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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희의 ‘창녀형 시인’ 논란

휘수 Hwisu 2006. 12. 14. 14:30

김용희의 ‘창녀형 시인’ 논란


  ‘창녀적 여성’이란 명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문학평론가 김용희씨(평택대 교수)가 지난 1월말 출간한 평론집 ‘페넬로페의 옷감짜기-우리시대 여성시인’(문학과지성사)에서 강신애·이경림 등 일부 여성 시인을 ‘창녀적 시인’이라고 명명한 뒤 당사자들의 반론과 평론가 자신의 재반론이 이어지고 있다.

 

  김용희 씨는 이 책에서 여성 시인을 ‘아마존적 여성(이선영)’, ‘사디즘적 여성(김혜순·조말선)’, ‘모성적 여성(허수경·김선우)’, ‘구도자적 여성(나희덕·이진명·천양희)’, ‘창녀적 여성(강신애·이경림)’, ‘몽상적 여성(김명리·조용미·이수명)’ 등 6가지로 분류하는 과감한 시도를 했다.

 

  활시위를 당기고자 유방을 잘라 버린 아마존적 여성은 성적욕망과 모성을 포기함으로써 더 큰 자아를 획득한 여성이고, 창녀적 여성은 남성과 계약적 거래관계 속에 놓여 있으면서도 남성으로부터 독립적이고 남성을 혐오하는 이중적·복합적 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 창녀적 여성에게서 열정과 매력이 느껴진다고 했다.

 

  이같은 분류의 목적은 기존 남성적 시선에 의해 모성과 창녀로 나눠진 이분법적 여성의 이미지를 깨고 여성성의 다양함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김씨의 분류법은 새롭고 과감한 것인 만큼 나름의 위험부담이 뒤따랐다. 한 시인의 시 세계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에서 대표작이라고는 하지만 일부 시만 골라서 유형화를 시도한 것이 문제가 됐다. 또한 저자가 생각하는 우리시대 여성 시인의 시처럼 가부장제에 물든 기존 언어의 의미를 해체하면서 그 언어 안에 여성적 시각에서 새로운 의미를 각인하는 것이 시작품이 아닌 평론에서 얼마나 가능한지도 지금까지 전혀 실험된 바가 없었다.

 

  이 중에서 특히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창녀적 시인’이었다. 창녀적 시인으로 지목된 이경림·강신애 시인은 책이 나오자마자 강력히 항의했다.

 

  이경림 시인은 “약자와 가난을 노래한 내 시의 어느 부분이 창녀적으로 비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꼭 여성 시인은 무슨 무슨 유형으로 분류돼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나아가 평론의 폭력, 여성끼리의 폭력이라고 지적했다.

 

  난처해진 김용희씨는 공식해명을 미뤄오다 최근 발간된 월간 ‘현대시’(한국문연) 3월호의 특집 ‘여성주의 시와 비평’과 ‘서정시학’ 봄호를 통해 동시에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김씨는 “‘창녀’는 남성을 통해 경제적 필요를 채우려 하면서도 남성 가부장적 지배논리에 대한 전면적 저항을 상징하는 존재”라며 “‘창녀’라는 말의 부정적 함의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끝없이 말을 끌어안고 아버지/언어와 겨루는 시적 대결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경림씨와 마찬가지로 ‘창녀’라는 명명에 거부감을 보이던 강신애씨도 ‘서정시학’ 봄호에 자신의 입장을 기고했다.

 

  강씨는 “부단히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과 실험을 꿈꾸며 자신의 언어를 재수립해 나가는 시인의 유형화는 독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고, 시인의 앞길에 장애가 될 수 있다”며 “요즘같은 인터넷 시대에 활자화된 말 한마디가 갖는 파급효과는 소설 ‘주홍글씨’처럼 여주인공의 가슴에 A자를 새겨 거리에 내보내는 것과 같다”고 반박했다.

 

  이같은 논란은 1990년대 급격히 발전한 여성주의 시가 대개 남성의 언어를 해체하는 어법을 사용한다고 평가받으면서도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여성적 글쓰기’로 명명되는 90년대 시는 표준어와 일상어를 넘어서는 구어, 비속어, 의성어 등을 사용해 남성의 언어를 부수면서 새로운 의미를 덧붙인다. 이는 기존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언어의 뜻을 비틀고 전유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왜곡을 가한다.

 

  그럼에도 “행인 10명을 붙잡고 ‘창녀’라는 말에서 열정과 매력을 떠올릴 수 있는지 물어보라”는 한 시인의 지적처럼 아무리 시어, 평론어라도 의미의 전유에는 사회적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서에서 예수의 곁을 지켰던 막달라 마리아의 등장 이후 더러움의 상징인 창녀는 남성의 구원과 씻김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로 자리매김됐다. 요즘 김기덕 감독의 베를린영화제 수상으로 유명해진 영화 ‘사마리아’ 역시 이런 남성적 시선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 자신에 의해서 제기된 ‘창녀’의 새로운 의미부여가 얼마만큼 가능한 일인지 여성 평론가와 시인들의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볼 만하다.

 

〈경향신문 / 한윤정기자 yjhan@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4년 03월 04일 18:47:32

출처, 네블, 아삽의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