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김경민 시모음

휘수 Hwisu 2006. 10. 24. 12:55

1954년 서울 출생

부산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0년 한국문학에 <어둠의 집> < 회전> <계단위의 폐허>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

시집,<성 모독> 1993년, <붉은 십자가의 묘지> 1998년 

시문화회관 대표

  

시간의 음표

 

그가 치는 실로폰 소리 딩동댕
골목 어귀 반장집에 조등 내걸리네
아파트 불빛 꺼지고 딩동댕
별똥 하나 속셈학원 옥상으로 떨어지네
딩동댕 과일은 익어 제 몸을 터트리고
가을은 와서 아직 붙어있던 몇 잎사귀
떨어지네 딩동댕 나뭇잎이 수액이 되듯
씨앗은 그루터기가 되지
그가 치는 실로폰 소리 딩동댕
사막이 푸른 바다가 되고
고통은 붉은 꽃술이 되네
딩동댕 새들이 제 깃털을
알에서 막 깨어난 아기의 눈썹 위에
얹네 세상의 가장 작은 것들의 이마와
가장 거대한 것들의 머리 위로
딩동댕 그의 음표가 얹혀지네

 

시간의 길손· 2

 

역사(驛舍)는 어둠에 싸여있다
늘 갈곳을 망설이던 사람은
닫혀진 매표구 옆에 길게 놓여있는
나무의자에 술에 취해 누워있다
그를 두고 그의 꿈은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반딧불처럼 멀리 떠다니는
마을의 불빛은 너무 아득해
마치 이승의 세계가 아닌 듯
사내가 살고있는 안개 속에서
잠시 나타나곤 사라지는 신비의 성채(城砦)같다
성채의 입구에서
그는 또 어디를 헤매는 것일까
어디로 가기 위해 이곳에 닿은 것일까
두 어깨에 피곤을 진 역무원이
역사의 외등을 끈다
대합실에서 잠시 멈칫하던 곤색 제복이
나무의자로 다가간다 잠시 후
불이 꺼지고 웅얼웅얼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사내의 기척 위로
별들이 사다리처럼 내려온다  
 
구두 
 

구두가 놓여있다
음식점 방문 어귀
가지런히 벗어놓은 그녀의 구두를
다른 구두가 밟고 간다
가벼운 그녀로서는
주체할 수 없었던 그녀의 운명과
아름다워서 깨지기 쉬운 영혼을
싣고 다녔던 볼 좁은 구두 한켤레
이제 분주한 신발들 사이에
밟히고 채여서 조금씩 멀어지고
더러워진다 한때 익숙한 길만을 걸었던
작은 발보다 더 커져버린 구두
주인을 두고 저 혼자 걸어가버릴 듯
귀엽고 작은 구두 한 켤레
방문 어귀에 넘어져 있다 
 
낡은 가방의 사내 
                -추모시-

           

낡고 검은 조그만 가방 속으로
한 사내가 들어갔지 그래서 사내는
안경 쓴 조그만 가방이 되었지
줄자와 망치와 뺀치로 가득한
사내의 몸 속에는
한 묶음의 빛바랜 수첩이 있었지
잠 못 이루는 사내는 밤새 수첩을 뒤적이고
시(詩)들은 책갈피 사이를 벌레처럼 기어나와
잠든 나의 귓속으로 흘러들어오지
공사장 귀퉁이에서 낡은 잠바 주머니로 옮겨진
그의 잠을 파먹는 글자의 벌레들은
언제나 빛바랜 수첩에 담겨 있지
그는 글자의 벌레를 먹고 사는 사람
언제나 말이 없는 그의 입술에는
오늘을 얘기하는 조용한 수다처럼
질겅질겅 씹힌 담배꽁초가 물려 있었지
안경 밖으로 가끔씩 나왔다 들어가는
맑고 착한 눈을 데리고
영혼은 깃털 같이 공중에 떠올라 사라져
작고 깡마른 육체는 세상 깊숙이 가라앉았지
빛이 있는 허공마다 호외처럼 흩날리며
거리 가득 벽보처럼 붙어 있는 그의 얼굴이
내딛는 내 발걸음마다 달려와 밟히곤 하지
이제 아주 오래된 따뜻한 기억처럼
낡고 조그만 가방이 된
빛바랜 수첩 속의 한 사내가 있지


죽은 황제를 위한 조곡(弔哭)


황제가 죽었다
꽃집의 꽃들은 모두 관 위에 덮였다
우리들은 검은 리본을 달고
황궁캬바레에서 춤을 추었다
모르는 여자의 허리를 껴안은 채
모르는 남자의 발을 밟으며
아무 음악에나 몸을 맡겼다
우리들은 용감해졌다
갑자기 용감해진 사람들이
황제의 조상(彫像)을 향해 술병을 던지거나
벌거벗고 거리를 활보했다
황제의 근위병들은 칼을 던지고 횃불을 들었다
칼은 이제 시민의 것!
칼을 가진 시민들이 황제의 침소를 거닐고
궁전의 벽에다가 오줌을 누었다
노예와 후궁들은 구시대의 압정을 얘기하며
부르르 치를 떨거나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반지를,
손을 높이 들었다 자유를 위하여!
비겁한 사람일수록 용감해졌다
갑자기 수많은 황제들이 생겨났다
세상은 이제 거대한 궁전,
네거리와 정거장과 술집과 극장과 여관
목욕탕마다 수많은 황제들로 붐볐다
그들은 스스로 명령을 내리고
스스로 명령을 수행하거나 거두었다
황제의 옛 신하들은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가족의 얼굴을 몰라보거나
제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던
몇몇 의식있는(?) 추종자가
황제의 전성시대에
시민들 탄압하고 독재를 비호한 죄목으로
벽장속이나 지하실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자
재판정의 시민들이 외쳤다
"죽여라"! 한 소리로 외쳤다
시도 때도 없이 신중한 재판장이 물었다
"어떻게"?
"교수형을 시켜라"!
"총살시킵시다"!
"물을 먹여 죽여야 해"!
"개스실에 보내자니깐"!
"전기의자에 앉힙시다"!
"때려 죽여"!
"화형시키자고"!
"단두대로 보냅시다"!
"굶겨 죽여요"!
저마다 새들처럼 지저귀자
빠진 깃털들이 법정바닥에 수북히 쌓였다
흥분한 사람들은 경위를 때리거나
재판정 의자를 부수고
재판장에게 새똥을 던졌다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언제나 옳은 사람으로 세상은 넘치지만
늘 표정이 없는 회색분자들은
슬슬 죽은 황제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않았다
황제는 많은 것을 유산으로 남겼지만 그 중
불신은 황제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