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김금용 시인이 추천하는 시 3편

휘수 Hwisu 2007. 7. 6. 00:41

김금용 시인이 추천하는 시 3편

 

입이 큰 모녀 / 최문자

 

시간을 달라고 하던 어린 딸에게
돈을 주었다
천 원짜리 한 장 들고
울려고 하다말고 학교로 가던 딸

 

시간을 달라고 하면
돈을 주는 딸
만 원짜리 한 장 들고
울려고 하다말고 마트로 간다

 

우리는 입이 컸었는데
꿀꺽거리며 패트병으로 하나쯤
서로를 단숨에 들이켜고 싶었는데
너무 뻣뻣한 종이
너무 목마른 지폐로
목을 축이고
눈물 어린 눈을 가리고
둘 다 학교로 갔었다

 

시간은 참지 못하고
우리를 들이마시고
우리는 시간의 뱃속에 들어가
그 뒤틀린 내장을 지나는 동안

 

커피 한 잔을 타서 반씩 나누고
마들렌 과자봉지를 뜯어놔도
잠깐만, 잠깐만 딸은 외출하고
모래밭에 혼자 남는다

 

우리는 입이 컸었는데
큰 입에서 슬슬 나오던 타액처럼
하고 싶은 말이 혀 밑에 그렇게 고였었는데
그래서 죽어라고 목말랐었는데
시간의 生木 자른 자리
모래만 수북하게 남아 있다


 『서정시학』2007년 봄호

 

세살 아버지 / 강경호

 

부지런하고 셈을 잘 하던 아버지
늘 엄하고 잘 웃지 않던 아버지
지팡이 짚고 세 발로 걸으시네
어머니 말씀 잘 안 듣고
말썽만 부리시네
대꾸는 안하고
히죽히죽 웃기만 하시네
팔십 년 전 세 살 적 아이 되어버렸네

 

맛난 것만 골라 잡수는 아버지께
생선가시 발라 숟가락에 얹어드리면
내 막내딸 세 살처럼 잘도 받아 잡수시네
길을 가다 힘에 부치면
업어 달라 조르는 철없는 우리 아버지


장성한 자식들 바라보며
아침 나팔꽃처럼 환해지네

점점 나이를 까잡수는 아버지
팔십 년 기억 방전되고 있네
덧셈 뺄셈 구구단 모두 잊고
오늘은 배부른 젖먹이처럼
곤하게 낮잠을 주무시네

 

『창작21』 2007년 봄호
 
썩는다는 것에 대한 명상 / 신병은

 

  두엄을 져내면 거기 속 썩인 흔적 환하다

 

  팽개쳐진 것들의 잃어버린 꿈과 상처 난 말들이 오랫동안 서로의 눈빛을 껴안고 견뎌낸 시간, 맑게 발효된 생의 따뜻한 소리가 있다

 

  곁이 되지 못한 시간의 퇴적 속에서 헐어진 채로 낯선 외출을 준비하는 겨울 묵시록, 아직 할 말이 많은 세상의 행방불명된 말들이 다시 한 번 뜨거워지기 위한 기다림이라고 염치도 없이 환하게 닿아오는 맑은 생각,

 

  썩는다는 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뭔가로 다시 태어나고픈 것들이 젖은 기억 껴안고 산란한 눈부신 겨울 우화羽化, 맑게 썩어 향기된 함성들이 하얗게 겨울들녘의 혈맥을 세운다
 꽃이, 노란 봄꽃이 되고 싶다고  

 

『정신과 표현』 2007년 3,4월호


우리시」6월호에서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