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배 시모음
1958년 경북 영천 출생
충남대 국어국문과 졸업
<화요문학> 동인
1997년 시집 <코고는 아내> 내일을 여는 책
2003년 <잘 있는가, 내 청춘> 내일을 여는 책
논산 <쌘뽈여고> 국어 교사
면벽(面壁)
키 작고 귀여운 아내가
십년이 넘도록 과외교습을 해서
우리네 식구는 잘 먹고
잘 살았는데
어젯밤 꿈 속에 그녀가 나타나
이제는 나이 먹고 힘이 들어서
이 일을 그만 해야 될까 보라고
잔뜩 허세를
부리는 듯하였으나
나는 혹시, 정말 그만 둘까해서
마음이 생선찌개 국물처럼 졸아들었다
꿈인 줄 알았더라면
꿈 속에서만이라도
당장 그만 두라고
큰 소리 한 번
쳐보는 건데
나는 애간장을 바싹 태우며
빈 벽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코딱지
한 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들과 함께 전단을 뿌린다.
민주, 자주, 동지 투쟁의 함성이 실린 그 시절의 불온전단이 아니라 아내가 운영하는 글쓰기 학원의 광고 전단을 아파트 현관에 남몰래 돌리다가 그만, 아들의 친구를 만났다.
아들은 괜찮다고 부끄럽지 않다고 했으나 거의 일을 마칠 무렵에는 조금 부끄러웠다고 코딱지만큼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는데 바로 그때 아내의 친구와 마주치게 되었다.
나도 코딱지만큼 부끄러웠고 그래서 아들의 코딱지가 얼마나 큰 코딱지였는지 알게 되었다.
신문을 보다가
출근하여 신문 이 면 저 면을 기웃거리다가 문화면의 베스트셀러 난을 펼친다. 베스트셀러가 좋은 책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오늘은
코너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도서명과 작가와 출판사를 순위대로 찬찬히 훑어보고 있으면 나도 베스트셀러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저번 출판사만 제대로 만났더라면 떴을 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이 지금도 들지않는 바는 아니지만, 두 번째 시집까지
출판을 기꺼이 맡아준 황사장이 내 심정을 모르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점이다.
배알도
없지
보리차가 끓고 있는 주전자 뚜껑이
가스렌지 위에서 저 혼자 들썩거리고 있는 겨울방학 때
나는 혼자 점심을 차려 먹는다
아내는 학원을 경영한다
우리끼리 말을 할 때는 학원이라 하지만
정확한 명칭은 교습소다
주로 글쓰기를 지도하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내가 돈을 번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월급이 줄어들어서
금년부터는 보너스가 없는 달이 네 번이나 된다고 했고
내년부터는 여섯 번으로 늘어날 거라는 소문도
있지만
아내가 돈을 버는 나로서는 별 걱정이 없다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하다가
물 묻은 손으로 전화도 받는다
욕심
나무들이 제 먼저 알고
스스로 잎새를 지우는
깊고 깊은 가을밤에
아우 부부와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먼저
취한 아우가
마음을 비우고 싶다고
오싹한 소리를 했다
그때 제수씨가
마음을 비우려는 욕심이
어디 보통
욕심이냐고
아우를 핀잔했다
나는 제수씨의 빈 잔에
얼른 술을 채웠다
출처, 네블,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