바로 이 음식 장면이 숙고의 대상이었음을 정확히 가리킨다. 그 숙고의 결과는?
그 주부들에게 내재한 소녀 같은 천진성의 발견이다. 달리 말해, 그는 사회의 이 세찬 시선들에 천진성의 이름을 부여한다. 철없는 강풍, 어린애 같은 강풍. 그럼으로써 ‘나’는 사회를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나’의 위엄을 회복한다. 독자는 이 회복된 위엄의 시선을 통해 “둘러싸여 구경하던/그 ‘영월보쌈’ 음식들”을 ‘나의 시선에 둘러싸여 구경하던(동시에 구경당하던) 그 영월보쌈집 주부들’이라고 바꿔 읽을 수도 있다. 물론 시의 화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저 주부들에서 포니테일, 피그테일을 빼앗아 버리는 일이고, 그래서 그녀들에게서 천진성을 박탈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엄을 회복하려면 내가 부여한 사회의 천진성을 최대한도로 존중해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 나를 이렇게 발가벗긴 세상을 나와 같은 수준으로 낮추면서 동시에 나와 함께 북돋아야 한다. 그것이 ‘시의 정의’이며 또한 내가 이 세상 속에서 열심히 생활하는 근본적인 까닭이기도 하다.
‘영월 보쌈’ 집에서의 이 은밀한 사건은 김영승 시 일반을 해독하는 3가지 열쇠를 감추고 있다. 첫째, 강풍은 ‘과잉’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자를 완벽한 수동성으로 만드는 저 사회적 세계는 그의 시에서 과장적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회는 재현되거나 표상되지 않고 농할, 즉 조롱이든 희롱이든 번롱이든, 악착같이 즐겁게 변용할 무엇이 된다. 가령,
이곳 임대아파트로 이사온 지 내일이면 꼭 1년
월 175,300원 그 임대료가 벌써
두 달째 밀렸네
말렸네 나를 말렸네 피를
말렸네, 극빈
극빈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
‘쪽’도 많이 팔렸구나
그래서
쪽빛(顔色)이 쪽빛(藍色)이구나.
― 「극빈」 부분
같은 시구에서,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기술된 ‘나’의 가난과 그로 인한 치욕은, 그 기술 과정 속에서 ‘나’의 찬란한 표장으로 뒤바뀐다. 피를 말리는 가난은 내가 ‘무소유’로 전락할 것을 ‘말린다.’ 나는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이것저것 청탁받은 원고 쓰고/여기저기서 또 꾸기도 하며/(……)/원고 쓴 돈으로 꾼 돈 갚으며”(「氷上, 木炭畵」) 살게끔 한다. 그 살려고 바둥댄 몸짓이, “그 초원의/body language”가 바로 시가 된다.
그러니, 극빈은 참으로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이며, 나를 파느라고 내가 당한 나의 치욕은 나의 쪽빛(안색)에 어느새 쪽빛(하늘빛)이 감돌게 한다. 사회의 무자비함에 짓눌린 나는 사회로부터 도망가는 방식(‘무소유’를 화두로 한 그 온갖 허황된 말씀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회에 악착같이 남아 있으려는 안간힘을 통해 자신의 위엄을 지킨다. 그래서 시인은 “이것은 pun이 아니라/정당한 진술이다 ‘언표’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합장을 하고 박수를 치며
成佛했다
破戒했다
따귀는 결국
孤掌難鳴
― 「나도 그렇고 그렇다」 부분
라는 눈물겨운 표현도 읽어 볼만하다. 모기를 손바닥으로 때려잡는 광경을 묘사하는 이 시구의 배경에 놓인 것도 화자의 가난이다. 모기는 가난한 집에만 들끓기 때문이다(문이 열려 있고 집이 낮으니까 그렇다는 것을 굳이 설명해야할까?). ‘나’는 이 모기들을 “열마리도 더 잡”는다. 이 잡는 광경은 그러나 어느새 합장하는 포즈를 연상시키고(모기를 잡으려고 두 손을 적당히 모으고 살금살금 다가가는 광경을 생각해보라) 그것의 반복은 그를 성불의 차원으로 올려놓는데(한 마리 모기를 잡기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그 성불의 순간은 동시에 파계의 순간이다(모기잡는 것은 살생이다). 성불이 곧 파계가 된다는 이 모순은 곧바로 화자-주체의 대상화로 이어진다. 모기를 잡기 위해서 우리는 대개 자신의 몸을 때리는 것이다.
그러니 모기를 때려잡는 행위는 제 얼굴을 따귀 때리는 행위이다. 그것을 두고 화자는 짐짓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는 한자어에 대입한다. 고장난명의 뜻은 “외손뼉이 울지 못한다”이다. 이것은 모기와 ‘나’의 동위성, 다시 말해 대상과 주체의 동위성을 가리키면서, 함께 존재함의 의미를 일깨우는 동시에 그 함께 존재함의 비애(고장난명을 풀어 읽으면 ‘고장난 소리’가 될 수도 있다)를 생각게 한다. 궁극적으로 세상은 시 속에서 ‘재현’되거나 ‘표상’되지 않고 과장스럽게 변용됨으로써 성찰의 볼록거울이 된다.
다음, 성찰의 볼록거울의 기능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두 가지 기능들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그 성찰은 자신을 낮추는 체 하면서 세상을 낮추고, 그 낮춤을 통해 세상의 현실적 에너지를 최소화한 덕분으로 그것의 잠재적 에너지를 최대화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만 천국이 열리는 게 아닌가? 다음의 시구는 그 사정을 개념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아플 때는 다들
순하고 선한
퀭한 짐승의 눈
아픈 짐승을 약올리는 짐승은
인간이라는 짐승뿐
―
「아플
때…」
부분
아픈 자, 짐승된 자만이 순하고 선할 수 있다. 인간만이 아픈 자들을 ‘약올린다.’ 다시 말해, 잔인과 폭력과 경멸을 행한다. 그러지 않으려면 인간보다 더 낮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 기능은 세상을 낮추는 변용은 이어서, 앞에서 본 “소녀 같은 그 주부들”처럼 세상의 잔인함을 천진성으로, 순수운동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산에는 나무 새끼들이 온통 차지하고 있으니/나무에게 略歷을 말해서/무엇 하냐 나쁜/나무 새끼들”(「언 江에 쌓인 눈」)에서 욕으로서의 나무 새끼를 새끼 나무로 읽히게 하는 것은 그러한 천진화의 가장 간단한 기교이다.
마지막으로 이 변용의 효과. 그것은 세상의 어린애 같음을 자기 암시함으로써 주관적 위안 속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비애와 위엄’을 동시에 궁리하는 사유틀의 생산이다. 그가 “암각화처럼 손톱 끝으로 북북/긁어,” 세상과 나의 손톱을 동시에 망가뜨리는 것은, 이미 망가진 몸을 더욱 망가뜨림으로써 “쩌렁쩌렁/水晶처럼 눈부시게,//이 酷寒을 더 견디”(「이 酷寒을 견디면」)기 위해서이다. 물론 순수한 ‘토로’의 시에서 그것은 ‘형상화’된 방식으로 제출되지 않는다. 보석 같은 하나의 형상을 창조하는 대신 그는 온갖 형상의 가능성들을 자신의 몸 안으로 불러들인다.
이 얼어붙은 겨울밤 달빛을
뒤로 하고 걷는 내 등이
화끈거린다 아니면
그 어느 이끼 낀 바위에
등을 대고 문질러버리리라
등에는 나의 임시
정부가 있다 등에는
적들의 소굴이 있다
본부가 있다
쇠파리여 등에여 내 등을
빨아먹어라 변태성욕자
여인이여 내 등의 혹을
잘근잘근 물어 뜯어 씹어먹어
보아라 비지 같은
粥에 썩은 피에 그 맑은 피에
음부를 대고 음핵을 대고
문질러 보아라 짓이겨 보아라
― 「등, 考察」 부분
등에는 종기가 나 있다. 그 화끈거리는 등을 그는 손이 닿지 않아 긁을 수도 없다. 그 종기는 ‘나’의 등에 난 종기이지만 그것은 타자들만이 건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세상에 의해 완벽한 수동성으로 전락해버린 ‘나’를 반영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반영을 통해서 ‘나’의 진술은 그 종기에 달라붙는 모든 세상의 타자들을 벌레·짐승·변태의 수준으로 낮추면서 있을 수 있는 그 짐승들의 공격을 통해서 자신의 응어리진 고통(종기)이 “내 육체의 지진”으로 폭발하여 염결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꿈꾼다. 그 꿈을 위해서 그는 세상의 온갖 짐승들·벌레들·변태들을 불러모으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이 활화산처럼 폭발하려면. 삶의 고통을 몽땅 겪을 때에만 사는 자의 위엄이 서는 것이다.
김영승의 솔직하기 짝이 없는 자기 노출의 시, 독자에게 좀 어려운 한자어를 빌려와, 동혈한 시라고 명명한 그 시학은 단순한 고백이나 엄살이 아니다. 그것은 광포한 세상에 맞서는 눈물겨운 사투의 시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세상의 광포성에 같은 방식으로 보복하지 않고 함께 북돋워지기 위해 시인이 최종적으로 골라낸 자기 고백을 통한 세상 벗김의 시이기도 하며, 궁극적으로 바로 그 노출과 벗김을 통해서 삶의 비애와 위엄의 동시적 공존을, 가능성으로 무한케 하는 시이다.4)
_______________________
1 <공화국> 제 3장, 393; 이 장르는 플라톤의 시대에 ‘디트람부스’에 할당되었다.
2 극이 여기에 할당되었다. 덧붙이자면, 서사시는 미메시스와 디에제시스가 혼합된 장르라고 하였다. 역시 지나는 길에 덧붙이자면, ‘미메시스’는 베끼기(imitation)라는 뜻만을 가진 게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지어낸 것 혹은 꾸며낸 것(poiesis)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플라톤이 시인을 추방하고자 했던 것은 미메시스가 잘못된 베끼기, 즉 꾸며진 베끼기라고 그가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잘 아시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꾸며내기에서 인식의 즐거움을 보았다.
3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한국의 평론가는 이상섭이다. 그는 디에제시스/미메시스의 대립을 표현/모방의 대립으로 치환하고, 문학적 논의에서 실종된 전자의 복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미세시스와 문학과 시, 하나의 비평사적 반성」(<역사에 대한 불만과 문학>, 문학동네, 2002)과 「테크네와 미메시스」(이상섭 편, ꡔ문학·역사·사회ꡕ, 한국문화사, 2002)를 참조할 것.
정과리|1979 ꡔ동아일보ꡕ 신춘문예로 평론활동 시작. 본지 편집위원. ꡔ문학과사회ꡕ 편집동인. 연세대 국문과 교수. ꡔ문학, 존재의 변증법ꡕ, ꡔ스밈과 짜임ꡕ, ꡔ무덤 속의 마젤란ꡕ 등이 있음
출처, 월간현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