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관련

글쓰기는 연애다 / 고재종

휘수 Hwisu 2007. 3. 19. 06:45

글쓰기는 연애다 / 이문재

“지금으로부터 약 4백여 년 전”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기자들이 들어오면, 내가 제일 먼저 내미는 글귀다. 귀로 듣기에는 어색하지 않지만 글로 써 놓고 보면 이내 허점이 보인다. 하지만 햇병아리 기자들 가운데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숫자는 절반이 넘지 않는다.

위 글귀에서 ‘약’과 ‘여’는 같은 의미이다. 그러니 동시에 쓰면 안 된다(‘역전 앞’처럼). 비문이다. 비문은 언어의 낭비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백년 전’이거나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 전’이라고 써야 옳다. 언어의 낭비는 독자를 지루하게 하고, 사실을 왜곡시킨다.

후배들의 기사를 스크린하면서, 내 글쓰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관념과 감상, 모호한 수사가 배제되었다. 사보나 잡지에서 ‘느림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써 달라는 청탁이 와도, 내가 써서 보낸 글에는 여백이나 여운, 그리움이나 아련함이 거의 없다. 굳이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장르인데도, 나는 구체적인 체험을 끼워넣으려고 애쓴다. 이른바 디테일이 없는 글은 죽은 글이라는 ‘고정관념’까지 생겼다.
글쓰기는 관찰력과 기억력, 상상력이 뒤엉키는 과정이다

비유하자면, 글쓰기는 연애와 흡사하다. 사랑할 때 보라. 사랑하는 사람들은 병적일 만큼 뛰어난 관찰력을 발휘한다. 눈빛이며 목소리, 손가락의 방향, 걸음걸이 등 모든 것을 감지한다. 연인을 바라보듯이 대상을 관찰해야 한다.

기억력은 또 어떤가. 지난 번 만났을 때 나눈 이야기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헤어지자는 신호나 다름없다. 기억력이 좋아야 연애에서 실패할 확률이 낮아진다. 관찰력과 기억력은 ‘형제 사이’이다.
상상력이 있는 사람은 연인을 즐겁게 해 준다. 구태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매번 새롭게 이끈다. 상대방의 기대를 보기 좋게, 다시 말해 상쾌하게 배반한다. 상상력은 기존의 틀을 깨는 힘이다. 새로운 것을 함께 나누는 능력이다. 도전이고 모험이다.

글쓰기는 글을 쓰는 사람과 그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도 연애와 닮은꼴이다
가장 행복한 글은 글쓴이와 글을 읽은 이가 폭넓은 공감대를 가질 때이다. 남자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자가 한눈을 팔고 있다면, 그 사랑은 이내 불행해진다. 여자가, 혹은 남자가 한 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하는 흥미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어디에서 나올까. 관찰력, 기억력, 그리고 상상력이다. 유심히 바라보았던 어떤 풍경(그것은 책이나 영화라도 좋다)을, 정확하게 되새기되, 그것을 보다 참신하게 빚어내지 않으면, 상대방은 하품을 하며 손목시계를 훔쳐볼 것이다. 관찰력과 기억력은 상상력의 지휘를 받으면서 완성된다. 관찰력과 기억력이 카메라와 배우라면, 상상력은 감독이다.
글쓰기는 말걸기이다(듣기가 읽기인 것처럼)

누구에겐가 말을 건다는 것은 첫 마디를 던진다는 것이다. 처음 몇 마디가 뒤엉켜 버리면 끝장이다. 내 후배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이 말을 꺼내는 친구가 있다. “저어, 있잖아요, 제가, 며칠 전부터 생각한 것인데요, 선배에게도 전에 한 번 말씀을 드린 사항인데……” 그래서 그 후배가 다가오면 나는 이렇게 쐐기부터 박는다. “너, 결론부터 말해.”

글도 마찬가지다. 모든 글쓰기는 첫 문장 쓰기이다. 나는 후배 기자들에게, 기사의 첫 문장은 ‘호객 행위’라고 말한다. 단편소설은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필름도 도입부를 매우 중시한다. 리모콘이 등장한 이후, 텔레비전 프로그램, CF 제작자들은 강박증이 생겼다. 첫 장면에 승부를 걸어라. 처음 몇 초 안에, 시청자를 붙잡지 못하면, 채널을 바꾸기 때문이다. 모든 글은 첫 문장이다!

이 지면을 통해, 글 잘 쓰는 비결을 하나 공개한다. 내가 잘 아는(이름 석 자 가운데 한 자만 대도 독자들 대부분이 알 수 있는) 시인은 시를 한 편 완성하고 나면, 첫 문장을 백 번 이상 소리내어 읽는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다시 읽어 본다. 첫 문장이 흡족해야 시를 발표하는 것이다. 거듭 반복한다. 첫 문장에 목숨을 걸어라. 
  
이문재
『시사저널』편집위원

1928년 시운동으로 등단

시집,『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 줄 때』『산책시편』『마음의 오지』등

 

출처, 간이역에이는시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