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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내게 찾아오는 때, 교감 3-1 / 고재종 (펌)

휘수 Hwisu 2006. 2. 14. 00:07
3, 교감 - 풍경과 상처

국어사전을 보면, 시를 “풍경이나 人事 따위 일체에 관하여 일어나는 감흥이나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으로 표현한 글”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서 풍경은 자연, 인사는 인생, 감흥은 감정, 사상은 상상으로 바꿀 수도 있는 바, 동양시학에 나오는 ‘先景後精이란 말도 먼저 풍경을 묘사하고 나중에 그에 상응하는 인간의 감정을 진술한다는 것으로 시의 기본원리를 논하고 있는 셈이다.

풍경은 대상이다. 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은 주체다. 이 대상과 주체간의 교감은 생생한 시적 표현을 위한 명제다. 이런 교감은 열린 시정신에서만 가능하다. 신학자 라인훌드 니버의 말을 빌리자면 열린 시정신이란 닫혀 있는 單子들의 세계에 창문을 마련하는 일과 같다. 오늘날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대상인 풍경은 사라지고 주체의 무의식이나 여타 심리에 대한 진술만 난무하는 경우를 흔히 대하게 된다. 어떤 경우엔 그 주체의 죽음까지 운위하며 시를 그야말로 지리멸렬의 지경으로 빠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풍경을 벗어나 살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나 자신의 주체성을 해체해버리거나 나 자신의 주체성만을 고집하면서 살 수도 없다.

풍경과 주체간의 교감 곧 너나들이는 우주와 세계의 비의를 캐고 그 속에서 삶의 위의를 세우려고 하는 모든 시인들의 한결같은 꿈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 풍경이 부서지고 일그러지고 참혹한 파괴를 겪고 있다. 자본과 욕망이 이 풍경을 왜곡시키고 겁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곡된 풍경을 바로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싱싱한 풍경과의 교감을 이루겠는가. 그런데 풍경을 바로 세우는 일은 그 풍경을 훼손한 주체를 먼저 바로 세워야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소설가 김훈은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라는 명제를 세우며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고 했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이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주체에 대한 철저한 확인이자 성찰을 말하는 것이지만 주체 과잉의 혐의를 벗을 수 없다

이에 반해 오규원은 그런 싱싱한 풍경에다 인간이 문화라는 명목으로 덧칠해놓은 지배적 관념이나 허구를 벗기고, 세계의 실체인 ‘頭頭物物’의 말, 곧 현상적 사실을 날 것(‘날이미지’) 그대로 옮기자고 말한다. 이는 시에 있어서 주체의 관념을 표현하는 진술을 가급적 억제하고 풍경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게 한다. 唐詩의 빼어난 것들은 대개 이런 묘사형의 시라고 한다.

얼마 전 고은 시인은 한 잡지의 대담에서 시인들이 환경 생태문제를 노래하는 과정에서 풍경의 철학, 풍경의 미학을 꿈꾸는 일 또한 중요시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그동안 풍경을 제대로 완성해본 적이 없었는데 다행히 18세기의 진경산수화 같은 것에서 비로소 우리 자신의 풍경을 찾았다며 풍경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사실 풍경을 보러 다니는 ‘관광’이란 말도 본래는 "빛을 본다"는 것으로 사물의 핵심, 본질과 만난다는 뜻인데 요사이는 이동의 오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떨어져 버린 것을 또한 개탄했다.

이제 이런 풍경과 상처, 곧 대상과 주체가 시 속에서 어떻게 길항하고 어떻게 교감하는가 구체적인 시들을 통해 살펴보자.


<교감> - 보들레르

대자연은 하나의 사원이니 거기에서
산 기둥들이 때로 혼돈한 말을 새어 보내니,
사람은 친밀한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그리로 들어간다.

어둠처럼 광명처럼 광활하며
컴컴하고도 깊은 통일 속에
멀리서 혼합되는 긴 메아리들처럼
향과 색과 음향이 서로 응답한다.

어린이 살처럼 싱싱한 향기, 木笛처럼
아늑한 향기, 목장처럼 초록의 향기가 있고,
―그밖에도 썩은 풍성하고 기승한 냄새들,

정신과 육감의 앙양을 노래하는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것의 확산력 지닌 향기도 있다.


<눈 내리는 밤 숲가에 멈춰 서서> - 프로스트

이게 누구의 숲인지 나는 알 것도 같다.
하기야 그의 집은 마을에 있지만―
눈 덮인 그의 숲을 보느라고
내가 여기 멈춰 서 있는 걸 그는 모를 것이다

내 조랑말은 농가 하나 안 보이는 곳에
일년 중 가장 어두운 밤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이렇게 멈춰 서 있는 걸 이상히 여길 것이다.

무슨 착오라도 일으킨 게 아니냐는 듯
말은 목 방울을 흔들어 본다.
방울소리 외에는 솔솔 부는 바람과
부드럽게 눈 내리는 소리뿐

숲은 어둡고 깊고 아름답다,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으며 잠자기 전에 몇십 리를 더 가야 한다
잠자기 전에 몇십 리를 더 가야 한다


우선 보들레르의 시 ‘교감’은 흔히 ‘상응’이라고도 하는데, 학자들이 연구에 의하면 천상계(정신, 이데)와 지상계(물질, 감각)의 상응, 인간과 자연과의 상응, 인간과 천상계의 상응을 통틀어 의미한다고 한다. 먼저 시인은 대자연을 살아있는 기둥으로 된 사원이라고 한다. 거기에서 말은 나타나 사라지고, 사람은 언제나 친밀한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는 그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그리로 들어간다고 한다. 속인들에게는 숲의 숲, 화초목석이 한갓 자연물에 불과하지만 오직 ‘어떤 心魂의 상태 속에 도달한’ 행복한 순간에 놓여있는 사람에겐 친밀한 시선으로 그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사원’은 속인들의 종교 전당으로서의 사원이 아니고, 그 높은 ‘심혼의 상태’에 도달한 진정한 시인만이 들어갈 수 있는 사원이다.

속인에겐 ‘어둠처럼’ ‘컴컴하고’ 시인에게는 ‘광명처럼’ ‘깊은’ 통일 속에서 향기와 색깔과 음향이 마치 긴 메아리처럼 서로 응답하는 장관을 보라. 정신과 육감의 공존 대립은 보들레르에게 있어선 한 시적 원천으로 자리하는데, 3연 4연에 이어지는 썩은 냄새 ․ 용연향 ․ 사향은 육감을 앙양하고, 싱싱한 ․ 아늑한 ․ 초록의 향기들과 안식향 ․ 훈향은 정신을 앙양하며, 풍성하고 기승한 향기는 양자 어느 쪽에도 해당될 수 있다. 이러한 향기들이 무한한 확산력을 지니고 서로 상응하며 널리 퍼지는 것이다. 시인은 이처럼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리 신성한 숲의 사원에 들 수 있는 교감에 매우 능한 사람이다.

프로스트의 시는 시적화자가 조랑말을 타고 일년 중 가장 어두운 밤에 눈 덮인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멈춰 서 있다. 방울소리와 바람소리와 부드럽게 눈 내리는 소리뿐인 “숲은 어둡고 깊고 아름답다”. 문학평론가 도정일은 이렇게 어둡고 깊고 아름다운 숲은 이제 이 지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산성비와 공해로 얼룩진 바람에 이제 더는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고 비탄한다. 어쨌건 시적 화자는 그렇게 어둡고 깊고 아름다운 눈 내리는 숲을 경이에 찬 눈길로 바라보지만, 이윽고 지켜야 할 약속 때문에 잠자기 전에 몇 십리를 더 가야 한다고 재차 다짐을 한다. 이는 풍경에 몰입되어 버린 나머지 인간의 의무를 방기하는 시인들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보들레르처럼 풍경에의 몰입보다는 풍경에 취하면서도 주체의 성찰을 중시하는 게 프로스트인 것이다.

대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상징의 숲을 가로지르고 여기에 온갖 향기가 넘쳐나는 시의 사원 혹은 높은 심혼의 상태에 든 보들레르나, 어둡고 깊고 아름다운 숲에서의 평온한 잠을 꿈꾸지만 아직 삶의 의무가 남아 있어서 몇 십리를 더 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프로스트는 각기 개성대로 풍경을 바라본다.

이런 두 시인의 풍경을 대하는 방식은 다음 천양희와 고은의 시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추월산> - 천양희

바람이 먼저 능선을 넘었습니다 능선 아래 계곡 깊고 바위들은 오래 묵묵합니다 속 깊은 저것이 모성일까요 온갖 잡새들, 잡풀들, 피라미떼들 몰려 있습니다. 어린 꽃들 함께 깔깔거리고 버들치들 여울 타고 찰랑댑니다 회화나무 그늘에 잠시 머뭅니다 누구나 머물다 떠나갑니다 사람들은 자꾸 올라가고 물소리는 자꾸 내려갑니다 내려가는 것이 저렇게 태연합니다 無等한 것이 저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누가 세울 수 있을까요 저 무량수궁 오늘은 물소리가 더 절창입니다 응달쪽에서 자란 나무들이 큰 재목 된다고, 우선 한소절 불러젖힙니다 자연처럼 자연스런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나는 저물기 전에 해탈교를 건너야 합니다 그걸 건넌다고 해탈할까요 바람새 날아가다 길을 바꿉니다 도리천 가는 길 너무 멀고 하늘은 넓으나 공터가 아닙니다 무심코 하늘 한번 올려다봅니다 마음이 또 구름을 잡았다 놓습니다 산이 험한 듯 내가 가파릅니다 雉俗고개 다 넘고서야 겨우 추월산에 듭니다


천양희의 <추월산>은 풍경과 주체의 절절한 화응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화자보다 먼저 능선을 넘는 바람, 능선 아래의 깊은 계곡과 묵묵한 바위, 거기에 몰려서 깔깔거리고 찰랑대는 잡새들, 잡풀들, 피라미떼들, 어린 꽃들, 버들치들을 묘사하다간 회화나무 그늘에 잠시 머물면서 ‘누구나 머물다 떠나가는’ 지상의 留宿에 대한 사유를 해대고, 사람들은 자꾸 올라가는데 무등한 물소리는 자꾸 내려간다며 이야말로 절창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람의 교만을 비판하고, 응달쪽에서 자란 나무들이 큰 재목이 된다는 깨달음을 하며, 결국엔 자연처럼 자연스런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자연스레 진술해내는 그 유려함이 너무 진정스럽다. 한마디로 자연학교의 모범생만이 쓸 수 있는 시이다.

그런데 이 시는 보들레르처럼 자연을 살아있는 기둥으로 된 신전으로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인 까닭에 후반부에 나오는 주체의 저물고, 너무 멀고, 험하고, 가파른 심적 상태는 사실 핍진성이 별로 없는 허사 같은 것이 흠이다. 자연의 완전성에 대한 맹목적 믿음은 그 믿음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다.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 고은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 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

얼마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 년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
깨물어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남의 어린 외동으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했다


고은의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라는 시는 1984년 시집『조국의 별』에 발표된 시이다. 우선 이 시의 의미구조를 좇아가 보면, 그것은 시적화자가 자작나무 숲에 들어와 그 겨울나무들을 통하여 타락하지 않는 것 곧 정직한 것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1연), 그리고 자신과 자연 그리고 세상 전체가 일체되는 것을 느낀다. 물론 거짓이 없는 슬픔을 오래 울어온 우리나라 여자들이야말로 당연히 이 일체 속에 맨 먼저 끼게 된다(2연). 이어서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지금까지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던 너무나 교조적인 삶을 반성하고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어진다(3연). 그와 동시에 마침내 발견한 삶의 강렬한 경건성으로 나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다시 태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하고(4연), 그리하여 험한 길로 지향하는 새로운 출발을 한다(5연).

따라서 이 시도 일단 자연과의 교감을 통하여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신생과 도약을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가 나게 된 것은 더 큰 배경이 있다. 고은은 스스로 자신의 스승으로 효봉선사와 전태일 두 사람을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꼽는다. 1970년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사건은 절에서 환속한 후 그때까지 허무주의적 음주와 황음과 탐미의 삶에 빠진 고은의 삶을 거듭나게 하여 민족에 대한 사랑과 민주회복의 투쟁에 나서게 한다. 그리하여 각종 시국사건에 관여하는 바람에 여러 차례의 구금, 투옥, 폭행당하는 고초를 겪는다. 하지만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전위를 자처하는 그런 교조적인 삶에 대한 자기비판은 당시 문단에 대두된 ‘리얼리즘 재생의 모색’을 위해서도 필요했고, 동시에 나무의 떨림을 통해 생명의 충만 속에 깃들인 삶의 경건성을 발견하고 마침내 순해지고 싶다는 성찰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 또한 자기 개인적 삶의 변증법적 통일을 위해서도 필요했던 것이다. 자연과 인생, 혹은 풍경과 주체는 어느 한쪽만으로 치울 땐 삶과 세계의 총체성을 놓치기 쉬운 것이다. 결국 이 시는 풍경을 통해 신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역시 삶의 갱신 쪽에 무게가 더 있는 것이다.

천양희와 고은의 풍경에 대한 주체의 대응은 정현종과 김명인에게서도 계속된다.


<그 꽃다발> - 정현종

마추피추 山頂 갔다 오는 길에
무슨 일인지 기차가 산중에서
한참 서 있었습니다.
나는 내렸습니다.
너덧 살 되었는지
(저렇게 작은 사람이 있다니!)
잉카의 소녀 하나가
저녁 어스름 속에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항상 씨앗의 숨소리가 들리는
어스름 속에,
저 견딜 수 없는 박명 속에,
꽃다발을 들고, 붙박인 듯이.
나는 가까이 가서
(어스름의 장막 속에서 그 아이의
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보았습니다.
이럴 때 눈은 우주입니다.
그 미소의 보석으로 지구는 빛나고
그 미소의 天眞 속에 시냇물 흘러갑니다.
그 미소 멀리멀리 퍼져나갑니다.
어스름의 光度 속에 퍼져나갑니다.)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2솔을 주고 꽃다발을 받아들었습니다.
허공의 심장이 팽창하고 있었습니다.


<바다의 아코디언> - 김명인

노래라면 내가 부를 차례라도
너조차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다
다리 절며 혼자 부안 격포로 돌 때
갈매기 울음으로 친다면 수수억 톤
파도소리 긁어대던 아코디언이
갯벌 위에 떨어져 있다.
파도는 몇 겁쯤 건반에 얹히더라도
지치거나 병들거나 늙는 법이 없어서
소리로 파이는 시간의 헛된 주름만 수시로
저의 生滅을 거듭할 뿐.
접혔다 펼쳐지는 한순간이라면 이미
한생애의 내력일 것이니.
추억과 고집 중 어느 것으로
저 영원을 다 켜댈 수 있겠느냐.
채석에 스몄다 빠져나가는 썰물이
오늘도 석양에 반짝거린다.
고요해지거라. 고요해지거라.
쓰려고 작정하면 어느새 바닥 드러내는
삶과 같아서 뻘밭 위
무수한 겹주름들.
저물더라도 나머지의 음자리까지
천천히, 천천히 파도 소리가 씻어 내리니,
지워진 자취가 비로소 아득해지는
어스름 속으로
누군가 끝없이 아코디언을 펼치고 있다.


정현종의 시는, 시인이 페루 마추피추 갔다가 내려오는 석양의 박명 속에 꽃다발을 들고 선 조그마한 잉카 소녀 하나를 발견하고, 경이와 환희에 차서, 그 꽃다발을 사주는 동안 그 소녀의 미소에 완전히 몰입해버린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 미소의 보석으로 지구가 빛나고, 그 미소의 천진 속에 시냇물이 흘러간다니! 풍경의 원래 말은 ‘風光’이었다던가. 빛과 바람. 만약에 자그마한 잉카소녀가 ‘저 견딜 수 없는 박명 속에’, 그러니까 석양의 그 희미한 빛 속에 서 있지 않았더라면 어쨌을까.

정현종의 다른 시<밀려오는 게 무엇이냐>를 보자. “
바람을 일으키며/ 모든 걸 뒤바꾸며/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집들은 물렁물렁해지고/ 티끌은 반짝이며/ 천지사방 구멍이 숭숭/ 온갖 것 숨쉬기 좋은/ 개벽./ 돌연 한없는 꽃밭/ 코를 지르는 향기/ 큰 숨결 한바탕/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막힌 것들을 뚫으며/ 길이란 길은 다 열어놓으며/ 무한 變身을 춤추며/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오 詩야 너 아니냐.”

이 시는 바람의 이미지와 숨결의 가치를 의미있게 부각시킨 작품이다. 정현종의 중요한 시론인 「시의 자기동일성」은 풍경과 주체의 황홀한 합일 가운데 터져나오는 자유의 숨결, 생명의 숨결, 자연의 숨결에 대한 논리를 담고 있다. 그의 시쓰기는 그러므로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고, 우리의 의식과 정신을 마비시키는 모든 죽음의 세력에 대한 저항의 시도이며, 또한 문명과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되고 쭈그러든 인간의 원초적 자아를 회생시켜 우리를 우주적인 운동과 생기 속에 열어놓으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그것을 숨결의 시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위의 시는 바로 그것이 육화된 시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무엇보다 모든 것을 뒤바꾸는 힘이 있다. 집처럼 고정된 건물이나 인간 사회의 잘못된 제도와 고정관념의 경직성을 물렁물렁하게 만들 수 잇고, 티끌처럼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그것을 소중하게 관찰하는 시인의 시선에서 반짝이게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천지사방의 숨구멍을 차단하는 모든 장애요소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창조의 개벽이 도래하게 하여 길이란 길은 다 열어놓는 열림의 체험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바람과 숨결은 하나가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을 감싸고, 그것들의 소통과 화해를 방해하는 것들을 물리치거나 넘어서서 우주적인 숨결의 흐름을 열어놓는 바람과 호흡을 함께 하는 시가 그의 시인 것이다.

정현종의 시가 풍경과 주체의 황홀을 지향한다면 김명인은 풍경을 통해 주체의 상처를 더욱 확연하게 깨닫는 김훈에 가까이 있다. 그에게 풍경은 언제나 인생을 유추하게 하는 배경일 뿐 전경이 되지 못한다. 위에 든 시에서 바다의 아코디언은 갈매기울음으로 친다면 수수억톤을 넘을 파도소리와 함께 모래밭을 적셨다가 물러나는 파도의 모양, 곧 접혔다 펼쳐지곤 하는 파도의 모양을 은유한 것이다. 바다와 모래가 있는 한 파도는 계속 칠 것이므로 이 아코디언은 지치거나 병들지 않는다. 소리로 파이는 시간의 헛된 주름만 저의 生滅을 거듭할 뿐, 그것도 영원토록 그렇게 켜댈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은 속절없이 늙어간다. 무언가 쓰려고 하면 어느새 바닥 드러내는 삶은 뻘밭 위의 무수한 겹주름 같은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파도의 영원을 바라보는 유한한 시인의 고독은 얼마나 깊겠는가. 풍경을 통해 상처를 더욱 확인해야만 하는 시인은 결국 비극주의자인가.

그 상처가 다음의 송재학이나 기형도에게선 더욱 더 심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