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詩論 - 말을 골라 쓰기 / 박재삼
나의 詩論 - 말을 골라 쓰기 /
박재삼
밭에서 말을 타니 말발굽에 향내 난다'라는 옛 민요를 나는 그럴싸하게 생각했다(꽃밭에서 말을
탄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은 훨씬 후에 느낀 일이지만). 이런 민요 비슷한 감정을 나는 어린 시절에 가졌었다. 꽃밭에 오만가지 꽃이 만발해
있었는데, 거기서 어느 어른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다. 꽃밭에서 담배를 피울 수가 없을 것인데, 저 어른은 뭘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왜?'에 많은 기대를 걸지만, 나로서는 그때 느낀 그 '꽃밭에서는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까닭을 쉬 말할 수가 없다. 그저 그렇게 느꼈다는 것 뿐이다. 그렇게 느꼈으면 느낀 그것이 내게는 소중하다는 것이라고 할는지. 까닭을 못 대어도 나는 나의 느낌을 수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이다.
굳이 말한다면 '아름다운 것 앞에서는 경건해야 한다'는 것이 되겠지만, 이렇게 말해도
시원하게 1+1=2가 되듯 확답은 아닌 것이니, 그저 애매한 대로 놔두는 것이 실은 정답인지 모른다. 정답 비슷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세상인 것
같지만, 정답을 못대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두고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한 사람이 느낀 진실을, 어떤 힘으로 교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와 비슷한 것 한 가지. 나는 늘 공중을 날아가는 새를 보면서 '저 새는 강물을 어떻게 건널까'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물론 공중에는 강도 없고 따라서 다리도 없다. 그러나 이런(어쩌면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를) 생각을 나는 잘못된 생각으로 고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공상이 남에게 있어서는 공상만이 아닌, 공상적 현실로 탈바꿈하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가 있다.
문학적 현실이란 것은 어쩌면 이런 개인적 공상에서 비롯하여 공상적 현실을 거쳐 나오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공상에서 비롯됐다고 하더라도 공상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거기 살이 붙고 모양이 갖춰지면 현실화하는
것이고, 이것이 학문에 있어서는 바로 문학적 현실이 되는 것이라고 본다.
새가 강을 어떻게 건널까 하던 공상은, 어른이 되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보고 강을 건너는데 대한 쓰리고 아픈 것이 있으리라는 또 다른 연접된 공상을 얻었다. 이것은 공상이 공상만으로 끝나지 않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고, 또한 이것을 살을 붙이고 모양을 갖추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졸시 '그 기러기 마음을 나는 안다'를 다시 한번 적어
본다.
기러기에게는 찬 하늘 서릿발이 아니다.
진실로 쓰리고 아픈 것은
공중에서도 강을 건너는
일이다.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도도한
저 순리와 같은 강을 질러가는 일이다.
그러한
기러기
그 기러기 마음을 나는 안다.
나는 시방
하늘이불 덮은
하늘의 아기 같은
아기가 자는 옆에서
인생이 닳아버린 내 숨소리가 커서
하마하마 깨울까 남몰래 두렵느니라.
아기의 잠을 깨우게 될는지도 모를 그 조마조마함을, 저 기러기의 강을 건너는 쓰리고 아픈 마음과 줄을 대어 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뒤에 오게 된 아기를 깨울 것에 대한 조마조마한 것은 이를테면 애당초 '저 새는 강물을 어떻게 건널까'의 공상에서 발전하여 거기에
접을 붙여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공상'이었다가 내 속에서 차츰 '공상적 현실'로 되어가고, 그것이 다시 한 편의
시로 발표되었을 때에는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문학적 현실'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으리라. 이런 것이 대략의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쳐 한 편의 시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런 과정이 모든 작품마다 반드시 공통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특별한 경험의 폭이나 과거를 갖지 않고 일기아성(一氣阿成)으로 쓰여지는 작품도 없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설명하기 어렵고 복잡한 것이
비록 없다고 하더라도 작품으로서 잘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 데 있어서의 과정은, 그것이 약했다고 해서 나쁜 작품이 된다는
것은 일률적으로 잘라 말할 수 없는 성질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시를 쓸 때 '이 말을 들어맞는 말인가' 또는 '말의 배치가 제대로 되었는가'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이런 것에 관심이 없이 시를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 뻔하다. 그러면서 나는 또 가락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쏟게 되며, 심지어는 남이 안하는 것에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는 그것이 옳게 되었는가를 따져보기도 한다.
내가 많이 시험해 본 것
중에서 하나 예를 들자면 어미 처리에 관한 것을 들 수 있다. 산문작가들이 많이 부딪치는 것 중에서 '~다'로 끝나는 데 대한 상투성과
진부성에의 반발이 있는데, 시에서도 그런 것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와 '~라'에서인데, 여기서의 탈비를 시도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 어미가 너무나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말이 발달을 덜한 증거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초기 시절에 '~것가', '~었을레', '~었을까나', '~면서' 등으로 써보았다. 그래도 실은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느낀 것은(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가락이 순탄하지 않고 약간 무리를 하는 듯한 그것이었다. 그래서 "어린것들 옆에서"란 시집을 엮을 때가 되어서 보니 이상하게도 그런 어미에 대한 시도가 많이 거세되고 다시 사용 빈도수가 많은 '~다' 또는 '~라'로 되돌아오고 있음을 보았다.
앞으로 이 어미에 대한 걸 다시 한 번 새로이 시작해 볼 작정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얼마만한 당위성을 획득하느냐에 있을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대담한 사투리의 구사도 꾀해볼 작정이지만, 이렇게 되면, 때로는 이중적으로 나을
걸로 알고 있다. 이를테면 '~했걸랑요'라든가 '해쌈시로'와 같은 것. 다만 부자연하지 않을 것이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말'이라는 것도
'시상'과 함께 내것이 되게 힘써야 하리라고 믿는다.
'제 말'을 갖는다는 것, 달리 말하면 '자기류(自己流)로 화한 말'을
갖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시에 있어서의 말은 다 쓰는 공통어이면서 동시에 그 시인만의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어법의 문제에 속할 것이라 믿어진다. 시를 읽는다든가 또는 엮는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 것도 한 시인만이 독특하게 갖게 되는 구성의
묘에 그 진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 시인이 관용구(慣用句)를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관용구만으로 특색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 터이고, 요는 그러한 관용구에 보태어지는 것이 있음으로서 그 시인의 말이 되는 것이리라.
말을 골라 쓰는 것, 또는
자기류로 쓰는 것은 누구나 중요시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에서는 그것이 상당히 둔화된 느낌이다. 발표자의 이름을 뗀다면 이것이 과연 누구의
시인가 분명해지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어법을 많이 안 가지고 시를 쓰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러면서 언필칭 '시는 언어로
쓰여진다'는 기본적인 명제(命題)에서는 쉬 후퇴하려 들지 않는다 얄궂은 시만 새로운 시라고 본시 깊이 빠져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처지에 나는 어법도 어법이지만 그보다 더 사소한 어미의 문제에까지 골똘하게 되니 혼자 이럴 일인가 하고 간혹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다시 정신을 차려 보면, 역시 말을 독특하게 다루어야 하고, 또한 어미 문제도 사소한 대로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상만 오래 머리나 가슴 속에 두어 다듬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시상과 함께 시어도 오래 간직해서 익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릴케는 한 편의 시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임부(姙婦)에 비유한 일이 있지만 여기에는 시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시어도 기다림 속에서 여물이 듦을
말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