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금기웅 시모음 / 현대시학

휘수 Hwisu 2006. 5. 1. 00:54

<신인공모 당선작>

(제3회) 2001년 4월호 : 이수정,금기웅

 

 

다시 탄천에서

 

양재천, 한강으로 흘러드는 모래밭
늦은 겨울 저녁을 걸었다
바람이 한 떼의 갈대 숲을 지나
오래 전에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흔들며 지나가고
건초들 마른 품속에 둥지 틀었던
청둥오리는 아직 제 길 떠나지 못하고 있다

고층 빌딩을 한번 휘감은
저 서북 뒷바람이
건조한 도시의 언덕에서 뒹굴거나
깊은 강심 마구 흔들어놓아도
지난 장마의 쓰린 기억으로 남아 있는
갈대는 쓰러지지 않는다, 그대로 섰다

다만 크게 자라지 못한 청둥오리 떼만
이따금씩 검은 하늘을 제자리걸음으로 떠돌 뿐
저녁 틈새를 헤집고 들어온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흔들어대도
시간은 비워진 강가에 얼어붙은
음산한 죽음들처럼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정지해 있다

문득 갈대가 보이지 않는다

 

떠나는 기억들의 저장은 완강하다

아침햇살이 안경 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빛은 힘을 준다
찬바람에 다리 후들거리는 갈대들 아래로
물은 주름을 만들며 조용히 제 길을 간다
모래도 퇴적층으로 제 그림자 그리고 있다
따스한 양지쪽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마른땅 깊이 박힌 풀씨들을 부지런히 쪼아대는
철새들 바라보면 눈물난다
그들도 일부러 눈물흘리지는 않는다
때가되면 떠나야 하는 우리와 닮았으므로

강물속의 철새 두 마리 움직이지 않는다
전신으로 찬바람 받으며
두발 흐르는 물에 견고히 박고 섰다
제 몸까지 저장하는 것일까
머리는 목 깊은 곳에 숨겨두고
바람에 온 깃털 날리도록 맡겨둔 채
깊은 법열에 빠진 것일까 떠나기 전에
이곳의 모든 기억들을 온 몸에 저장하는 중일까
내가 이렇게 심하게 떨며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그를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나도 그에게 저장된다
오늘 내가 이곳에 와서 그의
마음 근처를 배회하리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으리

떠나는 기억들의 저장은 의외로 완강하다

 

흑백사진


희뿌옇게 된 흑백사진 한 장 펼쳐 있다
배경은 눈부신 흰빛으로 덮여 있고
빽빽이 식재된 주검처럼 보이는
저 검은 나무들 사이를 지나 걸어 들어가면
또 폭설 쏟아지려는 듯
하늘은 구름 뒤집어쓴 채 내려다보고 있다

내가 응시하는 만큼만
모든 것들은 선명히 보이기 시작한다
저 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두꺼운 덮개들을 뚫고서
가장 사물을 잘 볼 수 있는 순간은 지금 이때다
발 밑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아이젠 눈 긁는 마찰음들을 끌면서
산을 내려올 때
심장 더워지고 등허리 땀 조금 맺혔을 지금 이 순간

어째서일까?
내가 편안히 누워있거나
벽에 등 기대면 전혀 보이지 않던 저것들,
깊은 내면에서 꿈틀거리기만 할 뿐이었던 그것들
하산의 고통과 만나 함께 어깨동무하듯 헤어나오면
비로소 세상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희뿌옇게된 흑백사진 한 장으로 인화된
삶의 내부들이 겨울 하늘에 걸린 채 펄럭거리고 있다

세월

터널은 바퀴자국을 내장으로 안고 있다
입구부터 낮게 가라앉아 있던 두려움도
일단 첫 바퀴 들여놓으면
고개 숙여 제 발 밑 내려다보는 궁륭의 불빛 따라
도로는 한쪽으로 몸 기울어져있다
출구 쪽 희망 가리키고 있다
이리저리 꼬인 창자를 순탄하게 통과할 때는
즐거운 기억들만 꿈꾸지만
온통 막혀 제 약속시간 놓치게 될 때는
급성장염처럼 끓어오르는 매연 가득 마시면서
아무런 기대조차 없이 한 시절 보내야 한다
어떤 사물들도 담겨 있던 견고한 궤짝들을 빠져 나와
허공을 떠돌다가도
어느 날 문득 제 모습 찾아가 보면
이미 한쪽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얼마나 더 닳아져야 편안히 사라질 수 있을까
버티다 보면 더 빨리 마모될 뿐
우리가 낡은 운전석에 앉아 떠들며 길들 지우는 사이
제살 깊이 파인 터널은 흐느낀다

드디어 터널 밖으로 나왔을 때
도시의 휘황한 불빛을 건너 세월은 폭주족이 되어
누구의 마음속으로든 빠르게 질주한다

 

안심

툭 떨어진 밤 한 송이
등산화로 눌러 보았다
터진 빈 껍질 속의 욕망만 바닥에 뒹굴었다
맑은 햇살 쪼이며 몇 개의 잎새로 버티고 있는
가을 밤나무 뒤에서
까만 청설모 한 마리 조그만 입으로
껍질 터진 가을 하나 가득 물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쳐다보고 있다
의심하는 눈치였다
내가 미소를 보내자
내 안심을 그제서야 보았는지
그 둥근 시간을 두 손으로 안고
이리저리 굴리며 껍질을 깐다
낙엽을 깔고 앉아
이제 온산 가득 쏟아져 나오는
말의 잘 익은 알맹이들을 먹는다
놈은 내 미소 냄새를 맡았고
대신 나는 놈이
둥근 시간이 되어 가는 걸 훔쳐보았다

서로 안심을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