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김성수 시모음

휘수 Hwisu 2006. 9. 25. 00:08

1961년 전남 보성 출생

2003년 <현대시>로 등단

난시 동인

  

지는 백목련에 대한 단상

 

목련 나무에서 화려한 설법이 떨어져 내린다
저 우유빛 가슴, 겁탈 당한 조선시대 여인네 정절貞節같은,
품 한 켠 은장도로 한 생生을 접었다
옷고름 풀어헤친 짧은 봄날의 화엄경華嚴經 소리,
바람바람 전하더니, 거리 욕창 든 꽃잎 떨구며
봄날은 간다 아름다운 요절, 화려한 통점痛點,
동백의 투신은 투사의 모습이었고,
목련은 병든 소녀처럼 죽어갔다. 두둥실
명계冥界를 건너는 꽃들의 장송곡 따라 삼천 궁녀들
나무 위에서 자꾸만 뛰어 내리고 있다.
잎새들도 곧 뒤따르겠노라 하염없이 손 흔든다.
떨어진 목련꽃을 만진다. 화두話頭 하나 마음으로 뛰어 든다
내 생이 바짝 긴장한다
memento mori!*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오래된 골목

 

세상에 막힌 집은 없다
소통疏通할 수 있는 좁은 문이라도 있게 마련이다
낮은 담 너머로 서로 생활을 간섭해주는
이웃의 수다가 싱거운 일상에 간을 하고
때론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우더라도
뒷날 평상에서 함께 마늘을 까며
간지러운 웃음으로 털어내는,
오래된 골목의 풍경은 조각조각 덧댄
상처를 땜질하는 소리로 저문다

 

사다리 타기를 하듯 막 그어 놓은 골목길
소꿉놀이하던 애들까지 다 불러들인 집들이
골목에 혓바닥 내민 불빛과 함께 환하고
관절염 앓는 대문의 삐걱거리는 통증을
걷어차며 취기로 용감해진 가장들이 귀가한다
가끔은 비행접시같이 그릇들이 날다 추락하며
들썩이는 집도 있지만 간지러운 귓밥을 파내듯
잠결에다 멍텅구리 배船 하나 띄워 놓는다

 

새벽이면 소화되지 못한 잠을 씻어내고
내장 같은 골목을 빠져나가는 기침 소리
외등 하나 날벌레에 밤새 시달려 축 쳐진
오래된 골목을 장막帳幕을 치듯이
안개가 덧칠을 한다
낡고 녹슬고 색 바랜 골목과 집들을
풍성하게 씻어내는 안개가
균열을 메우는 쓸만한 시작이다
하지만 고서古書의 어려운 한자를 대하 듯
오래된 골목은 알 수 없는 기호記號같이
아리송한 길이며 공간이었다

 

한천로 4블럭


한천에서 비릿한 안개를 풀어낸다
비누 거품으로 머리를 감고 있는 나무들과
적벽강에 서 있는 것 같은 영구 임대 아파트들이
안개에 푹 잠겨 공중 목욕탕 욕조 속의 노인처럼
흥얼거리는 시조 한 가락을 뽑는 듯한 풍경이다

 

정거장에 서는 버스마다 안개만 실어나르는,
한천로 4블럭에는 구멍난 양말을 꿰메는
어머니의 늘어난 메리야스같이 헐렁한 빈터에도
삐거덕거리는 그네 하나에 바람만 앉아 흔들리고
활기라는 단어를 텅텅거리며 가지고 노는 건
근처 전자공단의 젊은이들뿐이다

 

도로변 신문 가판대 뒷쪽에서 몇 사람이 바둑을 둔다
팔순이 넘은 노인은 세월에 수담을 하듯
찢어온 기보를 복기해 보며 살아온 삶도 복기를 하는 걸까
내내 손가락을 짚어가며 반상에 골몰해 있다
건너편 중년의 사내는 후절수를 두고선 사필즉생 운운하며
너스레를 떨고, 훈수하는 추임새 마다 바둑판을 달궈놓고
대마가 몰린 듯 궁색한 삶들이 불계를 꿈꾸고 있다

 

한천로가 머리띠를 두른 듯 노란 개나리꽃 늘어선 봄날도 가고
녹이 슨 오동잎 뒹구는 가을의 철문을 열고
자식을 기다리는 노인의 청춘가는 구슬프고
지팡이를 짚고 먼저 일어서는 한천의 안개가
쨍하니 태양을 내놓듯이 자식들의 안부 전화라도 있을는지…
한천로 4블럭의 쓸쓸한 풍경을 지우고 싶은 마음을
정거장에 멈춰 선 버스에 태워 보낸다

 

다시 오수에 빠진 듯 고른 숨소리로 내려앉는 한천로 4블럭
파지를 모으는 할머니의 아리랑 고개는 숨이 차고
빨대로 쭈욱 빠는 요구르트같이, 안개도 사위어가면
잘못 물린 틀니를 고쳐 끼우듯, 삐꺽거린 일상을 꽉 물고
나아가는 소리가 살아 있는 그 곳
저녁이면 뒤척이는 영구 임대 아파트의 불빛들이
한천에서 잠못들며 뒹굴고 그렇게 살아서 빛나고 

 

옹관에 대하여

 

어릴 적 가난한 친구의 집에서 뒷간에 들어선
나는 큰 독을 파묻고 널빤지 두 장을 얹어 놓은
그 위에 앉아 균형을 잡으며 일을 본 기억이 있다
벽에는 벽지무늬 마냥 구더기들이 붙어 있고
독 아래에선 부글부글 발효되던 똥무더기
박물관 옹관 앞에서 엉뚱하게도 급하게
문기척을 하며 얼굴까지 샛노랗게 변하는
화장실 앞에서 처럼 뱃속이 싸하게 뒤틀린다
저 옹관 속에서 불쑥 손을 뻗으며 다리를
붙들 것 같은, 그래서 그 뒷간의 기억이
옹관 앞에 나를 세워 둔 것이다
어느 백제인의 주검이 태아같이 웅크린 채
자궁같은 옹관에서 썩고 허물어 졌으리라
임산부의 배같은 항아리의 넉넉한 곡선을
어루어 보다 배를 내밀고 당당히 버티고 있는
옹관의 균형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매점에서 잘룩한 허리에 주름치마를 입은
코카콜라를 들이키며 갑자기 풍만한 여자가 그리웠다 
 

가난에 대한 사색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살아야 된다는 내 말을 끊으며 오살할 놈 배때기
고픈 것을 땅콩 까먹듯 까먹었냐는 어머니의 핀잔을 홀짝 홀짝 받아 마셨다
징하디 징하제 누렇게 뜬 달만 봐도 '배고파'를 노래하던 부황浮黃뜬
애들 얼굴 떠오르고, 보릿고개 시절에 죽을똥살똥 생똥싸는 게 옹이 같아서
신물 나도록 가난에 대한 적의를 가르치는, 목에 깁스를 해서라도
위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담화문은 가난에 대한 계엄령 같았다
애당초 내 뜻과 다르게 해석을 하는 어머니, 등 따숩고 배부른 아랫목으로
깊이 뿌리내리는 나무이셨다. 잎도 무성해서 편안한 휴식을 하는 여유로
새 몇 마리의 둥지가 되는 것이며, 큰 부자가 되자는 말이 아님을 안다
가난에 배불러도 헛헛한 그 때의 옹이가 아직도 지금의 편안함을
누르는 모양이다.

 

얼얼한 귀를 씻으러 밖으로 나와 아래로 내려보나 위를 올려보나 아찔하거나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이니, 푸른 중심에 서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올려보는 밤하늘에 오늘 따라 오살나게 배부른 듯 별들이 기름기로
반지르르 하다.

 

나는 지금 바그다드카페로 간다

 

긴 문장 같은 도로변에 쉼표로 찍혀 있는 바그다드 카페로 간다
바람이 둘둘 말아 마른풀로 공놀이를 하고있는 사막을 건너는 중이다
꽉 조인 넥타이 같은 도시는 진공 상태 같다 내게로 조여드는 도시를
놓으면 뒷걸음으로 넘어지는 빌딩들이 시루떡같이 겹쳐지는 상상을 한다
햇빛마저 빌딩 유리창에 굴절하면서 각을 이루며 다듬고 다듬어져
손바닥으로 가려도 날 선 반짝임으로 나를 통과해 버린다
어쩌면 이 도시에서 나를 잃을 때가 많았으므로, 여백이 없는 그림속에서
나는 그렇게 도망을 가는 중이다

주황빛마저도 납작 엎드린 사막에는 스스스 방울뱀이 흔드는 경고음같은
바람 소리만 장송곡 마냥 처연하다 사막에 떠있는 방주方舟, 바그다드
카페를 향해 걸어가는 여자를 스치며, 그녀 역시 덧칠하는 도시의 그림속에
파묻히지 못했으리라 웃어넘긴다 뚱뚱한 카페 주인 여자를 따라 들어선
동굴 같은 그 안에는 흑인 여가수의 고스펠송으로 충만하다
럼주 한 잔을 부어 넣으며 확 불길이 이는 마음의 난로에 습한 손을
말린다 신경질적인 발걸음 소리를 내며 걸어온 그녀가 의자에 깊숙이
파고드는, 파도 치던 실내의 흐름도 잔잔해졌다 나른하고 권태로운
졸음을 깨우는 건 뜸하게 지나치는 자동차가 살 떨며 달리는 소리뿐,
잔 속의 술도 고요하다 윗층 방에 누우니 애들 방 천정에 붙힌
야광별같이, 반짝이 의상 같은 별들이 가득 밀려든다
줄이 늘어진 현악기 같은 나날들..,나른함을 가끔 조율하는 것은 사막에
밑줄을 그으며 달리는 자동차의 굉음뿐이다
이 허허러운 사막 가운데서 손님이란 가족 같은 것, 허나 뚱뚱한 주인
여자와 걸어온 그녀는 사사건건 엇박자로 다툰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 배에..,내가 손뼉치며 다정해지는 방법을
알려준 게 탈이다
아니다, 넓은 여백에 떨어진 점點을 보며 서로 지우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바람이 지나가고 가끔은 자리를 허물고 세우는 모래 둔덕 같은
삶의 마술을 꿈꾸며, 나른함에 파묻혔다 일어서며 나른함을 털어냈다
그 한가한 카페로 마술에 빠져 들어서는 사람들을 밀치며 비켜 섰을 때,
자꾸만 멀어져 점點이 되어가는 바그다드 카페라는 마술 상자에서 벗어났다

다시 액자속의 그림 같은 바그다드 카페에서 돌아서서 빌딩숲을
걸으며 주문을 외듯이 바그다드 카페를 꿈꾸고 있다

 

2004년 현대시문학 봄호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