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조 시모음
1946년 경남 창원 출생
1972년「어떤 냄새의 서설」을 현대시학에 발표함으로써 시작 활동
1986년「강에서」「이주 일기」「그해 봄날」「떠도는 섬」등 13편으로
제1회 동서문학 신인문학상 당선
시집,「귀현리」「없어졌다」「감자를 굽고 싶다」「고요한 숲」「언덕 저쪽에 집이 있다」
시를 작곡한 가곡집「감자를 굽고 싶다」 음반으로 출반
성산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창원 오페라단장, 경남 오페라 단장 역임
1996년 제6회 편운문학상 수상
다리
전화가설공 김씨는 공중에 떠있다. 그는 허공을 밟고 활쏘는 헤라클레스처럼 남쪽하늘을 팽팽히 잡아당긴다. 당길 때마다 봄 하늘이 조금씩 다가왔다. 공중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 들린다. 사랑해요. 화살처럼 달려가는 중이다. 붉은 자켓을 펄럭이며 그는 지금 길을 닦는 중이다. 하늘을 가로질러 푸른 다리를 놓는 중이다. 제비들이 어깨를 밟을 듯 지저귄다. 그는 허공과 허공 사이에 케이블을 걸고 벚나무 가지가 붉어질 때까지 죽은 기억들을 끌어당긴다. 허공을 밟을 때마다 목조계단이 바스라지며 가슴을 찌른다. 모든 언덕이 팽팽해진다. 살아오는 중이다. 말과 말 사이에 물길이 트이는 중이다. 중심이다. 닿을 수 없는 마음들이 물길에 실려 가는 것이 보인다. 그는 지금 허공을 밟으며 그대에게로 가는 푸른 다리를 놓는 중이다.
감자
감자를 먹고 있다. 논둑에 걸터앉아 농부들이 감자를 먹고 있다. 젓가락이나 포크 대신 순 맨손으로 감자를 먹고 있다. 살과 살을 부딪치며 몸과 몸을 부딪치며 모내기가 막 끝난 그들의 들판을 조금씩 베어먹고 있다. 바구니에 그득한 크고 작은 햇감자들 부끄러운 알몸을 천천히 벗기면서 맨손으로 감자를 먹고 있다. 감자의 젖가슴을 먹고 있다. 지금 막 태어난 처음의 말씀들 먹고 있다. 뜸부기가 우는 앞산을 바라보며 기우뚱 검게 그을린 감자의 얼굴들 흐린 물빛에 어려있다. 두 발은 무논의 진흙 속에 꽉 박혀 있다. 깊고 깊다.
암
암이었다 반군이었다
본시 피를 나눈 동지였다
그들은 교활하고 치밀하였다
그녀가 아이들을 키우고
헌 양말을 꿰맬 동안
몸의 중심에 은밀히 거점을 만들고
城을 쌓았다
그리고 갈대 숲 우거진 붉은 강을 따라
게릴라들이 조금씩
영토를 장악해갔다
공화국에서는 자우익이
공존할 수 없었다
적과 죽음이 있을 뿐
동지는 없었다
충성은 새빨간 거짓이었다
힘을 따라 아군이 되고
적이 되기도 했다
한 줌의 머리칼만 남겼던
긴 내란은 속수무책이었다
응급실로 가는 최후의 저지선에서
그가 마른장작처럼 풀썩 쓰러질 때
반군들도 일제히 쓰러졌다
싸울 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멸을 택한 것이었다
하지정맥류
아내는 하지정맥류를 잃고 있다 푸른 지렁이들이 종아리를 퍼렇게 감고 있다 그는 너무 오래 서 있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풀썩 주저앉지 않으려고 바위틈에 뿌리를 깊게 박고 서있었다 너무 오래 서있었다고 몸이 일러 준 것이었다 일전에 갔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도 둥근 몸이 군데군데 깨어져 있었다 그도 무거운 지붕을 이고 너무 오래 서있었다 한 손에 약병을 들고 계신 약사여래께서도 그러하셨다 치맛자락으로 푸른 종아리를 감추시던 어머니도 그러하셨다 떠나신 지 30년이 지났어도 커다란 함지박을 이고 아직도 대문간에 서 계셨다 어머니는 언제나 서 계셨다 푸른 지렁이들이 퍼렇게 감을 때까지 그들은 너무 오래 서있었다
시선(2007년 봄호)
조장 (鳥葬)
한 사내가 독수리떼에 둘러싸여 서있다 제 아비를 맛있게 드시라고 주검을 도끼로 깨뜨려 던져놓고 우두커니 손놓고 서있다 아비의 영혼이 독수리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 오를 때가지 산중턱에 십년 째 서있다 십년 째 이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있다 십년 째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그사이 아버지도 친구도 한창 나이의 후배도 떠나갔다 사람들은 그들이 모두 하늘이거나 극락으로 갔다고 했다 그것이 답이었다 어느 땐가는 어디론가 가야하고 어디엔가 도착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보았다 그걸 보려고 티벳 어딘가 산 중턱에 십년 째 서있다 모든 영혼들이 하늘 높이 날아갈 대 까지 한 장의 사진으로 서있다
시선 (2007년 봄호)
길과 밭
공터 채마밭에 치자 철망을 사이에 두고 길과 밭이 생겼습니다 안과 밖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길이 밭이 될 수도 없고 밭이 길이 될 수도 없습니다 바깥에서 안을 볼 수도 없고 안에서 바깥을 볼 수도 없습니다 나는 너를 볼 수도 없고 너는 나를 만날 수도 없습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당신은 너무 멀리 있어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울타리를 치는 바로 그때 모든 길들은 낯설어지고 그대들은 모두 타인이 되었습니다 바라보면 내 속에 길과 밭이 있고 내 속에 안과 밖이 있습니다 환한 대낮 빈터에 말뚝을 박고 울타리를 치는 낯선 사내가 있습니다
시인시각(2007년 봄호)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