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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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옥의 김수영 다시 읽기 <사랑> / 펌

휘수 Hwisu 2006. 3. 23. 19:29


  제목이 <사랑>이니 연시로도 읽을만한 시군요. ‘너’는 무엇을 바라지도 않고 주는 사랑만을 한 대상이고, 그래서 화자인 ‘나’는 ‘너’로 하여금 ‘변치 않는’ 그런 위대한 ‘사랑’의 정신을 배웠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서 ‘너’의 존재는 ‘꺼졌다 살아났다’ 하는 식으로 조금씩 잊혀져 간다는, 그래서 ‘너’는 ‘번개’처럼 선명한 ‘얼굴’이지만 ‘번개처럼 금이 간 얼굴’이기도 하다는 그런 내용으로 말입니다. 여하튼 ‘변치 않는 사랑’을 배우게 한 ‘너’의 존재는 큰 존재임에 틀림없겠지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의 사랑 같은 것도 그런 것일 터입니다. 하지만 이 시는 쓰여 진 시기를 감안하고, ‘너’의 존재 역시 보통의 연인의 사랑으로 이야기하기엔 너무도 큰 존재의 형상이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역사와 관계된 어떤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짧은 시이니 일행일설로 읽어볼까 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바른 어법으로는 ‘너로 해서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일테니까 우선 진술의 효과를 위해 글의 순서를 도치시키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네요. 앞서도 언급했듯이 ‘변치 않는 사랑’을 배우게 한 ‘너’는 큰 존재네요. ‘너’의 실체가 궁금해지는군요. ‘변치 않는 사랑’을 배우게 했다? ‘변치 않은 사랑’을 배우게 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혁명? 역사? 민중? 4, 19 직후에 쓰여 졌음을 감안한다면 혁명일수가 있겠군요. 역사는 결국 진보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역사일 수가 있고, 민중이야말로 역사의 주체이고 역사발전의 근본동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민중일 수도 있겠네요. 그 어떤 역사적 인식이 여기엔 있는 듯해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진리는 변치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인식 속에서의 그 어떤 깨달음이 있어 1연의 진술이 나온 것 같아요.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찰나’는 지극히 짧은 순간이지요, 어떤 일이나 상태가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을 말하는 겁니다. 애시당초 ‘너의 얼굴’은 환한 것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왜냐면 ‘어둠’에서 ‘꺼졌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고 했으니 앞으로 다시 꺼질지도 모르겠군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투영되어 있는 대목이네요.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바로 5,16이 일어나니까 그런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일은 1연에서는 ‘너’였는데 2연에서는 ‘너의 얼굴’로 조금 더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이지요. 본래 ‘얼굴’이란 말은 지금의 ‘얼굴’처럼 의미가 좁은 것은 아니었지요. 눈, 코, 입이 달린 게 ‘얼굴’이 아니라 사물의 모양이나 몸 전체를 나타낸 게 ‘얼굴’이었지요. 지금은 머리의 앞부분이 ‘얼굴’이지만 예전엔 그 의미망이 더 큰 실체였다는 말입니다. 여하튼 ‘너의 얼굴’이라고 그 의미가 좀 더 구체화되고 보니 혁명 같은 느낌도 들어요. 쓰여 진 시기를 감안해도 그렇고 말입니다. 민중에 대한 믿음? 역사에 대한 믿음? 4, 19는 시인에게 역사발전에 대한 믿음, 민중의 실체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지요. 그런데 그 ‘얼굴’이 3연을 보면 ‘번개처럼 금이 간 얼굴’이 됩니다. 이전의 시들을 보면 김수영은 4, 19혁명이 변질되자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고, 때론 분노를 표출했고, 때론 극도의 실망감을 보이면서 대상을 풍자하기도 했지요. 여기서도 ‘번개처럼 금이 간 얼굴’은 혁명의 변질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불안감이 베어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금은 ‘금’이 간 것에 불과하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5,16이 일어나면서 풍지 박산 되고 말지요.

 

  이 시는 한 순간 소회의 일단을 말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이 시 역시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는 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의 표면에 격정의 형태로 드러나지 않고, 내면 깊숙이 스며든 형태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또한 앞날에 대한 빛나는 예감이 돋보이기도 하네요. 하지만 이 시 역시 절창으로 느껴지지는 않네요. 그냥 한 순간의 소회를 말하고 있다, 그런 정도의 생각이 들 뿐입니다. 위대한 시인을 너무 평가 절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웃음)

 

 

오봉옥

 

오봉옥 시인은 1985년, 창작과 비평사 16인 신작시집 『그대가 밟고 가는 모든 길위에』에 시 『울타리 안에서』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지리산 갈대꽃』, 『붉은 산 검은 피 1, 2』, 『나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 등이 있고, 동화 『서울에 온 어린왕자 1, 2』, 수필집 『난 월급받는 시인을 꿈꾼다』, 평론집 『서정주 다시 읽기』, 『시와 시조의 공과 색』, 『시로 쓰는 이중나선』 등 다수의 저서를 간행하였습니다. 현재 연세대, 경원대, 선문대 등에서 시창작 강의를 하고 있으며 남한과 북한이 함께 펴내는 사상 첫 통일 국어사전 '겨레말큰사전' 의 남측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디지털문화예술아카데미 부설 <아트앤스터디 창작학교> 시 기초반에서 창작 강의를 펼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