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하 시모음
1958년 경기도 안성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87년 10월 월간 [문학사상] 신인상에 <눈발>, <생의 온기>, <입동>
<하회강에 가서>, <밤길> 등으로 당선
현 한남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시집, [그리움 없인 저 별 내 가슴에 닿지 못한다], [네가 밟고 가는 바다]
비평집, [한국 현대시의 지평과 심층], [신동엽 시 연구]
별 1
별들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가 서로의 거리를
빛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허리가 휘어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 발 아래로 구르는 별빛,
어둠의 순간 제 빛을 남김없이 뿌려
사람들은 고개를
꺾어 올려 하늘을 살핀다
같이 걷는 이웃에게 손을 내민다
별들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의 빛 속으로
스스로를 파묻기 때문이다
한밤의 잠이 고단해
문득, 깨어난 사람들이
새벽을 질러가는 별을 본다
창밖으로 환하게 피어 있는
별꽃을 꺾어
부서지는 별빛에 누워
들판을 건너간다
별들이 아름다운 것은
새벽이면 모두 제 빛을 거두어
지상의 가장 낮은 골목으로
눕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길
네가 스쳐간 곳에는 상처가 남는다
이렇게 겉으로 차오른 푸른 멍
그 안에 짙은 물빛 일렁이는 바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바위보다 단단한 침묵.
북극 나침반보다도 단호한
숨의 멈춤.
네가 스쳐간 풀잎 끝에는 향기가 흐른다
아직 채 이슬 걷히기도 전
들녘의 가느다란 길 따라
그대 깨우고 간 새벽
들길은 더 넓게 트이고
바람 스쳐간 풀잎 끝에
아리고 저린 기억.
하회강에 가서
하회강에 밤이 깊다
모래에 그림자 파묻고
무거운 밤을 지고 섰다
열렸던 길들은 돌아가 어둠 속으로 눕고
샛길에 닿기를 거부한다
강물 소리에 귀를 담그고
하얗게 뼈를 비우는 나무들
먼 산들 끝내 제 모습 지우지 못한다
어둠 가르며 뻗는 손
장삼 자락 가득 고인 그리움이여
하회 강물 천년 두고 흘러
굽은 물줄기 하나 꺾지 못하고
굽은 허리 더 휘어 돈다고
자욱한 개구리 울음뿐이다
강 질러온 빛 부용대에 머리 부딪혀
산산이 꽃 되어 내리는지
강물은 소나무숲에 와
천둥소리 내며 뒤채어 흐른다
억센 어깻짓에
물러서는 몇 겹의 밤
하회 아이들의 땅에 그린 탈들이
눈뜨고 강으로 나아온다
녹슨 잠 한 짐씩 강에 부린다
불빛 화살에 이마를 씻고
어우러지는 한판 춤,
짙은 안개를 차고 오르는 빛이
어둠을 가르고 간다
별 5
가난한 사람들만이
새벽마다 깨어나
골목을 쓴다
일시에 사라지는 별빛,
풀 포기마다 가득 내린
맑은 이슬로 손을 씻는다
새벽에 깨어난 사람들만이
내일 밤에 또다시
새로운 별이 떠오를 것을 믿는다
동백꽃
그 꽃 다 지고 나서야
지름길을 알았다
그대에게 가는 길
섬
바닥이 깊다는 것,
물 바진 뒤에야 알았습니다
드러난 갯벌에 서서
사방 팔방 흩어지는 게떼 속에서
다시 차오를 깊이를 봅니다
그 물의 무게를 느낍니다
물 나간 뒤
빈 바닥 위에서
두 섬도 하나임을 알았습니다
지난여름
도청 앞 로터리 화단
다섯 번째 꽃이 바뀌고
그 여름은 졌다
하루의 불타는 숲을 향하여
버스가 대전 역으로 돌아설 때
살펴보았다,
화사한 꽃들의 웃음을
우리 삶도 저처럼 반짝거릴 것인지
저렇게 산뜻하게
순간으로 피어날 것인지
골똘히 나를 들여다보다
버스는 내릴 곳을 지나쳐 있었다
한낮
쇠똥구리는
바람뭉치를 굴린다
땡볕 속을 물구나무로 서서
땅을 밀며 둥글게 둥그렇게 바람을 만다
황토 바닥 한껏 밑바닥으로 깔리며
깊은 제 고독의 그림자를 깔고 간다
쇠똥구리는
바람뭉치 우주를 울리고 간다
여름 쇠똥구리가 천천히 땅을 말아가며
지구의 자전과 팽팽히 맞서는 한낮
쇠똥구리의 느린 움직임에도
깊은 골이 파이고 붉은 흙이 튀어 오른다
화양동에서
화양동 어둠 속을 걸으며
오늘 여기 와
막혔던 귀 열리고
비로소 큰소리 듣는다
다 잠든 밤 굴레 박차고 일어나
기나긴 어둠에 번지는 물 소리
몇 겹의 밤 뚫고 가는 한 줄기 물 소리
그 따뜻함에 사무친다
산모퉁이 돌아서면
쏘아대는 불빛, 불빛
멀었던 두 눈이 뜨이고
어둠 사르던 불, 싱싱한 힘줄을 본다
캄캄함 숲 깊이 들수록
귀는 더 크게 열려
밤새워 물 소리 산허리를 휘감고
불빛 화살에 눈이 시린데
우리는 말없이
더 많은 말을 주고받는다
가쁜 어둠 속 고추서는 나무여
푸른 잎마다 이슬을 묻어 두고
어깨 짠 숲을 질러가면,
어느새 길은 환히 트이고
풀잎이 새벽으로 기어가는
작은 소리도 들린다
우리, 오늘 화양동에 와서
귀도 눈도 입도
비로소 제 몫을 찾는다
나무와 매미
왕매미 한 마리 미루나무숲을 다 흔든다
여름내 숲으로 귀를 빼앗기며
나는 매미가 우는 줄 알았다
어느 날 거친 잠의 구렁에서 풀려 나며
비로소 매미 앉은 나무가 우는 것을
나는 보았다
한낮 사람들의 혼곤한 귓속으로
잠의 폭설이 무너져 내릴 때
휘청대는 시간의 절벽에 매달려
사람들 안간힘으로 버틸 때
스스로 깨어난 나무들은
바위 속 빈 고독의 알을 깬
매미 하나씩 불러와 제 가슴에 품고
뜨거운 살을 부비며 운다
숲으로 가서 보라,
저 수풀 속 미루나무들의 떼 울음 소리
나무 이파리 일제히 불타 오르며
둥글게 둥글게 감기는 나이테
출처, e 시인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