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姜寅翰) 시모음
전북 정읍
전북대 국문과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1967년 5월 공보부 신인예술상 시조 당선
시집, 『이상기후』,『불꽃』,『전라도 시인』,『우리나라 날씨』,『칼레의 시민들』
『황홀한 물살』, 시선집 『어린 신에게』
시비평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
37년간 중고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2004년 2월 명예퇴직
입맞춤, 혹은 상처
나는 확신한다
이 느닷없는 입맞춤이
나에게 상처가 되리라는 것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는 너를 가만히 끌어올리고
한 개의 작은 달걀을 두 손으로 감싸듯이
플루토에서 온 이 얼굴을 바라본다
스무 살 성처녀, 네 머리칼에서
희미하게 라일락 향기가 떠돌았고
더운 내 입술은
너의 눈 위에 포개졌다
그리고 다음 날 또 다음 날
새가 날아갔다,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겨울나무의 기억에 대하여
길게 부저가 울리고
자궁에서 태아가 밀고 나오듯
지하 차고에서 불끈 올라오는 차가 보인다
이 밤에 어디로 가려는가
갈 데 없는 우산나무들이 비에 젖는다
차선과 신호등이 거미줄로 목을 죄는
주소불명의 캄캄한 거리에서
나도 그렇게 헤매인 날이 있었다
사랑이여
내가 그대에게 드릴 것은 빈손뿐일지라도
우리 둘이 참새처럼 걷던
잎 진 나무들의 짧은 숲길, 손금 사이로 흐르는
은빛 물결과 빛나는 햇살을 기억하나니
홀로 눈뜨는 밤마다 그대의 안부가 그리워
가슴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올라오는
핏덩이 같은 것, 한 덩이 검은 침묵 같은 것
사랑이여
눈이 맑은 이여
비 맞는 검은 가지마다 환하게 등을 밝히기 전
목련나무는 한참을 더 아파야 한다
더 아파야만 한다
낯선 시간 앞에서
낯선 시간 앞에 서 있다
네가 벗어놓은 그림자가
여기 있다
카페모카의 오후 세 시, 달콤한 수요일
생크림으로 추억은 장식되었으나
이 추억은 치명적이다
내 앞의 빈 의자 위에 걸쳐져 있는
너의 그림자는 타르보다 쓰고
낯선 시간을 마주한 나는 시력을 잃는다
갑자기 초라해진다
봉인된 시간 속에서 나는
기억해 내고 싶은 것들을 찾아낸다
이제 긴 밤이 찾아온다
떨리는 손으로 나는 너의 얼굴을
조용히 들어올린다
내 손에 남은 봄
부드러운 능선의 칼금을 문 하늘 위로
제비가 왔다, 생일이면
내 전생에 상제의 딸을 엿본 죄로
여기 서서
담 너머 눈부신 향기가 날아오고
영롱한 구슬소리가
종일토록 늙은 벚나무 꽃잎을 털어
목욕을 마친 그대 속살의 분홍
그대 속살의 향긋한 흰빛을
다 비춰줄 때까지
기다린다
후생의 내가 살아
바라보는 스스로의 옷이 문득 낯설고
오랜 기다림에 목이 말라
자꾸만 거울을 보는데
뒤꼭지 까만 밤이
발을 적실 듯 길게 흘러나온다
사랑이여, 펼치고 펼쳐서
내 손에 남은 봄이
이제 많지 않다
늦은 봄날
간장 항아리 위에
둥근 하늘이 내려오고
매지구름 한 장
떴다가
지나가듯이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가끔은 내 생각도 하는지
늦은 봄날 저녁
머언 그대의 집 유리창에
슬며시 얹히는 놀빛
모닥불로 피었다가
스러지듯이
계간 <시안>2007 여름호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