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천, 비전과 시의 존재양식 / 金埈五(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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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이후 한국의 현대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변모해 가고 있다. 형태면에서 보면 현대시는 연작(連作)의 형식을 두드러지게 선택하고 있으며 또 점차 장형화되어 가고 있다.물론 이 두 가지 형태상의 특징은 60년대 이후 현대시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조선조의 연시조와 사설시조, 가까이 1930년대 이상의 「오감도」의 연작시 등을 누구나 쉽게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이 두 가지 형태가 크게 유행하게 되어서 그 이전의 시형식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현대시의 장형화는 유사 판소리 사설, 유사 무가(巫歌), 또는 유사 모방 장르(곧 유사 서사 장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만큼 장르상의 문제들을 던지고 있다. 미당(未堂)의 「질마재 신화」가 연작시의 형태로 발표되었을 당시 많은 비평가와 독자들이 이것도 시냐고 했던 당혹감과 경악감은 오늘날엔 예사로운 것이 되어 버렸다.
『장자시』(1975), 『심법』(1978), 『율』(1981)의 세 권의 시집과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박제천 씨의 작품들은 이런 현대시의 형식적 특징들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우선 연작시 형식을 누구보다 선호하고 있는 시인이다. 이것은 마치 그의 시적 체질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그의 대표적 표정이 되고 있다. 또한 그는 서사적(narrative)인 기법을 즐겨 쓰고 있다. 스토리를, 즉 액션을 시에 도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언어의 의미만이 아니라 소리의 효과조차 시적 긴장을 창조하는 요소로 중시하고 있다. 무가적(巫歌的) 어조가 그것이다. 그는 서정 양식의 고정된 형식의 굴레를 벗어나 자신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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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시는 한 인간이나 사물의 전체상을 구성하거나 적어도 가능한 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려는 의도의 산물이다. 원래 서정 양식은 ‘순간’의 양식이다. 사물의 순간적 파악, 시인 자신의 순간적 내면 상태를 표현한 것, 인생의 단편적 에피소드다. 서정 양식에는 줄거리가 없고 배경도 시간의 흐름도 없다. 그것은 연속적이고 역사적인 또는 서사적 시간에 관심이 적은 것이 그 본질이다. 따라서 서정 양식에서 서정적 자아는 불연속적 정체성(discontinuity identity)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연작시는 이런 서정 양식의 고유한 존재 양태를 벗어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박제천 씨의 연작시들은 일단 이런 문맥에 놓인다.
꿈의委囑에매여벌거벗은겨울의아이들은비둘기 비둘기의나래에묻혀하늘은色彩를뒤집어쓰네 겨울의아이들은油印된꿈의말저바다의하나섬이네 龍의구름을지즐타고겨울의아이들은눈멀리 中央亞細亞의바람실은저바다의깨어있는섬이네 기러기길을쓸어가는물결이네 별들이하나씩떨어져불붙을때저바다의살아있는섬 겨울의아이들은어둠의주름주름에서스스로의發見으로 번뜩이는燈아래내가풀어놓은꿈의말 바닷물을밀어내는저희彈力으로부딪치고부딪치다가 泡沫로부딪쳐부딪치고있네. ―「莊子詩 그 여덟」
「장자시」는 모두 33편으로 구성된 연작시다. 여기서 우리의 시적 체험은 두 가지 놀랄 만한 현상을 목격하는 데서 시작된다. 첫째로 이 작품에서 행은 구분되어 있지만 의도적으로 띄어쓰기가 전연 되어 있지 않으며 구두점도 마지막 시행 끝에 마침표만 찍혀 있을 뿐 전연 사용되고 있지 않다. 30년대 이상(李箱) 시를 상기시킨다.
둘째로 이미지들의 연결이 좀처럼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 체계로 되어 있다. 흔히 기상(奇想;conceit)이나 절연(絶綠;depaysment)이라 불리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33편의 전체에 일관되고 있는 현상이다. ‘~네’라는, 함축적 청자(聽者)나 실제의 독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종결 의미를 두드러지게 많이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현상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우리의 성급한 접근을 거부하고 있다.
띄어쓰기와 구두점 무시는 우리의 의미론적 접근을 혼란시킨다. 그러나 이 혼란은 시인이 깔아 놓은 미적 장치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언어의 잠재적 능력을 다양하게 발휘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를 주술적으로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시에서 언어의 주술적 기능은 소리로써 우리의 영혼을 전율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띄어쓰기 때문에 문법적 단위에 구애되지 않고 그대로 읽어 버리면 마법사의 주문 같은 것이 된다. 이것은 무가 형식의 연작시 「오구대왕의 산문」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는 전통의 인위적 리듬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자연스러운 리듬을 노렸는지 모른다.
이런 비문법적 장치는 이미지의 결합 양식에서 더욱 교묘하게 나타난다. 그는 산문 「사물과 이치」에서 그의 시작 초기의 약 10년간은 ‘상상력의 훈련’에 전력을 쏟았다고 기술했다. 그에게 상상력이란 무엇보다도 현실을 변용시키는 능력이다. 따라서 상상력의 훈련이란 현실을 변용시키는 훈련이다. 이 훈련의 산물이 이미지들의 돌연한 연결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꿈의委囑에매여벌거벗은겨울의아이들은비둘기
연작시 「장자시」 33편은 모두 시적 긴장을 자아내는 기상(奇想)들의 찬란한 박물지(博物誌)다. 그의 상상력은 어쩌면 그렇게도 신기하고 풍부하게 기상들을 창조해 낼 수 있을까 하고 우리가 감탄해 마지 않을 만큼 풍부한 저장고와 같다. 그의 시어는 꿈의 언어다.
번뜩이는燈아래내가풀어놓은꿈의말
그는 현대 생활에 꿈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문명의 발달이 우리가 지닌 꿈을 실현해 주거나 우리의 꿈보다 앞서기”때문이라는 것이다(「꿈의 하늘」). 요컨대 우리의 삶은 꿈이 없는 산문적 현실이라는 것이다. 과학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꿈을 빼앗아 버렸다. 이 빼앗긴 꿈을 상상력에 의해 다시 회복하려는 것이 그의 시작 태도다. 「장자시」가 담고 있는 그 숱한 기상들의 박물지는 이 꿈의 상관물이다.
아득한하늘龍의눈알처럼(「莊子詩 그 스물 아홉」) 손오공의九萬里구름을타도(「莊子詩 그 서른」)
용과 손오공은 모두 상상적이고 허구적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존재들을 바로 현실의 존재처럼 느끼고 있다. 이밖에 하늘, 연(鳶), 별 등의 사물들은 우리의 삶을 상상으로 풍유롭게 하는 이미지들로써 그의 시에 채용되고 있다. 그의 꿈은 현실을 ‘초월’하고 ‘배제’하기보다 변용하고 확대한다. 말하자면, 꿈은 현실과의 대립이 아니라 현실의 승화다. 그는 “꿈과 현실의 가름이 아니라 꿈이기도 하고 현실이기도 하였던”(「꿈의 하늘」) 경지를 갈망한다. 그는 이것을 장자의 형이상학적 공간에서 발견한 것이다. 여기서 그의 상상력은 연속성(連續性)의 원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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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꿈에 장자는 나비가 되었다. 허허연한 것이 나비가 되어 스스로 즐거워하여 뜻이 흡족했던지 자신이 주임을 몰랐었다. 문득 깨어 보니 곧 역력한 것이 바로 주 자신이었다. 주의 꿈에서 나비가 나타났는지 나비의 꿈에 주가 나타났는지를 모른다. 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구별이 있을 터인데 이것을 물화라 이른다. (『莊子』, 「齊物論」)
장자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자가 되는 경지는 무차별의 경지다. 이런 경지에서는 꿈과 현실도 구분되지 않는다. 그의 상상력이 기상을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비법이 이 연속성의 원리다. 그는 서양의 예술(주로 繪畵를 가리킨다)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는 것”을 배웠고 동양의 예술에서 “인간과 사물이 習合되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幻想과 精神」). 전자는 ‘환상(幻想)’이고 후자는 ‘정신(精神)’이라고 그는 각기 명명한다. 현실을 변용하는 원리로서의 상상력이 전자에 상응한다면 연속성의 원리로서의 상상력은 후자에 상응한다.
오오인연의칼끝에길이놓였네 ―「莊子詩 그 서른 셋」 불교의 인연설은 우리의 전통적 생활관이다. 이것은 연속성의 원리며 변신의 원리다. 특히 그의 경우엔 형이상학인 동시에 시의 방법이다. 다시 말하면 「장자시」의 그 숱한 기상들은 이미지의 연결 방법으로서의 이 인연설에 근거하고 있다. 인연설의 발상은 그의 시들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죽으면 새가 되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다 하니 더러움과 때에 전 나는 새가 된다 할지라도 하늘 저쪽 귀퉁이나 빗겨 날아야겠지요 ―「두번째 亢」
東쪽 거리의 첫번째 집에 사는 女子여 百年 後에도 그곳에 살면서 그때는 바람에 날리는 티끌인 나를 記憶하실까 ―「첫번째 女」
하기는 어느 날 갑자기 줄이 끊어진 한 조각 鳶이 되어 이 세상과는 다른 세계로 던져진다면 대가리가 잘린 쇠못 혹은 모가지가 꺾인 들꽃 혹은 얼굴도 없는 비의 모습으로 또 한 세상을 견뎌내겠지요 ―「첫번째 저」
인연설은 연속성의 원리이고 변신의 원리이기 때문에 기상이 발생하고 인간과 사물이 습합된다. 인간과 사물의 습합은 그에게는 동양의 ‘정신’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인연설은 장자의 형이상학과 연결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사물의 습합은 장자의 무차별성과 일치한다.
한밤중에 깨어 보니 나는 무덤가의 한 조각의 骨片으로 남아 있었다. ―「토끼사냥 그 열 하나」
이승도 저승도 같이 여기는 풀무치 한 마리의 삶이다. ―「과녁 그 일곱」
장자의 형이상학적 공간에서 일체의 만물은 차이가 없고 구별이 없다. 따라서 죽음과 삶도, 꿈과 인생도 구별이 없다. 무차별은 연속성의 원리에 조응한다. 박제천 씨는 세 번째 시집인 『율』을 상재할 적에는 ‘자연과의 습합’을 노래했다고 했다(「事物과 理致」). 인간과 자연과의 습합, 사물과 사물의 습합이 장자의 형이상학적 공간이며 불교의 인연설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미지들을 자유롭게 상상적으로 결합하는 시의 방법을 이미 「장자시」를 쓸 무렵에 터득했으며 이 방법의 훈련이 ‘상상력의 훈련’이 되었다.
그러나 띄어쓰기와 구두점의 무시, 기상의 창조는 결코 자동기술법의 무의식적 작용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치열한 의식의 산물이다. 그는 ‘각성의 시인’이다. 이것은 「장자시」의 연작시가 보여 주는 전체상의 한 구성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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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자는 배운 자다(The suffered is the learned). 이것은 유명한 그리스의 격언이다(ta pathemata mathemata). 이 경우 경험이 고통 그 자체라면 배운 자의 배움은 더 심화되고 더 확대된다. 스페인의 철인인 우나무노에게 고통은 ‘의식(意識)의 길’이다.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을 인식하고 세계를 인식한다. ‘상상력의 훈련’에서 박제천 시인이 터득한 것은 고통이 의식의 길이요, 깨달음의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서 그는 자신을 ‘깨어 있게’ 한다. 漢籍갈피에서날리는知慧의숨소리 깨어있는나의안에서해를길어올리는두레박소리 ―「莊子詩 그 열 하나」
심지어 그에겐 꿈도 깨달음과 병존한다. 어쩌면 그에겐 꿈이 깨달음인지도 모른다. 꿈조차 깨달음과 병존함으로써 그는 철저하게 각성의 시인이다.
늘잠자면서깨어있는例外 ―「莊子詩 그 스물 여덟」
그의 시에는 유난히 ‘피’라는 이미지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또 ‘날카로운 잎끝’이라든가 ‘칼끝’ 등과 같은 예민성의 감각을 환기시키는 이미지들도 즐겨 쓰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고통과 깨달음의 상관물들이면서 역설적으로 아름다움의 감각과 또 병존하고 있는 것이다. 장미의 가시처럼 그의 시의 아름다움 속에는 고통이 숨어 있다. 또한 그의 고통은 뜨끈하면서도 질퍽한 삶의 현실감으로 우리를 압도하기도 한다.
紅疫을앓는나의뿔피리소리는뜨거워라 드문陣痛의손뼈를꺾으며어머니의손뼈를꺾으며 뿔피리소리는삐이삐이울어라나이든내가슴속의 이무기처럼슬픈날이면하늘에서땅에서울어라 어린바다의물구비가혈관속을흘러라 ―「莊子詩 그 스물 하나」
고통은 시간의 흐름에도 관계 없이 변하지 않는 자기동일성이다. 그것은 그의 전부이며 그의 자기 형식의 요소이며 그를 지탱시키는 일관된 인격 자체이기도 하다. 고통이 인간의 필연적 삶의 조건임을 그는 이미 장자의 형이상학적 공간에서 터득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마음의 궁리’에 힘썼다는 두번째 시집 『심법』에서는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로 나타난다.
이 밤의 빈 하늘에 매달린 鳶 하나 바람이여 내가 마음으로 그려 놓은 怪石 하나 사라졌다 나타남이여 이 밤을 꾸미는 煩惱여 내가 마음으로 가꾼 墨竹에 찔림이여 마음 편하게 사는 法을 안 이상 무심하고 무심하게 살아 볼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諸君 ―「心法才篇」
이 시의 화자(話者)는 인생을 달관한 노인이다. 그에게 ‘마음 편하게 사는 법’이란 ‘무심하고 무심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 화자는 박 시인이 뒤집어 쓴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이 가면 속에 이 세상을 결코 ‘무심하게’ 살 수 없다는 고통을 감추고 있다.
출처, 박제천시인과[문학과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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