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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신드롬’ 과 조선일보의 편향성

휘수 Hwisu 2006. 11. 22. 10:14

 ‘공지영 신드롬’ 과 조선일보의 편향성


어제(11월 20일)부터 조선일보에는 요즘 잘나간다는 대중소설가 공지영씨에 대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어제는 2면과 23면에 내 손바닥만한 크기로 그녀의 사진을 무슨 여성잡지의 화보처럼 크게 실은데 이어 오늘은 내 손바닥보다 더 큰 크기로 그녀가 여배우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23면에 화려하게 실었다.


물론 사진만 실은 게 아니라 그녀에 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마치 공지영의 ‘사생활 대변지’인양 시시콜콜 다루고 있다. 국내최대 부수를 자랑한다는 신문치고는 좀 뜻밖인 것 같다. 하지만 그동안 조선일보의 ‘보도 태도’를 감안하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이 신문은 최대부수를 자랑한다는 신문답게 가만 보면  ‘대중’들이 궁금해 할 것 같은 ‘이야기’를 재빨리 기사로 다뤄내는 데 ‘솜씨’를 보여 왔다.

꽤 오래 전 당시 어느 일간신문의 논설위원과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이 새삼 떠올랐다.


“조선일보는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기사의 질도 형편없는 2류 신문이었다. 경영상태도 열악했고, 그러다가 전두환이 정권잡고 나서 거기에 협력하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조선일보는 80년대 초 ‘전두환 정권’ 출범과 함께 ‘급성장’했고, 지금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대 일간신문으로 ‘군림’하고 있다.

DJ가 야당시절, 조선일보는 그에 대해 ‘드러내놓고’ 차별적인 기사로 그를 홀대했고, ‘이회창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DJ 역시 그렇게 잘 한 것도 없지만 당시에는 조선일보가 하도 ‘편파보도’를 하는 통에 ‘법정소송’까지 벌어진 일도 있었다.

97년과 02년 대선 때도 조선일보는 드러내놓고 이회창씨를 지지해 ‘한나라당 기관지’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조선일보에 칼럼을 쓰고 있는 류근일이라는 ‘늙은 칼럼니스트’는 자신이 ‘이회창씨를 찍었다’는 글을 조선일보에 버젓이 쓰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02년 대선 날 아침 조선일보의 사설제목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아마도 ‘정몽준 마저 노무현을 버렸다’였을 것이다.


기막히게 선동적인 제목이었다. 조선일보다운 ‘솜씨’였다. 어쨌든 조선일보는 ‘사세’를 다 기울일 정도로 이회창씨를 밀었지만 결국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조선일보의 보도태도를 보면 ‘언론은 형평성을 지켜야 한다’거나 ‘공평해야한다’는 ‘학설’은 그저 언론학 교과서에만 있는 이론일 뿐인 것 같았다.


얼마 전 그 류근일 씨는 조선일보에 쓴 칼럼을 통해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 중 한 명을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맞지 않아선지 아주 혹독하게 ‘씹은 일’이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누구’를 씹는다는 걸 금방 알 정도였다.


물론 언론의 자유가 있는 세상이니까 그가 무슨 얘기를 하든 그건 그의 자유겠지만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왜곡’시킨다는 건 ‘언론인의 정도’가 아니라고 배웠다. 류씨의 칼럼이 너무도 ‘편향적’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 한 모임에서 마침 ‘문제의 칼럼’이 화제가 되었다.


그 자리에서 한 인사는 “류근일 씨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좀 곤란하죠. 그가 씹어댄 인사는 류근일 씨가 출옥한 후 그의 신원보증을 서준 사람이거든요. 은혜를 원수로 갚은 꼴인데 권력이 센 펜대를 쥐었다고 그렇게 막 써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조선일보의 논조가 심했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요즘 조선일보를 찬찬히 보면 ‘누구’를 띄워 주려고 ‘작심’하고 있는지가 훤히 보인다.


물론 ‘누구’를 지지하든 말든 그건 그 신문사의 자유다. 하지만 ‘편향성’을 너무 심하게 드러낼 경우 독자들은 그 신문이 ‘언론의 정도’를 팽개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독자들은 그런 신문을 자연히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신문이 ‘정도’를 걷지 않을 경우 어떤 ‘말로’를 겪는지는 누구보다도 신문을 직접 만드는 사람들이 잘 알 것이다. ‘정치’와 마찬가지로 ‘신문’도 국민이 등을 돌리면 그 설자리를 잃는 것이다.  


난 이 자리에서 조선일보를 성토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단지 그래도 조선일보가 요즘 신문들 중엔 기사의 질이 제일 나은 것 같아 ‘월정 구독료 1만2천원’을 내고 조선일보를 애독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어제 오늘 실린 ‘공지영 보도’는 정말 ‘이건 아니잖아’라고 말하고 싶어 몇 자 적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 어른 손바닥 네 개를 합친 크기의 ‘공지영 신드롬(중)’이라는 기사를 보고나선 너무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이라는 걸 보니 아마 내일은 (하)의 시리즈 기사가 나올 것 같다.


물론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보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젠 ‘사회참여’의 ‘의무’를 느끼는 블로거의 한 사람으로서 어느 분야건 ‘옳지 않은 느낌’이 들 때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즉각 대응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는 상태여서 이런 ‘하찮은 기사’도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요즘 제일 잘 나간다는 대중소설가라면 ‘젊은 세대’들에게 미치는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지 않겠는가.


‘페이퍼신문’독자야 ‘반론권’이 인터넷 신문처럼 ‘즉각’적일 수는 없어서 조선일보 문화부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려다가 그럴 것 없이 우리 스카이뷰의 블로그에 직접 올려 방문객 여러분의 동의를 얻고 싶어 바로 컴퓨터를 열었다.


우선 ‘공지영 신드롬’ 기사 중 가장 눈에 거슬린 것은 20일자 2면과 23면 그리고 오늘, 21일자 23면에 실린 그녀의 ‘사생활’ 관련 부분이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몇 달 전에도 조선일보에 그녀의 기사를 쓰면서 ‘사생활’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었다.


그때도 ‘세 번 결혼해 세 번 이혼했다’는 내용을 기사화했었다. 한 여성작가의 특이한 프라이버시를 무슨 ‘자랑거리’라고 그렇게 활자로 각인시키는지 그 때도 그 기사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아무리 대중소설가라해도 그래도 작가인데 그렇게 파란만장한 사생활을 무슨 ‘통속 드라마’인양 드러내는지 그걸 쓴 기자의 역량도 의심스러웠다. 그런 기자도 조선일보에 있나 싶었다. 그런데 바로 그 기자가 어제, 오늘 공지영 기사를 또 쓴 것이다. 아마도 ‘공지영 전속 담당’인가보다. 어제, 오늘 신문에 난 ‘우스운 기사’를 몇 구절 옮겨 보겠다.  


“‘당당하고 솔직한 싱글 맘의 상징 같다’는 작품 외적 요인도 젊은 여성 독자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을 겪었지만 ‘내가 세상에 태어나 제일 잘한 게 애들 셋을 낳은 것’이라는 공지영은 ‘비록 실패한 결혼생활이었지만 이 아이들을 낳기 위해서라면 다시 결혼을 하래도 기꺼이 하겠다’고 당당히 밝히는 싱글 맘이다.” “치열하게 사랑했고, 치열하게 헤어졌던 끝에 얻은 세 아이를 혼자 키운다. 그녀는 이제 씩씩한 싱글 맘의 상징으로까지 떠올랐다” “공씨는 큰 딸과 두 아들을 혼자서 키우고 있다. 아이들 성씨가 다 다르다고 솔직하고 당당하게 밝혔던 공씨는 우리 가족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새로운 형태의 가족상을 제시하고 싶다고 말해왔다.”

“소설제목도 ‘즐거운 나의 집’으로 정해 두었지만 아직 집필에 들어가지 못했다. ‘수험생 큰 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우리 집이 즐겁지가 않아서 .... 에이’ 라면서도 호탕하게 웃는다.”      


이 정도라면 가히 ‘공지영의 사생활 대변지’라고 해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치열하게 사랑했고, 치열하게 헤어졌던 끝에 얻은 세 아이를 혼자 키운다’는 대목이 제일 ‘압권’이다. 도저히 신문기사 같지가 않다. 아예 기자가 통속 드라마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젠가 공지영은 한 일간신문에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지금 아빠와 성이 다르다는 걸 제발 몰랐으면 좋겠다. 성을 바꿀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싶다’는 간절한 심정을 글로 써서 보는 이로 하여금 뭉클한 심정이 들게 한 적도 있었다. 결손가정의 편모슬하에서 자라나는 각각 성이 다른 세 아이들이 겪어야할 정신적 상처는 또 오죽하겠는가!


그때는 ‘법적으로’ 계부의 성(姓)을 따를 수 없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가족법’이 개정되면서 ‘성’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게 하기 전까진 수많은 ‘재혼가정’에서 아이들이 계부와 ‘성’이 다른 이유로 ‘상처’를 너무 많이 받는다는 게 ‘사회문제’로 떠오른 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세 번 결혼해 세 번 이혼한’ 특이한 결혼생활의 경력이 있는 공지영으로선 아이들의 ‘성’문제로 한때나마 ‘고통’을 겪었던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알려진 구문이다. 그런 걸 조선일보 같은 메이저 신문에서 한 신문안에 세 번씩이나 ‘성이 다른 아이들을 홀로 키우는 싱글 맘’이라는 걸 강조하면서 썼다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것도 '당당히'라는 쓰지 않아도 될 부사를 세번 씩이나, 치열하게 라는 수식어도 두번씩이나 써가면서 강조한 것은 기자의 기사쓰기 능력을 의심해볼만한 대목이다. 어쩌면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공지영의 그런 자유분방한 사생활이 꽤나 대단해 보였나보다.


‘좋은 말’도 세 번 들으면 지겨워진다는 속담이 있다는 걸 그 기사를 쓴 기자는 모르고 있나보다. 게다가 ‘무슨 자랑거리’라고 그렇게 연 이틀 계속해 ‘싱글 맘’ 소리를 강조하는 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여타 신문가운데 그래도 조선일보는 기사의 질이 그 중 나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제 오늘 ‘공지영 신드롬’을 보면서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공지영의 독자는 20, 30대의 신세대 젊은 여성들이 80%를 차지하고 있다는데 행여나 그녀의 독특한 ‘결혼 경력’을 젊은 여성독자들이 무의식중에라도 ‘동경’하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마저 들 정도였다. ‘미모에 베스트셀러 작가에 세 번씩 결혼, 이혼을 했다’는 건 철부지 젊은 여성들이 볼 땐 일견 그럴싸한 ‘화려한 인생’으로 보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영향력 있다는 조선일보에서 인기 있는 한 여성작가를 시리즈로 다루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녀의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거의 ‘미화· 과대포장’한 듯한 수준낮은 기사를 보면서는 구독료가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기사는 그렇게 3일씩 ‘연속 기획’으로 다룰 성질은 아닌 것 같다. 물론 ‘편집권’이야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 손에 있겠지만 ‘구매하는 고객’의 입장도 배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현 대통령이 ‘인사를 멋대로 하는 것’에 대해 조선일보는 시원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그에 대해 대통령 측은 ‘인사권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한다. 양 자의 입장이 모두 나름의 일리는 있다.

그래도 이 정권이 하도 죽을 쑤고 있으니까 신문의 비판이 조금 더 설득력 있다고 본다.

더구나 언론은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기관이니까 정권의 실세들은 언론의 비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문을 제작하는 사람들은 ‘편집의 고유 권한’을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이라는 상품을 ‘돈 내고’ 구매하는 고객들이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각 신문에선 요새 부쩍 ‘독자의 소리’란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을 것이다.


각 신문사마다 고유의 ‘칼라’가 있고 지향하는 목표가 다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독자대중들’을 위한다는 자세가 결여되어있다면 그 신문의 미래는 밝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조선일보의 경우 앞서 지적한 대로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인사들에게 혹독한 것까지야 그들의 고유 권한인 ‘편집권의 자유’로 봐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형평 있는 보도’를 한다는 측면에서 볼 땐 그렇게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들과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인격 자체’를 모독하는 식의 칼럼을 싣는다는 건 신문사 얼굴에 먹칠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적에겐 가차 없는’ 논조를 보여주며 ‘반론권’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있는 신문이  ‘기사의 질’면에서도 선정적인 ‘3류 잡지수준’에 불과한 기사를 인기가 좀 있는 여류작가의 사생활이라고 해서 ‘3일 연속’ 내보낸다는 것은 신문의 질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그 신문사의 ‘신뢰도’에 금이 가게 하는 일이다. 다른 작가들 이야기들도 그 정도로 다뤄준다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공지영 찬가’를 불러대는 것은 볼 성 사납다.


우리가 보기에 이번 ‘공지영 신드롬’같은 기사는 그렇게 많은 지면과 그렇게 큰 사진들을 써가면서 3일 씩 연속 보도할 ‘감’은 전혀 아니라고 본다. 기사 쓸게 얼마나 많은가!!

굳이 ‘사연 많은 미모의 젊은 여류작가의 사생활’을 다루고 싶으면 차라리 ‘여성잡지’나 방계회사인 ‘스포츠 신문’에 실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도 한 번으로 족하다. ‘칭찬도 세 번 들으면 식상한다’는 진리를 조선일보제작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출처, 야후skyview블로그, 뉴욕커(mj24578)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