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권혁웅 시모음

휘수 Hwisu 2006. 5. 2. 10:49

1967년 충북 충주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평론), 1997년 《문예중앙》신인상(시)으로 등단.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 시론집 《한국 현대시의 시작방법 연구》

시적 언어의 기하학》 등.

현대시동인상 수상. 현재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밤의로의 긴 여로

 

- 서울市 江北區 雙門1洞

불 켜든 세상의 한구석에는 아직도 대흥복덕방이
있고 대림다방이 있고 눈물이 있고 깡패와 창녀들
이 있다 몸이 아프면 몸을 주고 마음이 아프면 마
음을 주어버려야 한다
쏟아버린 개숫물 위에 '맥주 양주 안주일절' 흐
린 글씨의 무늬가 보인다 그 무늬에 기대어 놓아버
리고 싶은 세월이 누구에겐들 없겠는가 밤의 入口
를 찾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안 보이는 세상, 설움의 허방에 빠진 이들은 제
몸 위에서 노닐며 잠시 쉴 수도 있으리라 子正의
커피와 발자국들과 외진 골목 끝에 수줍은 듯 숨어
있는 여관 입간판이 세월의 알리바이를 감춰줄 테
니까

雙門──이 두 개의 門을 밤을 지키는, 문 닫은
入口라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달거리를 잃어버린
저 할머니의 느릿느릿한 건너감을, 한밤의 취기와
패싸움을 이 도시의 주민이라 말할 수 있을까

出世間의 꿈 위에 새로운 건물들이 자란다 어쩌
면 그곳에서 밤으로의 긴 여정을 끝낼 수도 있으리
라 불 끈 나라의 어릿어릿함으로 잠시 눈 붙일 수
있으리라 이곳, 내 마음의 도린곁, 피난처에서

 

사소한 기록2
     
지나간 것들이
등뒤의 책에 적혀 있다

저녁은 제법 두텁다 모래의 도시를 간신히 지나간 사
람들에 관해 말하려 한다 그들은 몇개의 문단에 출현했
으며,지금은 저녁의 여백 속에 몸을 감추었다 그들은
이 거리를 횡단했을 뿐, 이 도시의 서사가 아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속기로 적었으나 모래는 자주 자리를 바
꾸었다 모래의 책은 펼치는 곳마다 다른 골목이었으므
로 등뒤의 노트엔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이 늘어갔다
저녁은 제법 두텁다 나는 서술어와 서술어를 건너 여
기에 왔다 간혹 만나는 입간판 앞에서 이 거리의 休止
와 終止에 관해 생각한 적이 있었으나....등뒤의 책에
나는 배가 고팠다,고 적었다 늦은 국밥을 마주하고 앉
아 밥알처럼 떠오르는 불빛을 내 안으로 떠넘기고 싶었
다 모래 씹은 표정이라는 말이 있지 그들이 돌아 온다해
도 이제 그들은 알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먼지의 책은
펼치는 곳마다 다른 골목이었다 이 지루한 문장이 내게
서 나와, 간신히, 그들에게로 건너갈 뿐,

골목길에 접어들어 나는 등뒤의 책을 닫고
사소한 저녁이 문득 캄캄해지는 것을 본다


*[모래의 책]:보르헤스의 소설제목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그날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물결이 물결을 불러 그대에게 먼저 가 닿았습니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듯 물결과 물결이 만나
한 세상 열어 보일 듯 했습니다
연한 세월을 흩어 날리는 파랑의 길을 따라
그대에게 건너갈 때 그대는 흔들렸던가요
그 물결 무늬를 가슴에 새겨 두었던가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강물은 잠시 멈추어 제 몸을 열어 보였습니다
그대 역시 그처럼 열리리라 생각한 걸까요
공연히 들떠서 그대 마음 쪽으로 철벅거렸지만
어째서 수심은 몸으로만 겪는 걸까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이 삶의 대안이 그대라 생각했던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없는 돌다리를
두들기며 건너던 나의 물수제비,
그대에게 닿지 못하고 쉽게 가라앉았지요
그 위로 세월이 흘렀구요
물결과 물결이 만나듯 우리는 흔들렸을 뿐입니다

 

 이 저녁의 어두운 풍경 


  등뒤에 있는 노트, 지나간 것들이
  저녁의 푸른 칠판 위에 적혀 있다
  나는 몇 개의 기억할만한 문자로
  이 거리를 지나간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둥근 어깨와 선이 뚜렷한 입술을 가졌으나
  먼지의 행간을 걸어가서는
  저녁의 푸른 빛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의 모습을 속기로 적었으나
  먼지가 자주 자리를 바꾸었으므로
  지금 그를 짐작할 수 없다
  등뒤의 노트에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발자국처럼 말줄임표처럼 찍어두고
  나는 긴 서술어와 서술어를 건너 여기에 왔다
  간혹 만나는 입간판 앞에서
  이 거리의 휴지와 종지에 관해 생각한 적이 있었으나...
  등뒤의 노트에 나는 배가 고팠다,고 적었다
  세간의 저녁상을 마주 하고
  늦은 국밥을 시켜먹고 싶었다 밥알처럼 떠오르는
  저 불빛을 내 안으로 떠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돌아온다 해도
  이제 그를 알아볼 수는 없으리라
  골목길에 접어들어 나는 등뒤의 노트를 닫고
  저녁의 푸른빛이 문득 캄캄해지는 것을 본다

 

만리장성을 생각함


내 친구 왕종수,
나와 이야기할 때면 내 왼쪽 머리 위를 흘겨보던 친구
눈동자가 한쪽으로 몰려서 고개를 갸웃대던 친구
만나는 선생마다 째려본다며 먼저 패고
나중에 사과해서
과수원을 해도 좋았을 친구
등하교 길에 만나는 여학생을 좋아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더니
옆의 친구가 나서더라는 황당한 이야기
어느날 놀러간 그 친구 집에서 만난
돌아온 외팔이, 소림사 지주승, 당랑권과 호권과
취권의 달인들,
쏼라쏼라 떠들며 접시를 날려서
자장면도 못 먹고 우리 집으로 쫓겨온 날
나는 북경으로 돌아가야 한대, 울면서
내 왼쪽 머리 위를 흘겨보던 친구
아니, 내 등 뒤의 만리장성을
똑바로 쳐다보던
내 친구 왕종수


시집「 마징가 계보학 」

 

나의 채마밭을 본 적이 있을까 

 

작은 채마밭을 아십니까, 世上의 변두리에 셋
집을 얻어 밭을 꾸몄습니다 마음의 식물들 싱싱하
게 자라 제법 무성하답니다 李穀의 小圃記를 읽고
있습니다 세상이 나를 세상 바깥에 밀쳐두면 세상
역시 나의 바깥에 있어서, 세상과 내가 소외의 불
편함으로 아늑할 때 실은 세상이 나의 채마밭인 것
이지요 내 상처가 세상의 화농으로 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푸른 상추처럼 상처는
뜯어내도 뜯어내도 날마다 돋아났지요,
감자같이 둥글고 울울한 마음 숨기려 해도
줄기를 잡아당기면 뿌리 끝까지
올망졸망한 생각들이 딸려 올라왔답니다

깨진 사금파리를 밭 둘레에 박아놓았더니 생채기
가 뚜렷이 빛나는군요 우리는 한통속이랍니다 내
마음의 바깥이 세상의 안이어서 날 끌어안은 세상
에 한 시절 기대거나 세상의 바깥이 내 안이어서
팍팍한 가슴 두드리며 살거나......

양파처럼 겹으로 감춘 나를
세상이 벗기려 들 때마다
나는 또 다른 껍질 속에 웅크려 있었어요

그러나 세상이 밖에서 나를 두드릴 때마다 나 심
하게 흔들렸음을 기억합니다 세상 혹은 그대라는
이름의 산과 들판에 대해서......

파가 울타리 너머 웃자랐군요, 이만 총총.

 

밀실의 역사


                  집 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는 말이
                 참으로 거짓이 아니로구나. (이곡 「소포기」)

  1. 사막

  방에 위도와 경도를 매겨, 지상과 일대일 축척을 실현
한 이모에 관해선 방금 말했다 외할머니가 부를 때마다,
이모는  고비 사막을 넘어  달아났다  대상도 낙타도 없
이……그곳을 건너가는 데 한 뼘이 걸렸다

  2. 벼랑        
        
  형은 여름 한낮이면  다락에 올라가 오수를 즐겼다  가
끔 벼락 치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면 디딤판 위에서
코피를 흘리며 코를 고는 형이 있었다  거기가 낙화암도

아닌데, 형은 삼천 번 정도는 몸을 날렸을 것이다

  3. 전장

  주인집 작은형은 평생을 그늘에서만 산 군주였다 형의
유일한 적수는 나였다  형은 기병과 포병과 보병과 전차
와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내게 쳐들어왔다 나는 자주 말
발굽에 밟히거나 코끼리와 수레바퀴에 깔려 신음했다

  4. 탑

  우리는 주인집 막내를 동장군(冬將軍)이라 불렀다 한밤
에 변소에 갔다가  구멍에 빠졌던 애다  한겨울이어서 그
애는 똥탑을 기어올라  방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우리는
그 애를 피해다녔다  추위와 똥독을 이겨낸  불굴의 장수
였으므로

  5. 식당

  주인집 작은누나는 가출한 후에  도루코 면도날 위에서
위태롭게 청춘을 보냈다 한번은 면도칼을 씹다가 주먹에
맞아  입 안이 통째로 날아갔다 한다  그래서 삼양라면을
한 올씩 삼키며 두 달을 살았다 입이 좁은 문이었던 거다

 

 

 

입술 3

한 겹 풍경을 열고 들어가면 촘촘히 심어진 가로수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지나간 쪽으로 나무들이 앞 다퉈 잎을 내곤 했습니다 웃음이거나 울음인 것들
을 매달고 나무는 지금 무성합니다 거기엔 분절도 단락도 없어서, 물관을 바
쁘게 오르내리는 홀소리들만 분주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그곳을 지나갔습
니다 그때마다 내 손끝은 생장점을 품은 듯 저려왔지만, 그것이 목측目測을
가로막는 목책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촘촘하던 이유마저는 몰랐습니다

현대시 3월호

 

 

지문

내가 모르는 일이 몇 가지 있으니

바위에 뱀 지나간 자리와 물 위에

배 지나간 자리와 하늘에 독수리가 지나간 자리

그리고 여자 위에 남자가 지나간 자리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도무지 모르지, 손가락마다

소용돌이를 감추어두고 사는 일

손잡을 때마다 타인의 격정에 휘말리는 일

내 삶의 알리바이가 여기에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개들은 짖고

먼지는 손에 묻고

버스는 떠나고

비행기는 하늘에 실금을 그으며 날아간다


나는 개를 먹고 개처럼 짖고

개털은 날리고 나를 따라

먼지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다니고

내가 손을 흔들어도

버스는 떠나가고 비행기는 활주로에

길고 긴 타이어자국을 남긴다


누웠다 일어난 자리에 흩어진 머리카락,

여기에 내가 아니면

네가 누워 있었을 것이다


 

내게는 느티나무가 있다

느티, 하고 부르면 내 안에 그늘을 드리우는 게 있다

느릿느릿 얼룩이 진다 눈물을 훔치듯

가지는 지상을 슬슬 쓸어 담고 있다

이런 건 아니었다, 느티가 흔드는 건 가지일 뿐

제 둥치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느티는 넓은 잎과 주름 많은 껍질을 가졌다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발음하면

내 안의 어린 것이 칭얼대며 걸어온다

바닥이 닿지 않는 쌀통이나

부엌 한쪽 벽에 쌓아둔 연탄처럼

느티의 안쪽은 어둡다 하지만

이런 것도 아니다, 느티는 밥을 먹지도 않고

온기를 쐬지도 않는다

할머니는 한 번도 동네 노인들과 어울리지 않으셨다

그저 현관 앞에 나와 담배를 태우며

하루종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런 얘기도 아니다, 느티는 정자나무지만

할머니처럼 집안에 들어와 있지는 않으며

우리 집 가계(家系)는 계통수보다 복잡하다

느티 잎들은 지금도 고개를 젓는다

바람 부는 대로, 좌우로, 들썩이며,

부정의 힘으로 나는 왔다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

여기에 느티나무 잎 넓은 그늘이 그득하다

(문학사상 5월)

 

내게는 느티나무가 있다 2 

 

느티의 가계에는 내통이라는게 있지
구서구석 푸른 구름을 거느리고 있지
이를테면 수화를 나누듯 잎을 뒤집을 때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이라고 발음하는 거지
그러면 구름이 말풍선처럼 부풀어 오르지
저 너머 선산에서 할머니가 걸어나오지
느티는 내게 몸을 기대며 슬쩍 정을 통하지
가령 난장의 무대에서 걸어나와 관객을 향해
혼잣말하는 사람처럼
그와 나 사이엔 이심전심이 있지 아버지가 뒤엎은 밥상처럼
바람이 쏴쏴 밀려나오지
그가 나와 내통할때
내 몸의 물관과 체관을 오르는 게 있지
몰래 옷 갈아입다 들킨 누나들처럼
숨겨둔 자의식이 달아오르지
겨울에도 옷을 벗는 거지 느티는
잎들이 아니라도 무성한거지


문예중앙 2003년 겨울호

 

파문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 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 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시집 - 황금나무 아래서

국수

넓은 마당 옆에 국수집이 있다고 내가 말했던가 우리 이모네 집이다 저녁이면 어머니는 나를 그리로 마실 보내곤 했다 우리는 국수보다 삼양라면이 좋았는데 이를테면 꼬불꼬불한 면발을 다 먹고 나서야 아버지는 상을 엎었던 것인데 국수 뽑는 기계는 쉴새없이 국수를 뽑았다 동어반복을 거기서 배웠다 목포는 항구고 흥남은 부두지만 국수는 국수다 국물을 우려내는 멸치처럼 나는 작았고 말랐고 부어 있었다 나는 저녁마다 국물 속을 헤엄쳐 다녔다
어느 날 아버지가 고춧가루를 뿌렸다 좋아요 형님, 다 신 안 와요 보증을 잘못 섰다고 한다 거길 떠난 후에 내가 먹은 국수는 어머니가 반죽해서 식칼로 썰어낸 손칼국수다 면발이 빼뚤빼뚤해서 이모네 국수처럼 가지런하지 않았다 내가 보증한다 그때 내가 좋아한 건 이틀에 한 번씩 오는 번데기 리어카와 솜틀집 문에 치여 죽은 병아리 그리고 전도관의 풍금소리, 결단코 국수는 아니었는데 그 후로도 눈이 내렸다 밀린 연탄재를 한 길에 내다버릴 수 있다고 어머니가 좋아하던 그 눈, 국수가 나올 때 그 위에 뿌리는 밀가루처럼 하얗고 퍽퍽한 그 눈, 우리는 면발처럼 줄줄이 넓은 마당에 나오곤 했던 것인데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진하게 우려낸 하늘은 무엇인가 번데기처럼 구수하고 병아리처럼 노랗고 풍금의 건반처럼 가지런한 이것은 무엇인가

(문예중앙 2003년 겨울호)


 스파이더맨 

  1
  거미인간에 관해 말하자 넓은 마당의 위아래, 전후좌우, 동서남북을 샅샅이 훑던 그의 거미손에는 걸리지 않는 게 없었다 그가 손바닥을 펴면 문짝, 신문지, 고장 난 석유난로, 콜라병 같은게 손에 와서 척척 붙었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리어카를 끌고 그는 수도 없이 골목을 오르내렸다
 
  2
  넓은 마당은 방사형으로 가지를 친 수많은 길과 골목의 중심이다 거기서 동쪽 능선을 넘어가면 보문사가, 남쪽 고갯마루를 타넘으면 배성여상이, 서쪽 산정에 오르면 낙산아파트가 나온다 북쪽 길로 내려가면 삼선초등학교다 거기에 수많은 골목과 골목이 들러붙어 새끼를 쳤다

  3
  사실 내가 말하고 싶었떤 이는 인자仁子다 건너편 등성이에 사는 성신여중 학생이다 좁다란 시멘트 길을 걸어 올라가던 그 아이의 실루엣을 이쪽 건너편에서 볼 때마다, 나는 거미인간이 되고 싶었따 그를 따라 리어카를 따라 소녀의 집까지 가보고 싶었다 다족류多足類의 발하나를 거기 걸쳐두고 싶었다

  4
  거미인간은 넓은 마당 한구석에 모아온 것들을 쌓아두었다 그 아이를 고치처럼 둘둘 말아 종이뭉치와 고철더미와 나무토막 옆에 두었다 이십 년 동안 모아두었다 이십 년 동안 소녀는 나처럼 낡아갔을까 거기서 방문을 드나들고 폐지를 학교에 내고 난로를 쬐고 콜라를 마셨을까

  5
  모든 길은 넓은 마당으로 모이고 넓은 마당에서 갈라졌다 우리는 골목에서 태어나 넓은 마당으로 갔다 우리는 거기서 걸렸다 거미인간만이 보문사와 낙산을, 배성여상과 삼선초등학교를, 나와 안자 시이를 넘나들었따 그는 자유인이었고 독재자였다 그의 많은 재산 가운데 약간을 대출 받아 이렇게 쓴다

 

세상의 끝 

  동도극장을 아십니까?

  만약 아신다면 당신은 저 오랜 독재자가 말년을 보낼 즈음에 삼선동과 동소문동 어디쯤에서 살았던 것이 틀림없군요

  넓은 마당을 곧장 내려가면 삼선초등학교가 나오고 초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가면 경동고등학교가, 왼편으로 가면 한성여고가 나옵니다 삼거리는 어디나 연애담을 담고 있습니다 형들과 누나들이 거기서 만나 동도극장에 가곤 했답니다 학생주임이 몽둥이를 들고 그곳을 급습했지만, 아시다시피 필름은 하루에 다섯 번이나 돌아가고 극장 안은 아주 어둡습니다

  내가 동도극장을 처음 본 건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두 번째 독재자의 취임기념우표를 사러 새벽길을 가는데, 머리가 떨어져나간 시체가 소복을 입은 채 으스스하게 서 있는 거였습니다 <목 없는 미녀>란 프로였죠 귀신은 우처국 앞까지 쫓아왔다가 날이 밝아서야 돌아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죠 얼굴이 없었는데 미녀인 건 어떻게 알았으며 소복을 입었는데 몸매는 또 어떻게 보았을까요?

  나중에야 그게 세상 끝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운명이란 걸 알았습니다 어슴프레 서 있긴 한데 도무지 얼굴은 보이지 않는 이들 말이죠 동도극장이 꼭 그랬습니다 내가 철이 들 무렵 동도극장은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내가 연소자 관람불가를 넘어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거지요 나는 지금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동도극장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세상의 끝까지 가보지 못했답니다

 

쑥대머리

 제가 다니던 삼선교회엔 유난히 숙이 많았죠
  은숙(恩淑)이, 애숙(愛淑)이, 양숙(良淑)이, 현숙(賢淑)이, 경숙(京淑)이, 남숙(南淑)이, 난숙(蘭淑)이, 미숙(美淑)이, 정숙(貞淑)이……
  그야말로 쑥밭이었죠제일 믿음이 좋았던 애는 은숙이,
  애숙이는 잠시 나를 사랑했고
  양숙이와 현숙이는 정말로 현모양처가 되었죠
  경숙이는 지금도 서울에 살지만, 남숙이는
  먼데로 이사 갔답니다
  난숙이는 청초했고 미숙이는 예뻤는데
  지금도 제일 기억나는 애는 정숙이에요
  어렸을 때 귤껍질 넣은 주전자 물을 뒤집어 썼지만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던 아이
  그러던 어느 성탄절에 성극을 하다가
  두건과 함께 가발이 홀랑 벗겨진
  울지도 않고 끝까지 마리아 역할을 하고는
  그 길로 교회를 떠난 아이, 지금도 어디선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거지꼴을 한 동박박사들을 기다리는 거나 아닌지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그해 여름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멱을 따기 위해 우리에서 끌어낸 중돈 이였다 어설프게 쳐낸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칼을 든 채 달려들었으나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일렁이는 물살을 위로하고 돼지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을이 되어도 우물 속에는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그리고 돼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는 슬픈 얼굴로 혀를 찼다 틀렸어. 저 퉁퉁 불은 얼굴 좀 봐 겨울이 가기 전에 사람들은 결국 입구를 돌과 흙으로 덮었다 삼겹살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면서 우물 있던 자리는 창백한 낯빛을 띠어갔다

 

 칼들은 녹이 슬었고 식욕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디에 우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초록의 상(床)위에서, 지전을 먹은 듯 꽃들이 웃었다 숨어있던 우물이 선지 같은 냇물을 흘려보내는, 정말 봄이였다

 

                                                                                  

지문

 

  네가 만질 때마다 내 몸에선 회오리바람이 인다 온몸의 돌기들이 초여름 도움닫기 하는 담쟁이처럼 일제히 네게로 건너뛴다 내 손등에 돋은 엽맥(葉脈)은 구석구석을 훑는 네 손의 기억, 혹은 구불구불 흘러간 네 손의 사본이다 이 모래땅을 달구는 대류의 행로를 기록하느라 저 담쟁이에게서도 잎이 돋고 그늘이 번지고 또 잎이 지곤 하는 것이다

 


마징가 계보학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 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다 아내와 가재를 번갈아 두들겨 패는 소란을 참다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겨 넣었다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워 했음에 틀림이 없다


   3. 짱가
   위대한 그 이름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가 오후에 나가서 한밤에 돌아오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한밤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날아갔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 일이 사내의 집에서가 아니라 먼 산 너머에서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사내는 오방떡 장사를 때려치우고, 엄청난 기운으로, 여자를 찾아다녔다 계란으로 먼 산 치기였다


   4. 그랜다이저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驛馬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桃花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 오니…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왕십리

 

새로 두 시에 산등성이를 건너온 비는
내 방 창을 두드린다 창문에
조팝나무 잎이 우표처럼 붙어 있었다
먼 데 있는 것들이 문득 소식을 전하는 때가 있다
지나쳐온 것들이 중국집 스티커나 세금 고지서처럼
문 앞에 부려져 있을 때
그걸 묵은 신문지와 함께 버릴 수 있나?
웃기고 있네. 나는 과금별납처럼 살았어
내 자리 어디선가 조금씩 내가 빠져나간 거지
세 시가 되니 비는 더 심해져서
파도치는 소리를 낸다 창문을 여니
먼 데 불빛이 어렵게 깜박인다
누군가 구조신호를 보내는 게지
구름 뒤에 둥글게 빛나는 달이 있듯이
저곳 어디에 왕십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외도가 지나쳤다,라고 목월은 말했지만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저 길 너머에 있었다
새로 세시에서 네 시로 지나가는 저 비처럼
나는 세상을 건너갈 수 없었다
왕십리, 십리가 멀다 하고 찾아갔던 곳
하지만 늘 십리는 더 가야 하던 곳
내게도 밤을 디디고 가야 할 곳이 있다
몰론 왕십리에 가기 전에, 왕십리도 못 가서
나는 발병이 날지도 모르지만

 

 

서울시 신림동 산77 성 김복례의 하루

 

1

 부엌 지붕 새로 스며든 빗물이 판자를 휘어놓았다 식기들이 비스듬히 걸터앉아 아침햇살에 이 빠진 웃음을 웃는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구를 계산하는 그릇들도 이 집 식솔들이다

 

2

 지나는 곳마다 고개턱이어서 길들도 한숨을 부려놓는 곳 그 길을

 

091021-2023527 김복례 할머니가 오른다 마을의 수도꼭지들이 할머니를 따라 쇳물을 쿨럭거린다 소리의 음계를 밟으며 할머니 길을 오르신다

 

3

 이곳에 시멘트 숲이 얼기설기 솟았을 때 김복례 할머니가 왔다 고려 때도 고려장은 없었다는데 자식들은 끈 떨어진 구슬처럼 흩어졌다 아니 구슬이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저녁마다 할머니는 방바닥에 대고 걸레 잡은 손을 휘휘 젓는다 아무도 못 보게

 

손사래를 치는 것이다

 

4

 산 아래는 지금 영구 임대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포크레인은 술 취한 애비를 닮았다 마구 가산을 부수어 놓는다 레미콘이 임신한 여인네처럼 뒤뚱거리며 뒤를 따라온다 흙발로 여기저기 쿵쾅거리며 뛰어 다니는

 

트럭들....시끄러운 이웃이다

 

5

 바람만바람만 따라오던 가등의 행렬, 어깨 으쓱이며 돌아가고

 

건너편 산등성이 불빛들도 까무룩 조는 초여름 저녁, 김복례 할머니 형광등 값을 아끼려 일찍 자리에 든다 벌써 눕느냐고 칭얼대며 은초롱꽃들이 등을 켜들고 슬레이트 처마 아래를 들여다본다

 

6

 야채나 생선차도 이곳엔 들르지 않는다 해서 이곳엔 기다림이 없다 그저 마른 방구들 풀썩이며 노는 먼지들뿐이다 그 위로 햇살이 부서진다 하늘에 제일 가까운 곳에 세워진 빛의 고딕 성당 서울시 신림동 산 77번지, 거기에 김복례 할머니가 산다

 

 

   투명인간 1

 

                                                        
   주인집 작은형은 스물일곱에 죽었다

   스물일곱 해를 골방에서 살았다

   볕을 쬐면 온몸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형이 몸을 흔들면 머리카락과 피부딱지가

   우수수, 쏟아지곤 했다

   형은 언제나 작은 빗자루와 쓰레기를 가지고 다녔다

   형은 자기가 지나친 자리를

   천천히 감추는 그림자였다

   황사가 곱게 내려앉은 어느 봄날,

   형은 지상에서 제 몸을 거둬갔다
   오후 두시에서 여섯시까지
   옷을 걸기 위해 박아넣은 대못 아래서
   형은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집안에 내려앉은 먼지는 대개

   사람의 죽은 피부조각이다

   형은 드디어 대낮에도

   안방과 건넌방과 마당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수면

 

 작은 돌 하나로 잠든 그의 수심을 짐작해보려 한 적이 있다 그는 주름치마처럼 구겨졌으나 금세 제 표정을 다림질했다 팔매질 한번에 수십 번 나이테가 그려졌으니 그에게도 여러 세상이 지나갔던 거다

 

  

    수상기(手相記) 2

 

 

 수위에 대해 말하자면 너의 깊이는 손가락 세 마디에 해당할 것이다
너를 잡을 때마다 네 밖은 봉긋하게 솟아오르고 너는 그 수위 너머로
잠겨든다 빛과 어둠의 변증은 네게 여러 겹의 주름이다 그러나 산도
(産道)에 이르기까지 네가 움켜쥔 길은 이합(離合)하거나 집산(集散)
할 것이니, 모래가 흐르듯 네 손을 빠져나가는 운명을 악착으로도 막
을 수는 없을 것이다 네가 붙든 그것이 바깥이어서, 너를 잡을 때마다
네 안은 우묵하게 오므라든다

 

 


  신발에 담겨 있는 것

 

 

 사막은 내게 관념이다 사막을 걸어온 자의 발자국도 그 발자국을 지
우는 모래들도 지나온 길을 모래로 쓱쓱 지우는 바람도 내겐 관념이다
사막에 대해 말하면 누구나 비슷해진다 모래시계 속의 모래 알갱이처
럼, 모로 누울 때마다, 부스러진 관념이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혹은
그 반대로 부슬부슬 떨어지기 때문이다 사막은 유행가와 같다 발자국도
신발도 다 지나간 거다 복숭아뼈를 담았던 그릇이 이제는 모래를 담는
다 아직 엄지발가락을 고물거릴 수 있다 이건 관념이 아니다 혹은 신발
에 들어온 몇 알의 모래 알갱이들도 혹은 그 모든 게 다 지나간 거라고
말하는 유행가들도

 

 

 

 

     당신을 만지지 않아서

     내가 노래하는 건 아니죠

 

                                                               

 

   당신을 만지지 않아서 내가 노래하는 건 아니죠

   내 노래는 당신의 얇은 피부 밑을 흐르는

   혈관 같은 것, 손대지 않아도 노래는

   당신의 심장에서 나와 심장으로 돌아가죠

   당신을 만지지 않아서 내가 노래하는 건 아니죠

   내 손은 당신의 심장을 기억하고

   그래서 언제나 둥근 허공을 어루만지고

   노래는 손가락 끝에 맺혀 있어요

   당신을 만지지 않아서 내가 노래하는 건 아니죠

   내 입술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동심원들이

   당신을 만나 내게로 돌아오고 있어요

   들숨과 날숨 사이, 거기 그렇게 당신이 있어요.  

 

 

 

 

 돌아온 외팔이

 

 

 그가 돌아왔다 시장 입구에서 만난 그는 역시 고수였다 오른손만으로 빠르게 붕어를 잡아서 굽고 뒤집고 석쇠 위에 올렸다 봉투에 담아가는 일은 쎌프 써비스였지만, 그가 손을 쓰면 죽은 붕어와 흘린 단팥이 시산혈해를 이루곤 했다

 

 그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까 두려웠다 소매 끝에 숨은 갈고리가 차가운 빛을 뿜곤 했다 그가 두고 온 왼손이 지금도 주인을 찾아 월남의 밀림을 헤매고 다닌다는 말도 있었다 시장을 지나갈 때마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검은 두건을 쓴 단속반은 떼로 몰려다니며 상대방을 급습하곤 했다 중과부적이라는 말이 있다 터진 밀가루 부대에서 가루가 날리듯 그는 흩어졌다 이런 비겁한......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벗어둔 외투

 


내게서 생겨난 이 늘어진 주름은 길이다
접히는 곳마다 생겨난 그 길을 나는
척도 260으로 걸어왔는데

지금 이 육탈(肉脫), 이 빈집,

나는 매장을 원치 않으며 불타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때리는 손이며 맞는 뺨이다* 나는 내가 앙상하다
나는 다른 옷을 입고 싶다


이 얇은 피부 안에도
다음과 같은 글은 적혀 있을 것이다

물빨래는 삼가고 그늘에서 말린 후에
60도 이하에서 다림질할 것


* 보들레르의 시 '자기 자신을 벌하는 사람'에서

 

 

 해는 보문사에서 뜨고 한성여고로 진다

 

 

넓은 마당의 해는 보문사에서 떠오른다
스님들 머리처럼 반질반질하고
헐벗었다 탁발하러 해는
넓은 마당 위 능선을 부지런히 오르내린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음식과 속옷 빨래를 얻고
경문 대신 햇빛을 조금씩 나눠준다
안방 구들장 위에 한 뼘,
손녀딸 방에 얹힌 할머니 천식에 두 뼘,
하지만 장롱으로 막아 꾸민
큰아들 작은아들 방 책상에는
국물도 없다 서유석의 푸른 신호등을 지나
김기덕의 두시의 데이트를 지나
오미희의 가요응접실에 이르기까지
해는 먼 길을 가야 한다
가장이 작업복처럼 쭈글쭈글해져서 귀가하기 전에
안주인이 영양크림과 스킨과 로션을 잔뜩 안고
외판에서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마침내 해는 달아오는 얼굴로
한성여고 품에 안긴다
딸아이들은 저마다 치마 안에 해를 감춰두고
고개를 넘어온다 깔깔거리며
넓은 마당으로 돌아온다 그녀들은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를 들으며
할머니 기침소리를 들으며
삼십촉짜리 알을 낳을 것이다

 

 

목련의 알리바이

 

 오늘, 목련이 모두 졌다 오래된 신발처럼 변색했다 신

발은 흔적이다 너는 여기에서 증발했다 뒤꿈치 바깥이

깎인 것은 너를 지탱해온 신발의 기억, 신발은 길을 끌고

천천히 이곳에 왔다 오늘도 너는 신설, 건국, 성

수 등을 짚어 왔고 주렁주렁 달고 왔고 그리고 목련

이 졌다 너는 여기에서 증발했다 목련은 가지를 끌고 와

서는, 가지 끝마다 자리를 잡곤 했다 가지들이 노선

처럼 산만했다 그 무성한 신발들이 다 떠나갔다 너는 여

기에서 증발했다  

 

3부 불한당들의 세계사

 

배트맨

 

그는 어둠의 지배자였다 동굴처럼 패어나간 골목 저쪽

끝에서 이쪽끝까지,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점프컷으로

날아오던 남자가 있었다 한성여고 뒤편은 달의 뒷면과 같아서

꼬불꼬불한 내부를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달빛

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 골목 저쪽에서 전전반측, 그가 날

아왔다 불운한 이들이 길을 잃을 때마다 그는 검은

날개를 펼쳐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곤 했다 불우

한 이들이 비명을 듣고 뛰쳐나와도 한번도 그를 본 적은 없

었다는 후문이다 그는 어둠의 지배자였다 여자들이 가슴에

품은 두 개의 달, 그 빛 아래서만 그는 제 모습을 드러 냈던

것이다

 

요괴인간

 

 벰 베라 베로를 아시는가? 손가락이 세개씩, 두 손에

도합 여섯 개밖에 없던 남매, 셋이 가진 걸 다 합쳐도 겨

우 열여덟개였던 남매, 게다가 맏이는 장님이어서 셋을

모아도 눈동자는 넷뿐이던 남매.

 

늘 사람이 되고 싶다고 중얼거리던 이들

 

돼지 엄마네 큰 형은 도수 높은 안경알 속에 콩알만한

눈을 끔벅이며 서류철 속에서 살았다 형은 동사무소 9급

주사보, 주민등록등본 호적등본 호적초본 인감증명서 토

지 대장 사이를 왕복했다

 

 작은형은 공장에 나갔는데 프레쓰기가 손가락 둘을 먹

어 버렸다 늘 왼손으로만 악수하던 사람, 사귀던 여자가

떠나갔는데 힘센 오른손으로는 잡을 수가 없어서 대신에

세 손가락으로 엿을 먹였다고 한다

 

막내 미정이는 내 쌘드백, 학교 가면서 한 번 오면서 한

 번 저녁에 또 한 번 미정이는 얻어맞았다 왜 때렸느내고

묻는다면 쌘드백이 거기 있어서라고 대답할 수밖에, 나

중에 버스차장이 되었고 문틀에 끼어 왼손이 너덜너덜

해졌다 오라이라는 거, 쉽지 않은 말이다

 

요괴인간은 늘 악마, 유령, 좀비, 늑대인간들과 싸웠다 적

들의 목록을 간추리는 일은 당신에게 맡기겠다 엄마가

돼지인지 돼지들의 엄마인지도 눈 밝은 당신의 몫이다

다만 내가 어둠의 세력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사람

이 되는 게 쉬웠으면 그들이 출연할 때마다 노래를 했겠

는가 이 말이다.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

 

 나의 1980년은 먼 곳의 이상한 소문과 무더위, 형이 가

방 밑창에 숨겨온 선데이 서울과 수시로 출몰하던 비행

접시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박철순보다 멋진 커브를 구사했다

 상 위의 김치와 시금치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에서 휙

휙 날았다

 

 나 또한 접시를 타고 가볍게 담장을 넘고 싶었으

나......먼저 나간 형의 1982년은 뺨 석 대에 끝났다 나는

선데이 서울을 옆에 끼고 골방에서 자는 척했다

 

 1984년의 선데이 서울에는 비키니 미녀가 살았다 화중

지병이라 할까 지병이라 할까 가슴에서 천

불이 일었다  브로마이드를 펼치면 그녀가 걸어나올 것

같았다

 

 1987년의 서울엔 선데이가 따로 없었다 외계에서

온 돌멩이들이 거리를 날아다녔다 TV에서 민머리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잘못한 게 없어서 용서받을 수 없던 때는 그 시절로 끝

이 났다 이를테면 1989년, 떠나간 여자에게 내가 건넨 꽃

은 조화였다 가짜여서 내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후일담을 덧붙여야 겠다 80년대는 박철순과 아버지의

전성기였다 90년대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선데이 서

울이 폐간했고 (1991년) 아버지가 외계로 날아가셨다(1993)

같은 해에 비행접시가 사라졌고 좀더 있다가 박철순이

은퇴했다(1996년) 모두가 전성기는 한참 지났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