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인 시모음
1972년 서울 출생
가톨릭대학교 국문과와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
2001년 계간 《문예중앙》에 「영화는 오후 5시와 6시 사이에 상영된다」외 6편이 당선
2007년 시집 『한밤의 퀼트』(랜덤하우스)
마리오네트의 거울
*
당신은 시간을 거슬러 거울 앞에 당도한 사람
내가 따라온 당신의 뒤통수는 잠긴 자물쇠처럼 무표정했지만,
나를 돌아본 당신의 얼굴엔 아주 오래 전의 또 다른 당신들이 눈물처럼 얼룩덜룩 달라붙어 있었지
우리는 처음으로, 깨어진 조각인 듯 서로를 마주 보았네
*
여러 개의 얼굴 뒤에 숨어
살 오른 수탉과 만나러 갈 때면 늙은 엄마를 뒤집어쓰고는 암탉처럼 지저귀었고
한 무리의 구름 떼를 영접할 때면 아버지의 아버지를 불러내 공손한 앵무새를 흉내내느라 이가 몽땅 빠질 지경이었지만,
구름들은 너무 먼 이웃, 내 목소리를 금방 잊어버리곤 하였네
그런 날이면, 거울에게 물었네
―내 얼굴을 돌려주세요.
―어떤 얼굴을 갖고 싶으냐?
거울이 다정한 목소리로 몇 개의 표정을 꺼내놓고 흥정하였네
그를 향해 돌을 던지자, 내 얼굴에 박힌 무수한 표정들이 피처럼 쏟아졌네
*
수억의 죽은 이파리를 감춘 어두운 호수처럼
당신은 얼굴을 가린 사람
두 다리와 두 팔을 튼튼한 핏줄로 묶어
거울의 뒷면으로 나를 이끄는 사람
*
거울 속에는
늙지도 않는 얼굴들이 낙엽처럼 쌓여
또 그만큼의 거울을 들여다보고
한밤의 퀼트
밤이었는데, 나는 잠을 자고 있었는데, 누가 잠 위에 색실로 땀을 뜨나 보다, 잠이 깨려면 아직 멀었는데, 누군가 커다란 밑그림 위에 바이올렛 꽃잎을 한 땀 한 땀 새기나 보다, 바늘이 꽂히는 곳마다 고여오는 보랏빛 핏내, 밤이었는데, 잠을 자고 있었는데, 여자아이가 꽃을 수놓고 있나 보다, 너는 누구니 물어보기도 전에 꽃부리가 핏줄을 쪽쪽 빨아먹고 무럭무럭 자라나 보다, 나는 온몸이 따끔거려 그만 일어나고 싶은데, 여자아이가 내 젖꼭지에 꽃잎을 떨구고, 나는 아직 잠에서 깨지도 못했는데, 느닷없이 가슴팍이 좀 환해진 것도 같았는데, 너는 누구니 물어보기도 전에 가슴을 뚫고 나온 꽃대가 몸 여기저기 초록빛 도장을 콱콱 찍나 보다, 잠이 깨려면 아직 멀었는데, 누가 내 몸에서 씨앗을 받아내나 보다, 씨앗 떨어진 자리마다 스미는 초록 비린내, 나는 그만 꽃잎들을 털어내고 싶은데, 이마에 화인(火印)처럼 새겨진 꽃잎을 떨구고 싶은데, 밤이었는데, 나는 아직 잠을 자고 있었는데
구름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고 있군
나는 조금 가벼워진다고 생각해
미끈거리는 꼬리를 싹둑 잘라내고
뒤죽박죽 흩어져볼까
지독한 냄새를 흘리며
나무는 이파리에 숨어 초록을 견디는데
나는 여전히 초록이 두렵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복면을 뒤집어쓴 새는 지겹지도 않나 봐
오래 전 목소리를 흉내낸다네
또 무엇을 고백하려고
(앵무새야, 불룩한 주머니를 뒤지지 말아 다오.
성대가 잘리기 전에, 어서1)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당신은 자꾸 태어나지
그림자놀이 따윈 다 끝장난 줄 모르고
고백했다고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야
새끼를 가득 품은 눈먼 주머니쥐처럼
그물 속 새는 변성(變聲)을 거듭하며 새 이야기를 낳고
열 개의 손가락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지워진다네
나는 냄새를 풍기며 부드럽게 스며들지
가장 낯선 얼굴 속으로
영화는 오후 5시와 6시 사이에 상영된다
오후가 밀려나는 순간 영화는 상영된다. 거리로 밀려온 노을은 나 혼자 관객인 영화관의 문을 두드린다. 영사기가 차르륵 돌기 시작하면, 스크린 위로 피멍 든 여자가 불쑥 솟아오른다. 노을보다 먼저 지는 어머니의 얼굴은 아름다워도 될까. 여자를 잡으러 남자가 뛰어간다. 얼음 살갗인 아버지가, 쓰다듬으면 고드름처럼 깨져버리는 아버지가, 나하고 놀아요 하면 눈사람처럼 녹아 사라지는 아버지가, 너 죽어, 모두 죽자 하고 어린아이처럼 뛰어가고 문을 쾅 닫고 도망가고 아직 어린 언니가 누에고치마냥 문고리에 매달려 흐느끼고 그들이 버린 화분 안에서 우리는 목이 말라요 물 좀 주세요 씨앗 하나 갖고 싶어요 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잉잉거린다. 화면 밖의 내가 스크린을 찢고 들어가 아이고, 얘들아 어린 나에게 물 한 동이 얼른 떠주고 도망간 남자와 여자를 찾고 저녁을 차려주고 아직 어린 언니를 찾아 얼굴을 씻기고 울지 마 달래다 내 안의 수문이 터져버리는 순간 젊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쓸려나가고 감자 줄기처럼 딸려온 유년이 잠기고 아이고 이걸 어쩌나 내가 눈물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영화는 종영된다. 사방으로 번진 물길은 내 안의 집을 수몰시킨다. 영화관 밖 보트 위에서 한 아이가 흰 깃발을 흔들고 있다.
검은 편지지
누군가 내 속 깊이 숨어들어
차곡차곡 접어둔 편지를 뜯고 있어
잠 밖에서 서성이던 내가
편지를 감추려 뛰어들면
어디선가 우르르 천둥이 치고
집으로 가는 계단이 무너지고
끊어진 층계를 따라
저 혼자
절뚝이며 달리는 어린 그림자
나를 붙들고 있어
머릿속, 줄줄이 늘어선 검은 잉크병들이
왈칵 쓰러져 그림자를 덮치면
까맣게 탄 거리 위로 앰뷸런스가 달려오고
타다 만 집이 솟아오르고
집 안엔 또 내가 하나 둘 셋
담배꽁초 나뒹구는 마루에 앉아
불에 덴 손가락으로 또 편지를 쓰고 있어
방 안에선 엄마가
편지 따윈 그만 쓰라고 타이르고 있어
(엄마, 오늘만 좀 참아줘요
누군가 편지를 또 뜯었나 봐요)
까만 글자들이 몸 안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어
날마다 낡은 글씨만 늘어놓은 채
쿵쿵 뛰기만 하는
지겨운 내 종이가 닳아가고 있어
자꾸만 목울대를 움켜쥐는
이 무거운
글자들을 다 쏟아내야 할 텐데
어긋난 길만 만드는 지문도
찍어 보내야 할 텐데
조강석(문학평론가)의 ‘작품해설’ 중에서
김경인의 첫 시집 『한밤의 퀼트』는 물질적 상상력에 크게 의존하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구름과 피와 뿌리 등의 이미지인데, 이들은 공히 물의 운명과 결부된 상상력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물은 운명의 한 타입이다. 물질적 상상력의 한 갈래로서 물에 대한 몽상은 운명에 대한 몽상이며, 그것은 흔히 물에 대한 형태적 이해를 통해 종종 소재화되는 것처럼 헛됨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본원적으로 존재자의 지반을 흔들고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려 드는 어떤 운명 혹은 힘에 대한 몽상이다.
‘물의 심적 환상’이란 말로 바슐라르가 포괄하는 마음의 ‘물질적’ 사상(事象), 즉 빠르게 휘감으며 치솟고 꺼지다가도 태연히 기저의 무게로 환원되는 물의 물리적 심상과, 뿌리와 싹, 수몰(水沒)과 부상(浮上), 죽음과 삶이 한통속인 어떤 내적 세계에 대한 양가적 표상이야말로 물질화하는 몽상이 제대로 길 잡을 때 보여줄 수 있는 내적 운명의 한 양태임은 틀림없다.
출처,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