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미쳐, 제주에 홀려
때론 자유도 병이다, 중독이다. 여기 평생을 자유 아닌 것과 화해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유 안에서 호흡하고, 오직 자유로 말미암아
사유하고, 오직 자유의 뜻으로 살아온 ‘천생 자유인’이 있다. 김영갑. 사진작가. 독신. 사진은 그에게 직업이기 이전에 삶이었으며, 삶과 작업을
한 몸으로 묶어 그 몸 또한 영혼을 따라 한없이 자유롭고자 하였으나, 늘 자유에 목말랐고, 늘 자유의 표현에 가슴 졸이다가 하염없이 자유의 결을
따라 유영하였다.
자유는 고독의 뿌리이며, 고독은 자유의 열매다. 자유는 고독을 낳고, 고독은 자유를 키운다. 이 자유의 변증법 앞에서, 김영갑은 절대
자유를 찾아 절대 고독 안으로 들어갔고, 절대 고독 안에서 그의 실존은 묘연하였다. 그 안에서 김영갑은 ‘삽시간의 황홀’을 경험한다.
강신(降神)의 오르가즘이다. 절대 고독의 선계를 훔쳐본 그의 영혼은 날개를 얻었으나, 그의 육신은 무너졌다.
사진에 미쳐, 제주에 홀려, 세상을 등지고 카메라를 앞세워 한라산 중턱을 누빈 지 어언 20년. 마침내 천신만고 끝에 득의의 안목을
얻었으나 5년 전 원인도 모르는 중병을 얻어 카메라를 들 힘조차, 셔터를 누를 힘조차 없는 몸이 되었다. 근위축성 측삭경화증, 이른바
‘루게릭병’으로 불리는, 10만 명 가운데 1~2명에게 발생한다는 희귀병이다. 근육이 점점 오그라들고 급기야 호흡에 필요한 근육마저 녹아 없어져
죽음에 이르는 퇴행성 질환이다. 아직 치료법도 발견되지 않은, ‘길어야 3~5년을 넘기기 힘들다’는 낯선 병을 안고 여러 병원을 전전한 끝에,
발병한 지 3년이 지나서야 겨우 병명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죽조차도 병아리 물 마시듯 고개를 천장으로 젖혀야 삼켜지는 천형의 몸으로, 그는 2001년 남제주군 성산읍 삼달리의 한 폐허 초등학교를
임대하여 이듬해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열었다. 운동장이던 자리에는 몸소 공사를 챙겨가며 제주의 풍광을 상징적으로 압축한 산책로 겸 정원을
꾸몄다. 제주의 오름처럼 쌓은 돌무덤들과 기괴한 형상의 화산석, 바람에 이리저리 휘어진 나무 등속이며, 억새와 수선화, 풍란과 들꽃들이 꿈결처럼
어우러진 정원이다. 정원 여기저기 김영갑을 닮은, 슬픈 듯 초월한 듯 호리호리한 형상의 도예 소품들이 흩어져 앉은 모습은 흡사 희로애락과
애오욕을 담은 칠정의 소인국처럼 아련하다.
갤러리에는 평생 거둔 20만여 컷의 작품을, 3~4개월에 한 번씩 바꿔가며 전시한다. 열악한 여건의 창고 속 습기로부터 필름을 보호하려는
속뜻이 담겨 있는데, 그동안 비바람과 진흙에 망가지고 곰팡이의 먹이로 곰삭아 불쏘시개로 사라진 필름만도 수만 장에 이른다.
김영갑의 사진을 처음 본 사람들은 두 번 놀란다. 하나는 그의 독특한 프레임과 스타일 때문이다. 그의 사진은, 사람들이 흔히 보아온 제주의
앵글이 아니다. 일단 명승지에 관심이 없다. 애초부터 그를 매료시킨 것은 관광명소가 아니라, 이 섬의 혹독한 환경과 그 궁벽에 깃든 삶의
비장미였다. 김영갑의 사진은 거개가 두모악(한라산의 옛 이름) 중턱의 숱한 오름들과 중산간 일대의 풍광, 곤고한 바다의 모습, 그리고 마라도다.
그 형상을 담기 위해 여러 프레임들을 실험한 결과가 지금의 파노라마 컷이다.
이 생경함으로, 제주 사람들조차 그의 사진을 두고 제주 같지 않다고 생뚱맞아한다.
다음은 사람의 영성을 깊숙이 빨아들이는 사진 속의 영기(靈氣)다. 김영갑이 카메라에 담은 것은 어차피 제주에 널린 풍경일 뿐인데, 그의
심상을 거쳐나온 풍경은 예사 풍경이 아니다. 기교를 배제하느라 필터 따위를 일체 쓰지 않았고, 일부러 예쁜 구도를 찾아 바위틈을 헤매지도
않았다. 새와 비행기, 나뭇잎 등으로 여백을 채우는 카무플라주도 거부했다. 그의 사진에는 오직 하늘과 바다, 오름과 숲이 만나서 빚어내는 담백한
선이 프레임을 받쳐줄 뿐이다. 그 프레임 안에 바람과 구름, 안개, 빛과 그늘로 영감을 빚었고, 시간과 외로움과 평화를 그려냈다. 그리하여
태양의 신, 바다의 신, 바람의 신, 산과 숲의 신들이 김영갑을 위해 조화를 부려준 듯, 혹은 붉고 뜨겁고, 혹은 무겁고 아득하며, 혹은
휘황하고 가물가물한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화면 속 깊은 곳에서 가이없는 기시감으로 울렁거리는 것이다.
김영갑은 결코 사진을 설명하지 않는다. 모두 16차례의 개인전을 가졌지만, 사진을 전시하면 그뿐 전시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사진에
제목을 붙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본다는 행위에도 육감이 동원되어야 한다. 종합적인 감동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제목이 붙는 순간,
사진과 관객 사이의 이심전심이 구속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저 전시회 타이틀로 아우를 따름이다.
단 하나의 이정표도 없건만, 산간마을 깊숙이 숨어 있어 설명을 듣고 찾아가도 길을 잃기 일쑤인 두모악 갤러리가 어느덧 제주의 명소가 되어
매년 3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다녀간다. 굳이 바란 적도 없는데 제주 관광지도에도 버젓이 갤러리가 표기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김영갑은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웃는 데도 근육을 써야 하므로, 고통 때문에 그는 되도록 웃지 않는다). 그의 웃음은, 어렵사리 거둔 사회적 성취가 기뻐서가
아니었다.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좌절과 허탈의 허방에서 스스로를 다잡을 때마다 되뇌이던 신념, 혹은 오만이 바야흐로 결기를 푸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가 최근에 출간한, 자신의 삶과 삶의 이유와 병마에 얽힌 이야기를 적은 자서전 겸 사진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Human
& Books 펴냄)를 보면 ‘동백꽃은 동박새를 유혹하지 않는다’라는 꼭지가 있다.
그가 제주에서 제일 좋아하는 동박새가 어느날 창밖 동백꽃을 찾아와 노니는 모습을 보고 문득 떠오른 사유를 적은 글이다. ‘꽃을 찾아드는
벌과 나비들을 볼 때마다, 내 사진도 그래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요란스럽게 떠벌리지 않더라도 말없이 감동을 전해줄 수 있다면 한 사람 두 사람
사진을 보러 찾아올 것이다. …(중략)… 동박새는 모른다. 동백꽃을 피우기까지 나무가 견뎌낸 고통의 시간을…. 동박새는 꽃이 떨어지면 동백꽃을
기억하지 않는다. 동박새는 다음해 동박꽃이 피어야 다시 올 것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동박새의 습성을. 가슴의 불꽃은 늘 동박새가 아니라, 그 자신을 향해 타올랐다. 그의 책에는 ‘독하게 마음
먹고…’ ‘모질게 다짐했다’는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 이 내연의 불꽃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김영갑은 없었다. 두모악의 오름을 누비는 20년
세월도 없을 것이었다. 기실 그의 생애를 통틀어 그가 가려는 길을 진심에서 이해하고 격려해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안타까워하고, 걱정해준 몇몇이
있었지만. 심지어 삶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 필름이 떨어져 온갖 노력 끝에 최후로 믿고 찾아간 선배마저 ‘밥은 사줄지언정 필름만은 한사코
사주지 않았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독종이다. 절망의 막바지에서, 마라도 등대 바로 아래의 30m 수직 절벽 끝에 차려 자세로 서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스스로 몸을 떠밀어 정신을 곧추세우는, 그런 독종이다. 다섯 달 간격으로 부모님을 차례로 여읜 뒤, 늘 가슴으로 울음을 삼켰을 뿐 제사 한 번,
성묘 한 번 다녀오지 않은 그런 독종이다.
평생을 두고 김영갑은, 흔히 세속의 언어로 지칭하는 ‘순리’를 따라본 적이 없었다. 뜻이 세속 밖에 있으니 세속의 언어에 귀 기울일 수
없었고, 세속의 지혜에 머리 조아리지 않으니 세속 또한 그를 품어주지 않았다.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일찍이 고향을 떠난 뒤 오래도록
뒤돌아보지 않았고, 1985년 제주에 닻을 내리고부터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부모형제와 사랑하는 연인마저 뭍에 두고, 홀연히 떠나와 제주의
풍광에 삶을 맡겼다. 애초 영욕에 뜻이 없었으므로, 세속의 품 밖에서 김영갑은 그렇게 40여 성상을 평행우주처럼 각기 다른 시공으로 살았다.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하냥 세속의 스피드를 거슬러 오르다가, 마침내 용문(龍門)에 이르러 그의 영혼은 나래를 펴고 창공으로 날아올라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고, 햇살이 되었다.
김영갑의 제주 생활은 집도 절도 없는, 말 그대로 눈, 비 맞는 동가식서가숙(동쪽 집에서 얻어먹고 서쪽 집에서 끼여자는)으로 시작되었다.
돈도 궁했지만, 중산간 지대에서는 집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방 한 칸을 나누어 침실과 암실로 쓰는 사실을 알게 된 주민들이 기겁을 했을
뿐더러, 무엇보다 부엌이 따로 달린 집이 거의 없었다. 주인과 같은 부엌을 쓰자니 끼니 때마다 좁은 부엌에서 서로 부딪치기가 민망했고 굳이 빈
틈을 살피기도 거추장스러워 아예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쌀값만 내고 같이 먹자는 것을, 여유가 없어 사양했다가 그예 쫓겨난 경험도 있다. “젊은
사람이 굶는 꼴 측은해서 못 봐주겠소. 방을 비워줘야겠소.”
라면도 호사였다. 없으면 굶었고, 냉수로 끼니를 넘겼다. 밭에서 자라는 무, 고구마의 힘을 빌렸고, 봄, 가을이면 들판에 지천으로 열리는
과일로 신령께 감사를 올렸다. 막일과 허드렛일을 가리지 않았으며, 독거노인의 말벗이 되어 제주 역사도 귀동냥할 겸 숙식을 해결했고, 산중의
버섯재배 하우스나 목장 부속 가건물의 신세를 지기도 했다. 산 속을 헤매다 주민의 신고로 경찰서에 끌려가 간첩 혐의를 벗어야 했던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낮에 촬영한 것을 밤에 현상하고, 비 오는 날 인화를 했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전시용 액자와 딸린조형물 따위를 만들었다. 가을이면
광목에 감물을 들여 옷감을 만들고, 직접 바느질을 하여 갈옷을 지어 입었다. 바느질은 특히, 밀려드는 외로움을 물리치는 전가의 보도였다. 무언가
몰두하는 것으로 그리움의 허기를 달랬고, 그도 여의치 않을 때는 안개 속으로 달려가 외로움 자체를 껴안아버렸다.
웬만한 거리는 걸었다.
훗날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버린 한 버스 운전수는 무임승차로 알게 된 사이다. 배차 시간을 외워두고, 기다렸다가 그의 버스에 오르는 날은
위장이 호강을 한다. 나중에는 아예 집 열쇠를 한 벌 떠서 제 집처럼 이용하라며 배려를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피붙이처럼 챙겨주던
친구도, 김영갑의 뜻에 대해서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 것이었다. 아직도 산을 안 떠났나? 아직도 섬을 안 떠났나? 점점 김영갑의 말수가
사라져갔다.
“눈에 보이는 고개만 넘으면 끝인 줄 알았다. 하나를 넘으면 더 높은 고개가 나타났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다. 나아갈수록 바람은 세고,
숨이 가쁘지만 멈출 수도 하산할 수도 없다.” 그렇게 10년이 지날 무렵, 김영갑의 갈증은 최고조에 이른다. 전시회도 제법 열었고, 책도 썼다.
신문과 방송의 관심도 얻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일상의 행복을 접고, 이룬 것이 무엇인가. 나의 사진, ‘김영갑표 사진’이라 내놓을 만한
성과는 무엇인가. 자괴감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돌이켜보면 적당히 시늉만 했을 뿐이다. 열심히 하는 척하며 젊음만 허비했다는 자책감에
우울했다. 온몸을 내던져 쓰러질 때까지 몰입해보자. 남들이 인정할 때까지가 아니라, 나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몰입해보자.” 김영갑은 더욱 혹독한
자폐를 선택한다. 전화를 반납하고, 지인들의 명함을 버렸다. 어떤 편지에도 답장을 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을 삼갔다. 더 지독한
외로움 속으로 자신을 몰아갔다. 절대 고독을 향해, 절대 자유를 향해, 절대 자연을 향해, 그 미증유의 황홀경을 향해.
그에게 필생의 포인트를 꼽아달라고 물었다. 제주의 단 한 곳? 그는 제주의 용눈이오름과 마라도를 꼽았다. 다음날 오후 2시경, 용눈이오름에
올랐다. 햇볕이 화사한 2월의 오후, 과연 필생의 포인트는 명불허전이었다. 관광객들은 흔히 길에 멈추어 서서 오름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그러나
진경은 반대쪽에 존재한다. 오름에 올라 바라보는 일망무제의 장관은 일순간에 호흡을 멈추어버리는 출세간의 비경, 그것이었다.
그리고 바람, 제주가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바람, 오름 정상이 아니고서는 체감할 수 없는 엄청난 바람을 만났다. 몸을 사선으로
기울여야만 서 있을 수 있는, 얼굴의 살이 뒤로 밀려나 뼈와 표피가 맞닿을 정도로 오싹해지는 광풍이 오름 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바람의 눈,
바람의 심장, 바람의 제국. 왜 오름은 늘 나무 없이 잔디와 억새 따위만 무성한지도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또 문득 알게 되었다. 김영갑의 병이 필연이었음을, 운명이었음을. 사진작가들은 새벽의 여명과 이른 오전의 사광, 그리고 늦은
오후부터 해질녘에 이르는 은은한 산란광을 좋아한다. 김영갑은 여명의 장관을 건지기 위해 어둠을 도와 오름에 올라 몇 시간이고 기다리며 새벽의
황홀경을 맞은 것이다. 오후 2시에 중무장을 하고도 옷깃을 여며야 했던 저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어설픈 입성에 주린 배를 안고 새벽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오름과 숲을 누비다가 황혼의 마지막 셔터를 누르고는 몇 시간을 걸어 귀가를 서두른다. 집이래야 온기라고는 전기장판 한 장뿐인,
그나마도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 혹한에만 사용했다는 냉골이다. 그 냉골방에서 라면 하나 끓여먹고는 잠을 청한다. 어떤 날은 밀린 필름을 현상하고
나서 늦은 잠자리에 든다. 몇 시간 눈을 붙였을까.
다시 다음날의 촬영을 위해 새벽길을 떠난다. 그렇게 20년이다. 이만큼 견뎌낸 몸이 오히려 대단했던 것이다.
“병을 알고 나서, 처음에는 ‘열심히 산 벌인가’ 싶어 어처구니가 없고,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려니 싶다. 다만
하고많은 병 중에 하필 이런 **맞은 병인지...”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늘 카메라를 안고 들판에서, 혹은 오름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어
맞이하는 최후를 각오했었다. 그런데 “이제 막 사진이 무엇인지, 어떻게 찍어야 할지 알 것 같은” 경지에서, 하필 병이래도 셔터를 누를 힘이
없어 사진을 포기해야 하는 병이냐는 것이다.
그의 병은 조금만 움직여도 근육이 통증을 호소하는, 앉아도 일어서도 걸어도, 침을 삼켜도, 심지어 웃어도 아픈 병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갤러리였다. 고통을 잊기 위해, 달관의 입구에서 카메라를 놓아야 하는 허망함을 달래기 위해. 저 몸으로 몸소 공사 현장을 챙긴 것도 그래서였다.
땅이 필름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사진은 눈으로 찍는 것, 눈으로 찍은 심상을 필름에 옮기는 것. 그것을 이번에는 대지에 옮긴다. 대지 위에
찍는 그의 마지막 사진, 그것이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인 것이다.
또 말들이 많았다. 이미 의사의 사형선고 기일을 넘긴 시한부 인생이 어쩌자고 폐교를 임대했냐고, 임대한 땅(자기 땅도 아닌)에 몇 억원을
쏟아부어 갤러리를 정원을 꾸미느냐고, 유서는 써놓았느냐고, 성치도 않은 몸을 혹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의 속타는 심정은 생각지도
않느냐고. 당장 집어치우고 치료부터 하라고. 세속의 관심에 대해 미소로 답한 지 이미 오래다. 김영갑은 묵묵부답, 웃고 또 웃는다. 안 해본
치료가 없노라고, 형제와 누이들이 찾아온 날 긴긴 밤이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었노라고, 그토록 어색하고 고통스러운 만남은 평생 없었노라고,
그러고도 끝내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를 하지 못했노라고...
지금 그의 시간은 생사를 초월한 연장의 시간이다. 그는 모처럼 모진 삶이 준 뒤안길의 평화를 즐기고 있다. “움직일 수 없게 되니까,
욕심부릴 수 없게 되니까 비로소 평화를 느낀다. 때가 되면 떠날 것이고, 나머지는 남은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철 들면 죽는 게 인생, 여한
없다. 원 없이 사진 찍었고, 남김없이 치열하게 살았다. 이 병이 그 증거다. 훈장이다.”
송준(저널리스트)
출처, 두모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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