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김기택 시모음

휘수 Hwisu 2007. 3. 18. 07:37

1957년 경기도 안양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꼽추」당선

시집, 『태아의 잠』(1992),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

『사무원』(1999),  『소』(2005)

김수영문학상(1995), 현대문학상(2001), 이수문학상(2004), 미당문학상(2004) 수상

시와 시학 주간

 

천년 동안의 죽음
               
안데스산맥에서 발굴되었다는
한 잉카족 사내의 미라는
눈을 감고 온몸을 꼭 웅크린 채 얼어 있다
머리 가죽은 닳아서 해골이 드러나 있고
입고 있던 옷은 다 삭아
겨드랑이와 음부에만 조금씩 털처럼 붙어 있다
천년 이상을 죽어 있었던 그 육체는
이제는 시체가 아니라 폐허처럼 보인다
살은 거의 썩지 않았으며 다만
고대 신전의 돌기둥처럼 닳았거나 부서져 있을 뿐이다

그 사내는 죽음 속에 한창 익어가고 있다
질기고 고집세고 고약한 냄새만 풍기던 육체는
익을수록 흙의 색깔과 향기에 가까워지고 있다
음식물을 집어넣고 분비물을 배설하던 그 폐허에는
이끼와 나무 그리고 들풀의 뿌리들이 기웃거리고
갈비뼈와 심장과 내장 사이로는
뿌리를 유혹하는 자양분들이 가득차 있다
그러나 완전히 흙이 된 것은 아니어서
사내는 아직도 추위에 휘어진 등뼈 안에 들어 있다
흙벽처럼 조금씩 무너져 있는 무릎과 팔꿈치에는
돌이 되다 만 뼈들이 드러나보인다
천년이 넘도록 시간과 추위와 어둠만 들어 있던 얼굴은
한 덩어리의 흙처럼 생각 없고 꿈 없는 잠에 빠져 있다
푸른 잎과 붉은 꽃들이 곧 그 얼굴에서 피어날 것 같다
얼굴은 이미 풀내음 꽃내음에 한껏 취해 있다  

 

하품

다 본 스포츠 신문을 다시 훑어보는
무료한 얼굴이 잠시 긴장하더니
갑자기 가쁜 숨이 몰아친다
콧김과 입김이 심상치 않더니
코와 입과 턱에 근육이 돋더니
입이 공기를 크게 베어 물며 열린다
턱뼈에 무게를 싣고
느리지만 힘차게 벌어지는 입
얼굴의 중앙을 밀어 올린 정점에서
입은 숨을 멈추고 잠시 정지해 있다
포효하는 지루한 침묵
나태 속의 짧은 긴장
수축된 안면 근육에 밀려 반쯤 닫혀진 눈에
눈을 치켜 뜬 지하철 승객들이 보인다
치켜 뜬 눈 속에 목젖과 목구멍이 비친다
얼른 입을 닫아야 할 텐데
둥근 공기의 힘에 밀려 닫히지 않는다
질긴 고기로 단련된 이빨도
공기 한줌의 완력에 밀려 할 일이 없다
다물려 할수록 커지는 입 속으로
무덥고 탁한 것들이 거세게 빨려온다
입을 찢듯이 벌려 제 일 다 보고 나서
공기는 슬며시 입에서 빠져나온다
얼굴 주위에서 파리처럼 날던 권태는
입이 닫히자 기다렸다는 듯
얼굴로 몰려와 덕지덕지 앉는다
눈은 더 빨갛게 충혈되어 있다
좌우로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여
검은자위로 흰자위를 닦아 보지만
붉은 실핏줄만 더 선명해질 뿐이다
이렇게 소화 안되는 공기는 처음이야
입맛을 쩍쩍 다시며
얼굴은 무료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지하철 어둡고 어지러운 공기로 채워진 뱃속은
불만족스러운 듯 그르렁거리고
목젖은 딸꾹질처럼 맵다
덩치와 폐활량에 비해 턱없이 작은 콧구멍이
수상하다는 듯 다시 두 구멍을 벌름거린다

봄날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잔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햇볕을 채워넣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
온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 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
잘만 하면 한순간 뽀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할머니들은 마음을 저수지마냥 넓게 벌려
한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
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넘쳐
할머니들  모두 눈부시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추근거리던 봄볕에 못 이겨
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
오오, 얼마만에 환해져 보는가
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눈앞에는 햇빛이 종일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환한 빛에 한나절 한눈을 팔다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할머니들은 가끔 눈을 비빈다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그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혔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 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출처, 간이역에이는시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