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주 시모음 2
1976년 전남 광주 출생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
2006년 시집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2006년 렌덤하우스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 카피라이터와 영화
저녁의 동화
-구멍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도 저녁은 찾아온다
그 저녁에 닿기 위해
나는 나무의 구멍을 빚어 만든
당신의 오래된 기타를 생각한다
당신의 기타 속엔 오래된 강물이 고여 있고
활어떼가 흘러다닌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는 노래 안에 살고 있는 활어들의
아슬아슬한 수면
사랑이여
나는 그 아슬아슬한 수면을 향해서
내게 있는 투명을 조금 흔들었을 뿐이다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 살고 있는 저녁은
하늘에서 내려온
가장 늦은 그늘이 들어가는 자리다
그 저녁으로 들어온 그늘에 빗물이 묻으면
나무는 밤보다 어두워진다
어떤 짐승도 구멍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며
어떤 아이도 짐승처럼 구멍 안에 낮게 엎드려 울지 못한다
어둠은 저녁이 천천히 빚어내는 꿈이기 때문이다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온다
꿈을 꾸던 맨발의 아이들이 다가와
그 물을 손으로 받아 마시며 조금씩 늙어 돌아간다
당신이 지느러미를 흘리며 물속으로 돌아갈 때
나는 아무도 모르는 나무의 구멍에 입을 대고
목젖을 보였던 사랑이다
창작과 비평(2006년 겨울호)
고양이가 정육점 유리창을 핥고 있는 밤
거미들이 거리에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귓속으로 기아들어간다
고양이가 자정의 정육점 유리창에 붙어 있다
뒤꿈치를 들고 유리를 앞발로 긁는다
토막 난 얼굴들이 쓰레기통 속에서 화장이 벗겨진다
벽에 걸린 갈고리들이 음문을 벌린다
핏물이 시간 위로 떨어진다
물이 찬 형광등 안에서,
벌레들은 죽은 알을 낳는다
매달린 살덩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쓸쓸한 그림자 하나, 하체가 벗겨져 있다
고양이는 등을 세우고 노려본다
검은 혀가 고기의 목을 핥기 시작한다
침을 질질 흘리며 내장을 핥는
고양이의 허기가 가로등불에 환하다
혀가 빨고 있는 황홀한 굴옥
골목을 돌던 한 여자의 입이 틀어막히고 있다
목련
마루에 누워 자고 일어난다
12년 동안 자취했다
삶이 영혼의 청중들이라고
생각한 이후
단 한 번만 사랑하고자 했으나
이 세상에 그늘로 자취하다가 간 나무와
인연을 맺는 일 또한 습하다
문득 목련은 그때 핀다
저 목련의 발가락들이 내 연인들을 기웃거렸다
이사 때마다 기차의 화물칸에 실어온 자전거처럼
나는 그 바람에 다시 접근한다
얼마나 많은 거미들이
나무의 성대에서 입을 벌리고 말라가고 서야
꽃은 넘어오는 것인가
화상은 외상이 아니라 내상이다
문득 목련은 그때 보인다
이빨을 빨갛게 적시던 사랑이여
목련의 그늘이 너무 뜨거워서 우는가
나무에 목을 걸고 죽은 꽃을 본다
인질을 놓아주듯이 목련은
꽃잎의 목을 또 조용히 놓아준다
그늘이 비리다
부재중
말하자면 귀뚜라미 눈썹만한 비들이 내린다 오래 비워둔 방안에서 혼자 울리는 전화 수신음 같은 것이 지금 내 영혼이다 예컨대 그 소리가 여우비 는개비 내리는 어느 식민지의 추적추적한 처형장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 두고, 바닥에 내려놓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댕강 댕강 목 잘리는 소리인지 죽기 전 하늘을 노려보는 그 흰 눈깔들에 빗물이 번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카자흐스탄에 간 친구가 설원에서 자전거를 배우다가 무릎팍이 깨져 울면서 내게 1541을 연방연방 보내는 소리인지 아무튼 나 없는 방안에서 나오는 그 소리가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그대라는 봄을 타는지도 모르겠다 비 맞으며 귀신이 자신의 집으로 저벅저벅 문상 간다 생전에 신던 신발을 들고 운다 산에 핀 산꽃이 알토기의 혀 속에서 녹는다 돌 위에 해가 떨어진다 피난민처럼 나는 숨어서만 운다
다층, 2005년 여름호
구름이 백 년 전을 지나갔던 것일까
구름의 분위기가 물 안에서 흐려진다. 처음부터 다시 쓰자 구름의 저녁이 물의 이미지를 입는다. 물은 저녁이면 미미한 소리에도 자잘하게 부서져 서로의 몸에 가라앉고 가라앉고를 반복한다 인간의 예의들은 서로의 몸으로 가라앉아보는 데 있다
백 년 된 여관에선 타인이 놓고 간 잠의 예의를 먼저 갖추어야 한다 죽음같은 잠도 누웠다가 갔고 들것에 실려간 잠도 있었다 잠의 내력에 대해서 말한다면 당신은 어느 날 잠 속에서 따라갔던 꽃을 따올 수도 있다
잠 밖으로 가지고 나온 그 꽃을 이름 붙일 수 없는 한기들에게 보였다면 당신은 방금 지독한 살 하나를 지나간 것이다
누군가 새벽에 들어와 옆방에서 흘흘흘 오줌 누는 소리가 들린다 자세히 들으니 오줌을 누면서 그는 흐느끼고 있다 생이 눈물에 올라타고 있다! 방 안에서 몸에 흘려 있는 잠들이 눈을 뜨고 그 소리를 듣는다 지금은 새벽인데 밖에선, 구름의 저녁이 백 년 전 이곳을 지나갔던 것일까
그곳을 지나다가 백 년은 그의 몸에 이륙할 것 같은 나의 눈을 본 적이 있다 백 년 된 구름 아래서 꽃의 사인(死因)으로 죽고 싶은 적이 있다
피리
모를 심어가듯 구멍마다 숨을 심는다 갈라진 논길을 더듬는 단비같은 입술로 대궁 속, 소리의 가뭄을 교란시킨다 헛김만 가득한 어둠 속에 한 모 한 모 맑은 숨의 뿌리만을 묶어 심고 안창 깊은 곳, 오래 다진 울음들을 퇴비로 깔아준다 소리의 피를 빨던 거머리들이 녹아나기 시작하고 서서히 속내 오므리고 쓰러졌던 모종, 소리의 탯줄들이 풀리는 것이다 더운 바람만 요란했던 내부, 소리의 자궁 어디쯤에서 생쌀만한 슬픔들은 익어 가는 것일까 퍽퍽 뜨거운 눈물을 뱉어내며 태어나는 알몸의 벼들, 바람의 입술을 스치고 고랑 밖으로 쏟아질 때까지 쏟아질 때까지
우주로 날아가는 방1
방을 밀며 나는 우주로 간다
땅속에 있던 지하 방들이 하나 둘 떠올라 풍선처럼 날아가기 시작하고 밤마다 우주의 바깥까지 날아가는 방은 외롭다 사람들아 배가 고프다
인간의 수많은 움막을 싣고 지구는 우주 속에 둥둥 날고 있다 그런 방에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편지를 쓰는 일은 자신의 분홍을 밀랍하는 일이다 불씨가 제 정신을 떠돌며 떨고 있듯 북극의 냄새를 풍기며 입술을 떠나는 휘파람, 가슴에 몇천 평을 더 가꿀 수도 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이, 이 세상을 희롱하는 방법은, 외로워해주는 것이다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사랑이다 아버지는 병든 어머니를 평생 등 뒤에서만 안고 잤다 제 정신으로 듣는 음악이란 없다
지구에서 떠올라온 그네 하나가 흘러다닌다 인간의 잠들이 우주를 떠다니는 동안 방에서 날아와 나는 그네를 탄다 내 눈 속의 아리아가 G선상을 떠다닐 때까지, 열을 가진 자만이 떠오를 수 있는 법 한 방울 한 방울 잠을 털며
밤이면 방을 밀고 나는 우주로 간다
맨홀
친구여 오후엔 거미가 집을 버리고 떠났다네 거미는 벗
어날 수 없는 자신의 경계를 고민했네 자신이 만든 시간
속에서 오래 허기진 듯했네 날아오르고 싶던 컴컴한 시간
들이었겠지 비에 젖은 채 이곳에 들어온 거미는 빠르게
말라갔네 그리고 나와 몇 개의 음습한 방을 전전하는 동
안 버리고 떠날 때마다 몰래 따라오던 숟가락 젓가락 같
은 것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어떻게 외로움이 되어가는
지 스스로를 내부로 음모해가는 것 지하에 빈방을 만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내게도 잊어본 적 없는 말이 하나 있
네 엄마......그래 그 시간에 대해 물으면 나도 날고 있는
것이라네 낮엔 거미가 하던 대로 손톱을 세워 벽에 글씨
들을 새겨보네 밤이면 거미의 내란(內亂)에 들어와 이 생
을 의심하며 날개를 물어뜯는 나방의 눈을 오래 바라보네
생이 머물다 갈 공간들이 벽 안에서 조금씩 부서지는군
몇억 년이 지나도 암호로 남아버릴 이 시간, 제 내(內)를
질질 끌고 다니던 질서 같은 것이었을 걸세 나를 구해주
게 거미는 한번 떠난 집을 다시 찾지 않는다네
나는 지금 태양을 채집한다
1.
허공 사이로 둥근 피안이 놓여지고
돋보기 알에선 오래 전 묻어 있던
햇살 냄새가 난다 돋보기는 주술이다
물 속처럼 고요한 세계 속에서 햇살은
넘칠 듯 넘칠 듯 출렁거린다
어느 행성으로 가던 빛을 나는
지금 부르고 있는 것일까
한 생을 건너온 맑은 시간들
종이 위로 차르르 쏟아진다
가만히 보면 행성의 마른 돌가루 같기도 한
이승의 찬공기가 그 뜨거운 시간들에 닿아
치지직 타다
2.
생은 아련한 굴절이다
서랍 속이 복잡하던 유년, 채집망엔
수많은 시간들을 날아온 곤충들이
날개에 붙은 보송보송한 햇살들을 털곤 했다
적금을 소매치기당하고 낮술에 취해
돌아온 어머니의 속옷을 살 속에 넣어주는
아버지의 눈빛은 느티나무보다 젊었다
고통은 몇 개의 꽁트 같았다
나는 그 밤 우는 어머니에게 가장
웃기게 생긴 곤충 한 마리 보여주었던가
아침이면 차갑게 식은 곤충의 몸에서
부스스 떨어져 나오던 햇볕들, 그해 겨울
우리도 지상의 계절 위에서 잠시 떨던
몇 마리 뜨거운 시간이었을까
통장에 남은 이파리들을 세어 보고
새벽 대중 목욕탕 바닥에 나란히 누워
어머니와 나는 뽀얀 수증기 한 방울씩
이마로 뚝뚝 맞으며 오래 말.없.었. 다.
3.
고개를 들면 공터의 생수 같은 꽃잎들
소실점 잃고 흔들거린다 멀리
송전탑이 나르는 싱싱한 전기들이
순하게 엎드린 마을의 창문마다
불씨 한 장씩 부치고 있다
어머니 치약처럼 방안에 풀어져
타는 노을을 보고 있겠다
오래 전 나는 휘파람이었다
-1 바다로 가는 길
휘파람은 바람 위에 띄우는 가늘고 긴 섬이다
외로운 이들은 휘파람을 잘 분다
나무가 있는 그림들을 보면 휘파람을 불어 흔들어 주고
도화지 끝에서 푸른 물소 떼를 불러오고 싶다
대륙을 건너오는 바람들도 한때는 누군가의 휘파람이었으리라
어느 유년에 내가 불었던 휘파람이 내 곁을 지금 스치는 것이리라
죽어 가는 사람 입 속에 휘파람을 불어넣어 주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죽은 사람의 입에 휘파람을 불어넣어 주면 나는 잠시 그에게 옮겨가는 것이다
내 휘파람에선 아카시아 냄새가 난다
유년을 향해 휘파람을 불면 꼭 그 냄새가 난다
자전거위에서 부는 휘파람이 내 학업이었다
헌책방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골방에 엎드려 그 책 속에 불어넣었던 휘파람이 숨쉬고 있다 이스트에 부풀린 빵처럼 비 오는 날이면 휘파람은 방안 가득 부풀어올라 천장을 꽉 채웠다
휘파람이 데리고 가는 길로 끝까지 가지 마라 절벽은 휘파람의 성지이다 벼랑끝에서 다친 말을 버리면 말은 조용히 눈을 감고 마지막 휘파람을 불면서 내려간다
갈매기들이 휘파람을 불면서 날아간다
등대가 부는 휘파람은 절해고도의 음역이라 흉내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고래나 물고기들은 그 휘파람소리를 듣고 그물을 피하고
스스로 바다로 걸어 들어간 사람들은 내내 이 등대의 휘파람을 들으며 잔다 바다로 가는 길에서 나는 가끔 아버지의 옛날 휘파람소리를 듣곤 했다
여인숙에서 보낸 한철
한 밤중 맨발로 복도를 걸어가
공동화장실에서 몰래 팬티를 빤다
방으로 돌아와
발가락을 뻗어 스위치를 끄고 누우면
외롭다 미라처럼
창틈의 날벌레들은 입을 벌린 채 잠들고
어제는 터진 베개 솜 같은 눈들이
방안까지 뿌려졌다
내가 마지막이 아니라서
이 이불은 또 펼쳐질 것이지만
피부병처럼 피어있는 이불위의 꽃잎들,
밤마다 문틈으로 흘러온
옆방 기침소리처럼 피가 묻어 있는 것은
*
방안 곳곳 낙서처럼 살다간
사람들 머리카락 몇 줄,
손끝에서 가루로 부서진다
때 절은 하모니카를 속이불로 밤새 닦거나
철지난 주간지 위에 뜬 발톱을 깎아 놓는 일,
배를 잡고 화장실 순서를 기다리며
눈이 튼 사람들과 비린 아침을 주고받는 일은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독채에선
아침마다 작약냄새 환하게 피어올랐다
언제쯤 내 몸을 거절하지 않는 위증이
희망이 아닐 수 있을까
이불속에 들어가 라디오를 끌어안으며
사람들은 산다 허구처럼,
몇 줄의 최전방을 수첩 속에 갈겨 놓은 채
아침이면
나는 촛농처럼 조용히 바닥에 흘러있을 것이다
시작 (2004년 겨울호)
당신의 눈을 만져본 적이 있다
- 태내(胎內)
당신은 먼저 화구를 펴고 그 저녁의 공기를 그려넣기 시작한다 그러곤 구름 속을 서성이는 그늘이 공중으로 내려오고 있는 색과 먼 들판 끝에 서 있는 집 창문이 묽게 떠는 소리들을 그 저녁의 공기에 입혀준다 그러곤 저녁이 오면 입을 벌리고 죽어가는, 비린 벌레 몇 마리를 바람 가운데 흘려준다 벌레의 몸에서 나오는 축축한 물기들을 어떤 빛깔의 내부로 데려갈까 고민한 뒤 붓을 놓고 지그시 눈을 감는 당신은 이제 천천히 어둠이 고인 미끄럼틀 안에서 궁륭처럼 구부러져 자는 소년을 그려넣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아직도 사람을 그릴 때는 제일 먼저 눈부터 그려 넣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당신의 그림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조용히 당신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그것은 내가 아직 이 세상에 나오기 전, 부모가 줄곧 나를 상상하며 하던 일이라고 말해주어야 했다 어둠 속 베게 하나에 나란히 누워, 서로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으시며 그려보고 했을, 나의 눈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아가 우리는 네가 나오기 전, 없는 너의 눈을 오래 그려보았단다 그리고 우리가 언젠가 네 속으로 들어가고 나면 너는 우리 눈을 그보다 더 오래 들여다 보아야 한단다 죽은 아이를 안고 놀고 있는 부부의 목젖은 음악 속에서 기어 나오고 있는 사람을 닮는다 당신들은 이미 귀신이라는 사실을 그때 말해주었어야 했다
물속의 등고선들이 노을에 비친다 노을이 바람에 섞여 투명해지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물든 바람의 혈흔을 그리는 사람의 붓은 늘 젖어 있다 당신은 어두운 물감을 녹여 내 눈의 안쪽에 그 저녁의시간을 그려 넣고 나는 우리의 발밑으로 온 무겁고 딱딱한 그늘 안으로 몇 개의 물기를 그려 넣는다 눈물은 눈의 내장일까 눈 안은 너무 헐렁해서 눈물은 담을 육체가 없다며 웃는다 사랑이라며 당신은 헐렁한 내 손가락들을 만지며 잠든다 우연히도 너는 눈을 뜨고 태어났구나 그런데 확실하게도 너는 먼 훗날 눈을 뜨고 죽을 거야
바람이 자신을 지울 공간 하나를 찾으려고 당신의 몸 안에서 울고 있다 얘야 너도 언젠가 너와 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사람을 만난단다 분별할 수 없는 꽃들의 통로처럼 나는 그것을 어떤 불귀로 그려 넣어야 할까? 그것은 아름다운 물고기의 눈을 보면 쉽게 먹지 못한다는 인간의 무늬, 계곡에서 자는 사람,나비의 묘지들, 어둠 속에서 사라져버린 술래, 돌연한 무미(無味), 적막. 언젠가 나는 당신의 잠든 눈을 가만히 만져본 적이 있다고 고백해야겠다 구름의 내부를 천천히 거닐고 있는 나의 붓은 지금 혼수(昏睡)의 상태다 어둠속에 웅크리고 있는 내 몸 안으로 기어들어오고 있는 인간 하나 보고 있다면 나는 지금 당신의 눈빛이다
바다횟집
그 집은 바다를 분양 받아 사람들을 기다린다
싱싱한 물살만을 골라 뼈를 발라 놓고
일년 내 등 푸른 수평선을
별미로 내놓는다
손님이 없는 날엔 주인이
바다의 서랍을 열고
갈매기를 빼 날리며 마루에 앉아
발톱을 깎기도 하는, 여기엔
국물이 시원한 노을이
매일 물 위로 건져 올려지고
젓가락으로 집어먹기 좋은 푸른 알들이
생선을 열면 꽉 차 있기도 한다
밤새 별빛이 아가미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그물보다 촘촘한 밤이 되어도 주인은
바다의 플러그를 뽑지 않고
방안으로 불러들여
세월과 다투지 않고
나란히 살아가는 법을 이야기한다
깐 마늘처럼 둘러앉아
사발 가득 맑은 물빛들을 주고 받는다
목마가 세워진 골목
다세대 연립주택 아래 노인은
조금 남은 손톱으로 벽에 붙은 햇살을 긁어 본다
아이들이 뿌연 입김을 물고 잠든 새벽
전신주가 밤새 창마다 붙인 불빛 한 점씩 떼고 있다
노인은 포장을 걷고 목마의 귀를 흔들어 주며
창문에 촘촘히 맺힌 그림자를 바라본다
조용히 이불을 들추고 어둠 속에서
양말을 신고 있는 가장의 출근이
보풀거리는 벽지처럼 방안에 조용히 부스럭거린다
천막을 뚫고 날아오르려는 아이들의 함성이
봄꽃 마냥 펑펑 피어오르면 노인도
목마의 따스한 잔털에 엎드려 메콩강 지나
아내가 잠들어 있다는 골고다 언덕까지 달린다
동전소리 잘그락 잘그락 흔들릴 수록 꿈결은
등 짝에 몽골몽골한 땀방울 하나씩 매단다
삶은 늘 힘차게 삐걱거리면서 시작됐다
아이들은 어디까지 길들을 엮다가 내려오는 것일까
페인트 한 조각 풀썩 떨어진 말발굽이 뜨겁다
개숫물처럼 햇살이 동네를 조용히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노인은 아까부터 목마를 기웃거리던
터진 소매 하나 안장에 앉힌다 밤까지
용수철이 풍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