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종(高在鍾) 시모음
너의 얼굴
예기치 않은 어느 날 내 앞에서
눈물로 중독된 눈을 하고서는
무언가를 애써 말하려고 더듬, 더듬거리는
그러나 끝내
온몸이 뒤틀려버려 말을 못하는
너의 얼굴은 내게 계시(啓示)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무력한 네 얼굴로 나는 상처 받고
무력한 네 얼굴에 저항할 수 없다
버려진 고아처럼 나는 나를 얼마나 울어야 하나
홀로된 과부처럼 나는 세상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한밤중 나그네처럼 별의 지도도
없이
예기치 않게 나타난 내 앞의 너는
네가 당하는 가난과 고통으로 나의 하늘이다
나는 너로 인해 죄책하지도 않고
나는
너를 연민하지도 않고
그러므로 나는 다만 너를 모실 뿐이다
기막히게는 말할 수 없는 네 뒤로
기막히게는 번지는 밀감빛 노을을
네가 잃어버린 날에 대한 서러움이라기보단
네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곳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차마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중독된 눈물을 잃어버리고
말해질 수 없는 말을 잃어버리고
내 마음을 잃어버리기까지는, 너의 계시
너의 사랑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시 출처 - 『문학사상』(2005. 10월호)
에서
억새꽃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를 찾아
십일월의 억새밭에 든다.
이 쓸쓸한 봉두난발의 바람집에서
내
어쩌려고 고향을 느끼는 건
내 안에 든 행려나 남루 때문일 터.
먼 데서 아주 먼 데서
내 안으로 속삭여오는 바람은
시퍼런
초록으로 뻗치던 억새밭에
마른 울음이나 치고, 그 울음에
나도 뭔가 한없이 떨리는 게 있지만
내 몸의 새것들을 누더기로
만들고
나날의 새것들을 흙먼지로 만들고
비로소 눈이 보이는 나는
억새 속에 고개 떨군 귀신이 보인다.
어깨를 들썩이는
망나니를 쓸어댄다.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에 누우면
훗날 거기 바람도 없이 억새도 없이
억새꽃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경전[經典-]
차랑차랑 순금 이삭 일렁이는
추분의 들판에 서서
먼 곳으로 고개를 드는 어머니의
수정눈물은 나의 경전이다
지난여름 큰비 큰바람에
죄다 꺽힌 닷마지기 논을
죄다 일으켜 세우고
당신의 허리가 꺽이어선
자리보존하던 어머니를 나는 안다
시방 김제 만경 들판에 가보아라
하늘이 어쩌려고
그토록 순금 햇살을 쏟아붓는지
쏟아
부어선 따글따글 익히는 게
어머니의 수정 눈물은 아닐는지
지평선을 바라보지 말자
왕배아배야 내가 가 닿을 곳은
저 눈에서 피를 뽑다
피투성이 흙감댕이 몸으로
나를 낳고 낳는 어머니의 환한 품
죽어서 하늘로 가지 않고
저 시리게는 신신한 땅에 묻히는
어머니의 수정 눈물이
추호라도
삼가는 나의 경전이다
세월의 여자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의 상족암에
때 아닌 겨울비 치는 바다,
파도가 고래 떼처럼 몰려온다 말한
그녀는 거기 홀로 견디는 거다.
그녀와 거기서 좀 지체해도 좋았던 그곳엔
백악기 때의 공룡 발자국과
만권서 쌓은 듯한 퇴적암에 층층 새겨진 세월,
그것과 함께 그곳에선
그녀 가슴에 패인 삶의 사랑의 상처도
빗물 고이는 공룡 발자국처럼 오래
가리라는 것을 짐짓
모른 체해야 한다.
몇 번이고 숨이 턱턱 막혀
그 가슴의 울혈, 퇴적암처럼 더께 얹고 나니
고독은 삶에 대한 경건한
수절이더라며
그녀는 오연한 눈빛이던 거다.
어쩌면 그녀는 일억 년 전까지는 추억되는
무상의 시간들을 보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또 만권서보다 더한 것들을
세월 밖에까지 쌓고 싶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바다가
고래 떼처럼 몰려온다고 말한 것도 그녀다.
난 비 아니라도 온통 젖어 그만이던 거다.
*출전 - 『쪽빛 문장』고재종 (문학사상, 2004.)
산벚꽃 펄펄 지는데
산벚꽃 펄펄 지는데
산벚꽃은 자꾸 지는데
그 아래 돗자리를 깔고
이승에서 마지막 소풍 나온 듯한 남녀
눈 밑에 자주빛 낀 여자는
한사코 그를 올려다보고
구릿빛 커다란 손을 가진 남자는
한사코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는데
그렁그렁이라 할까
글썽글썽이라 할까
그냥 만물의 눈물이 넘칠 듯한데
산벛꽃은 언제까지 날릴라나
산벚꽃은 아흐,
저승의 드라이아이스처럼
*출처 - 『열린시학』(2005. 가을호) 에서
수숫대 높이만큼
네가 그리다 말고 간
달이 휘영청 밝아서는
댓그림자 쓰윽 쓰윽
마당을 잘 쓸고 있다
백 리 밖까지 확
트여서는
귀뚜라미 찌찌찌찌찌찌
너를 향해 타전을 하는 데
아무 장애는 없다
바람이 한결 선선해져서
날개가 까실까실
잘 마른
씨르래기의 연주도
씨르릉 씨르릉 넘친다
텃밭의 수숫대 높이를 하곤
이 깊고 푸른 잔을 든다
나는 아직 견딜
만하다
시방 제 이름을 못 얻는
대숲 속의 저 새울음만큼
목백일홍 꽃그늘에서 보낸 한철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노래한 시인은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고 적었네.
오늘 나는 목백일홍 꽃그늘에서
석 달 열흘은
사랑하리라고 적어도
나의 큰 죄과는 어쩔 수 없네, 늘 삶의 바깥에
숨은 음모가 있는 거라고 핑계댔으니
불행은 내가 창조한
신이어서,
저 황홀한 아편 송이송이 같은 색들
아편 맛 같은 색정에 저항하지 못하는
삼복염천의 호사를 어찌하랴.
회의하다니 몽상하다니, 고통은 여기 있고
우울이라니 동경이라니, 죽음은 내가 원했다.
새 애인을 만나 전 남자의 아이를
지우러 가는
여자가 걷는 길처럼
내가 걷는 길은 언제나 나의 형벌이었으니
삼복염천 개는 제발 목 달지 말고, 피비린내는
참수의 무리가 닥치기 전에
온통 색뿐이어서 색정뿐이어서
천지가 따로 없는 저 황홀로 터지며
석 달 열흘은 사랑하리라
해도, 복날
개처럼 늘어진 환멸 때문에
마냥 긁어대는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나는
내 비명의, 송이송이의, 목백일홍만을
보네.
수평선
저렇게는 저렇게는
물낯에 꽂히는 빛의 작살 떼와
그 작살 뗄 맞고 번쩍번쩍
물낯 위로 튀는 숭어 떼와
그 또 숭어뗄 채고 채는
하도나 무정한 갈매기 떼여
이런 날엔 이런 날엔
네게 차마 못 닿고 부서지던
서러움, 서러움의 떼까지
이내 까치놀 이는 먼 곳까지
북극성을 일별하다
별 볼일 없는 일들 때문에
별 한번 보지 못하고 살다가
추석날 고향집 툇마루에 앉아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자리 사이
북극성, 당신을 일별합니다.
늘 저의 일에 관심을 두시고
언제든지 맞아들일 채비를 마친 채
저를 내려다 보시는 당신의
恒心 아래서 저는 떠돌이였습니다.
아주 어릴 적, 제가 사랑하는 소녀와
늦도록 강둑에 앉아 애너벨 리를 읽고
아예 씨르래기 울음을 연주 삼아
당신을 애너벨 리로 명명했지요.
그 호명 이후 늘 당신은
제가 부자될만하면 가난케 하고
제가 날 것 같으면 어깨를 치시고
제가 연애할 양이면 눈멀게 하셔서
쌀싸라기 같은 그때 그 순결을
호젓이 돌아보게 했지요.
제가 헌 상자며 넝마 등을 가득 싣고
좌우로 낑낑대며 비탈길을 오르는
굽은 등허리의 리어카꾼 노인처럼
생을 낑낑대며 끌어대다 돌아와
이제 이렇게 당신께 고백합니다.
애초에 당신을 함께 호명했던 소녀마저
이젠 남의 여자가 된 지 오래라고.
* 출처 - -『애지』 (2005년 가을호) pp. 168 ~ 169.
할매 말에 싹이 돋고 잎이 피고
고들빼기는 씨가 잔게 흙에다 섞어 뿌리고
도라지는 잔설 있을 때 심거야 썩지 않는다네
진안장 귀퉁이 주재순 할매의 씨앗가게
콩씨 상추시 아주까리씨며 참깨씨랑
요모조모 다 있는 씨오쟁이마다 쌔근거리는 씨들
요렇게 햇볕 좋고 날 따수어야 싹이 튼다네
흙이 보슬보슬해져야 쑥쑥 자란다네
세상에 저 혼자 나오는 건 아무 것도 없고
다 씨가 있어야 나온다는 할매 말에
금새 수숫잎이 일렁이고 해바라기가 돌고
배추가 깍짓동만 해지고 참깨가 은종을 울리는
장터, 이제 스스로는 무얼 더 생산할 수도 없이
유복자가 해준 틀니에 등은 온통 굽었는데
나는 작은 게 좋아, 요 씨앗들이 다 작잖아,
요것 한 줌이면 식구들 배불리 먹인다는 할매는
길 걸을 때면 발길 닿는 데마다 씨오쟁이를 열어
갓씨 고추씨 오이씨 죄다 뿌린다네
할매에겐 땅 한 뼘 없어도 걸어댕겨 보면
천지에 온통 오목조목 씨뿌릴 땅이어서
어느 누가 거두어 가든 상관 않고 뿌린다네
누가 됐든 흡족하게 묵으면 월매나 좋겄냐고.
* 출처 - -『애지』 (2005년 가을호) p. 167.
저녁새도 깃드는
우리네 사는 일쯤
애당초
논리도 없는 작위도 없는,
저기 저렇게 저녁바람은 순하고
몇 뙈기 논밭 있어
진종일 씨뿌리고
노을빛 반짝이는 강둑따라
지게짐도 마냥 가볍습니다
당신의 머리에 인
빈 함지박도 풍성합니다
마을엔 생솔연기마저 피어오르고
고단한 몸뚱이는
어쩌자고 싱그럽기까지 하는데
당신의 붉어진 얼굴빛이야
맨넋의
내 가슴 설레이게 합니다
진종일 뿌린 씨
어쩌면 순정한 당신처럼
고즈너기 피어날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면 내
묵묵한 농자의 길
결코 자랑스럽기도 하겠습니다
아무렴 자그마한 행복도 갖겠습니다
저 강둑의 이름 모를 풀곷처럼
풀꽃처럼
우리네 사는 일쯤
정자나무 그늘 아래
느티나무 수만 이파리들이 손사래 치는
느티나무 그늘 소쇄한 정자에
애진 마음이 다 되어 앉아본 적이 있느냐.
물색
푸른 앞들은 가멸지고,
나는 오늘도 정자에 나와선
멍석몰이쯤 당한 삭신이라도
바람의 아홉새베에 씻고 씻어보는 것이다.
느티나무 그늘 암암할수록
그늘 밖의 세상은 아연 환해지는
느티나무 그늘에 너와라도 함께인 듯 앉아,
저 느티나무의
어처구니 둥치와
둥치에 새겨진 세월의 鱗片을 생각하면
오목가슴이 꽉 메여오기도 하는데,
나는 내 사소한 날의
우련
우련 치미는 서러움만
매미 떼의 곡지통에 실어보는 것이다.
이제는 찾는 이도 몇 안 되는 정자에
시방 몇몇의 고랑진 허드레
얼굴들,
그 흙빛 들수록 앞들은 점점 푸르러지는
느티나무 그늘 생생한 정자에서
어제는 하염없던 쑥국새 울음을 듣고
시방은 치자향 아득한 것도 맡아보는데,
딴엔 꽃과 새의 視聽 너머에
더 간절한 바도 있는 것이다.
가령 이 느티나무
둥치 부여안고
흰 달밤, 어느 여인이 목놓아 울고
이 느티나무 둥치 찍어대며
웬 봉두난발이 발분했던가 하는 것들인데,
너는 언젠가 추억되는 것의 아름다움
혹은 슬픔이라고 했던가. 나는
내친김에 실낱 줄기 못 끊는 저 냇물과
그 냇가의
새까만 벌때추니 떼며
겨울이면 마을의 그만그만한 집들과
나뭇가지 끝마다 열리는 별 떼랑
하냥 난장을 트던 것도
되새김하다간,
그 은성했던 육두문자와 파안대소와도
참 서느럽게는 등을 돌린 정자에 앉아
오늘은 다만 성성한 노동과
오늘은 다만 뜨거운 사랑과 휴식의
오늘의 생생한 나라를 묻고 묻는 것이다.
오늘도 간간 쑥국새 울음은 깃들어선
이렇게 두 눈 그렁그렁하게는
흰 구름 저편까지를 바라보게 하는데
그러면 저기, 저 生은 또 어쩌려고
뭉실뭉실 이는
수국화처럼
환한 그늘로 차오르고,
이쯤이면 나도 그만 애진 마음이 다 되어
부쩌지 못하는 걸 너도 알겠느냐.
그러다가도 상처투성이의 느티나무와
그 상처마다에서 끈덕지게는 뽑아내는
푸른 잎새를 헤다보면
그 잎새 하나로 默默靑靑
남은 일도
너무 서러워지지는 않겠다 싶은 날,
앞들은 이미 벼꽃 장관을 펼치는 것이다.
고재종 시집 <그때 휘바람새가 울었다> 시와시학사
초록 聖火의
길
하늘에 닿을 듯 수려 찬란한 메타세콰이아. 저 나무를
커다란 초록 성화라 해도 괜찮겠다. 담양에서 순창까지
의
시오릿길에 도열한, 저 초록 성화 천여 자루. 내가 너
희로 인해 세상을 수긍할 때 나는 무엇을 본 셈일까. 초
록 성화의 길
저곳으로, 싱싱 씽씽 은륜을 밟는 아이들의
꿈, 스치는 이팝꽃 향기. 아득했다 하자. 초록 성화의 길
저곳으로, 뒤뚱거리는 한
노부부의 어두운 귀, 저미는 까
치집의 까치소리. 따뜻했다 하자. 나는 한숨과 탄식의 길
을 걸어왔다. 초록 성화의 저 길로 어느
비바람 치는 날
非非非 잎새 날릴 때, 터덜거리는 시골버스는 나보다 더
터덜거렸다. 터덜거리는 뒤끝이 별들의 푸른 밀어 쪽이
라면, 그 푸른 전설들이 가지끝마다 주저리주저리 열린
다면, 저 나무가 한겨울 큰눈 뒤집어쓴들, 어느 나그네의
詩琴이
울려나지 않을 리 없겠지. 나는 때로 슬픈 것을
좋아한다. 저 나무에 걸리던 동박새와 소쩍새의 울음을
추억한다. 나는 또한 생생한
것을 좋아한다. 저 나무를
흔들던 쓰르라미와 씨르래기의 노래를 기억한다. 초록
성화의 길, 저 길이 급기야 불끈! 청청!
하느님에게까지
닿는 길이거늘 나는 이제 고요하여도 되는가. 하면 저 길
이 길이거늘 저 길을 잘라내고 웬 길을 내려는가. 마을에
선 왜 弔鐘을 울려대지 않는가. 너와 나는 뜨거운 팔짱 끼
고, 저 초록 성화의 길 아득한 소실점 속으로, 어떤 씩씩
한
사랑으로 차마 사라지는가. 오늘은 염천, 저 초록 성
화는 저희들끼리 분기탱천, 더욱 타오른다면, 나는 또 세
상에 대하여 무엇을
소리칠까.
출렁거림에
대하여
너를
만나고 온 날은, 어쩌랴 마음에
반짝이는 물비늘 같은 것 가득 출렁거려서
바람 불어오는 강둑에 오래오래 서 있느니
잔바람
한자락에도 한없이 물살치는 잎새처럼
네 숨결 한올에 내 가슴 별처럼 희게 부서지던
그 못다한 시간들이 마냥 출렁거려서
내가
시방도 강변의 조약돌로 일렁이건 말건
내가 시방도 강둑에 패랭이꽃 총총 피우건 말건
이승꽃의 향기에 저승새가 취하면
高山의 석남화라 했지요.
네가 석남화 머리에 꽂고 죽으면
나도 석남화 머리에 꽂고 죽는 소리에
너와나와가 함께
깨어난다고 했지요.
백두산 골짝 암벽에 피는 꽃,
노랑만병초라고도 하는데요.
그 향기가 하도나 좋아선, 네 오랜 체증도
내 밭은 정기도 새삼새삼 씻는다는데요.
그것이 광대고원을 달리는 바람 향이거나
그것이 감사나운 강풍이 잠깐 비낀 날,
아청빛 하늘의 흰구름 향이거나
그것이 구름 저편에 아스라히 묻힌
시간 밖의 시간을 일깨우는 은하 향이어서
그래요,
석남화 향기 맡으면
妙音鳥라던가 그런 새가 울 것 같아요.
극락정토 설산에 살아서
너무도 춤 잘 추고 너무도 美音을 내어선
네가 병들고 내가 죽을지라도
왜 아니 싱싱하고 왜 아니 생생하도록
그렇게 그렇게 새가 울고 말겠지요.
그러면
석남화주, 내 마시고 너도 마시고
한 오십년 더 우는 거예요, 그 눈물로
꽃 향기와 새 노래 듣는 꿈길을
너와나와는 조금은
닦을 수가 있어서
두발부리 두억시니와 같은 세상의
서러운 사랑들 먼저 걷게 할 테지요.
무늬
나뭇잎 그늘이 일렁일렁
오솔길을 쓸고
오솔길에 무늬를 짠다
나뭇잎 그늘 없는
나뭇잎이 어디에 있는가
나뭇잎 그늘에
누워 마음의 상처를
쓸지만 상처 없이는
생의 무늬를 짜지못한다
아. 사랑의 그늘은
나를 이윽하게 하지
이윽함 없는 봄날은
찬란히 갔지
나뭇잎 그늘이 일렁일렁
내 생의 이정 (里程)을 쓸고
그 이정의 무늬를 밟으며
나는이제 막 중생 (重生)의
하루를 통과하는데
시방 눈앞에 일렁이는 게
나뭇잎인가 그 그늘인가
篆刻전각
푸르른 한때
애인의 이름을 나무둥치에 새기며
소리 죽여 운 적이 있다
수천 수만 나뭇잎이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